274화 : 8장 난세는 영웅을 원하고, 영웅은 패웅을 부른다 (3)
진무원과 곽문정이 밖으로 나왔다·
새벽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모든 생명체가 아직 잠에 빠져 있을 시간에도 붉은 태양은 그 어느 순간보다 더 강렬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새벽부터 대지 위로 강렬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지랑이 너머에 운중천의 본진이 있었다· 본진이 있는 곳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안개처럼 퍼져 사방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겠지· 이번 전투가 부현뿐 아니라 삼 년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 분수령이 되리라는 것을·’
인간의 감각은 극한의 상황에서 가장 예리하게 깨어나고 그들이 지금 느끼는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살의가 지배하는 새벽의 대지를 보며 진무원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막연히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이곳에서 승리를 차지한 자들이 전황을 지배할 것이다·’
운중천이 승리한다면 부현을 내줘야 한다· 아울러 화산파와 종남파도 위험해진다· 반대로 운중천이 이긴다면 부현에 걸쳐진 전선이 위로 밀리게 된다·
진무원은 이제 결정해야 했다· 어떤 것이 자신과 천하를 위해 최선의 방법인지·
“형?”
농가 안에 있던 곽문정이 어느새 밖으로 나와 진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곽문정은 진무원의 갈등 어린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무원의 어깨에 짊어진 거대한 삶의 무게를 곽문정은 알지 못한다· 그가 아는 것은 자신이 진무원의 입장이었다면 아마 모든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진무원의 결정에 따라 싸움의 향방이 갈리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곽문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진무원은 석상이 된 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리고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 곽문정은 입안이 바싹바싹 마름을 느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영원히 어떤 말을 할 것 같지 않던 진무원이 마침내 임을 열었다·
“문정아·”
“예!”
“운중천에 들어가야겠다·”
“예?”
곽문정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는 단 한 번도 진무원의 결정에 토를 단 일이 없었다· 그는 그만큼 진무원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었다·
“많이 위험할 것이다·”
“알고 있어요·”
곽문정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끝까지 진무원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진무원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운중천·’
진무원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인 듯 부현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구름·
투둑!
운중천 무인들의 어깨 위로 빗방울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무인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장대비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거세게 쏟아진 비는 운중천 무인들의 몸뿐 아니라 대지를 촉촉하게 적셨다· 하지만 누구 한 명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닥이 진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대지에 배어든 핏물이 다시 진흙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에 무인들의 몸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진창은 발목을 무겁게 붙잡고 있었다·
‘최악이다·’
몇몇 눈치 빠른 무인은 지금이 최악의 상황임을 느끼고 낯빛이 경직됐다·
그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와아아!”
저 멀리 부현 북쪽에서 커다란 함성과 검은 그림자의 해일이 무서운 기세로 밀려왔다·
“밀야다·”
“놈들의 파상공세다· 모두 전투 준비하라·”
급히 운중천의 수뇌부들이 군막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중에는 심원의를 비롯한 척마대도 있었고 용무성을 필두로 철기문의 무인들도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이제까지 공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원이 동원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밀야 역시 남은 인원들을 탈탈 털어 마지막 공세를 펼치는 것이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총공세에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온다!”
누군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서 수많은 암기의 비가 날아왔다· 철질려나 표창 같은 조악한 암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암기를 구별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이가 눈먼 암기에 맞아 죽어갔다· 적아를 구별하기 힘든 난전이 펼쳐졌다·
상대를 구별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어깨에 찬 붉은 천과 육감뿐이었다· 그들은 아귀처럼 뒤엉켜 싸웠다·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군대의 전투와 달리 무림인들의 싸움은 그 어떤 형식도 규칙도 없었다· 물론 초기엔 나름 조직적으로 대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수준과 맞는 상대를 찾아 일대일로 겨루는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무림인들의 싸움은 더 처절했고 목불인견의 참상을 연출했다· 하지만 혼탁한 진흙탕 속에서도 연꽃은 피어나는 법이다· 난전 속에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척마대였다· 그들은 마치 날을 세운 한 마리 고슴도치처럼 하나의 생명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으아악!”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처절한 비명과 주검만이 남았다·
길이 생겼다· 피와 주검으로 다져진 죽음의 길이·
“척마대의 악마다· 모두 피해·”
척마대의 정체를 알아본 밀야의 무인들이 절규를 했다· 그들의 얼굴엔 척마대를 향한 절망의 빛이 가득했다·
밀야의 무인들에게 척마대의 무인들은 공포와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전장에 출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용이 급격히 붕괴될 만큼·
둑이 무너진 저수지처럼 척마대는 전장을 거침없이 휩쓸었다·
“흐흐! 이 정도 공세로 운중천이 무너질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심원의가 음소를 흘렸다·
심원의의 얼굴은 예전과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예전의 그는 절대 감정의 변화를 내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몸 안에 담고 있는 살기와 야수성을 거침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전장의 광기에 침습당한 것이다·
심원의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척마대가 피에 취해 도살하고 있었다· 그들의 광기에 운중천의 무인들마저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위험해!”
혜지 어린 눈빛에 경계의 빛이 떠오른 여인은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그녀는 운중천 진용 가장 높은 곳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적진 깊숙이 들어간 척마대의 모습들이 보였다· 그들은 그야말로 가공할 무위를 아낌없이 발휘하며 적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척마대는 그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훌륭하게 성장했다· 이 정도라면 담수천을 보좌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무위였다· 하지만 너무 흉포했다· 적들뿐 아니라 아군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만큼·
“이러다간 선을 넘게 돼· 이 이상 넘어가게 되면 오히려 강호의 무인들에게 경원시될 거야·”
천의 지혜를 가졌다는 그녀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었다·
그렇다고 척마대를 배척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운중천에 착실히 쌓아둔 정치 무력 기반이 모조리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척마대가 이끄는 심원의의 척마대는 양날의 검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위안했다·
“수천이라면 저들을 훌륭하게 통제할 수 있을 거야·”
그녀가 조그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머지않은 곳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척마대가 지나간 곳에 정의대를 더 투입해·”
고개를 돌려보니 이곳에 있는 운중천의 무인들을 총지휘하는 수라유성도 홍천학이 보였다·
그는 연신 휘하의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그의 마음만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는 못 했다·
서문혜령의 눈에 한기가 떠올랐다·
홍천학은 분명 천하에서 손꼽히는 도객이었다· 분명 운중천의 십대장로답게 극강한 무공을 소유했지만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홍천학은 서문혜령보다 한 발짝 늦게 상황을 읽고 대처하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서문혜령의 말은 또 귀담아 듣지 않았다· 결국 서문혜령은 거의 방관하다시피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내 전장이 아니다·’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제 곧 강호에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일어날 것이다· 서문혜령은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쩌어엉!
그 순간 거친 기파가 마치 폭풍처럼 전장을 휩쓸었다· 서문혜령이 자신도 모르게 기파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순간 그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전장이 급변하고 있었다·
이제껏 전장을 지배하던 척마대가 웬 괴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저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괴인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푸른 전포의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천무대였다·
천무대는 이제껏 다른 평범한 무인들 사이에 숨어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들은 척마대를 운중천의 본진에서 분리하고 밀야의 본진 깊은 곳으로 끌어들였다·
은밀히 퇴로를 끊고 전력을 집중했다·
그는 척마대의 무공을 면밀히 관찰했었다·
‘그들은 분명 강하다· 개개인의 무공은 강호의 절정고수를 넘어서고 특히 집단전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평범힌 집단전 이야기지·’
개개인의 무공이 특출 나다 보니 그들에겐 개인적인 성향이 두드러졌다· 아슬아슬하게 본진을 유지하지만 눈앞에 죽일 상대가 있으면 은근슬쩍 전열을 이탈하곤 했다· 물론 다시 순식간에 본진에 합류했지만 궁상화의 눈에는 커다란 구멍으로 보였다·
궁상화가 외쳤다·
“원광 앞장서라· 놈들의 진용을 두 동강 낸다·”
“흐흐! 알았수·”
묵원광이 힘찬 대답과 함께 앞장섰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쇠망치 비슷한 것이 들려 있었다· 앞쪽은 쇠망치처럼 뭉툭했고 뒤쪽은 정처럼 뾰족했다·
묵원광의 애병인 만병파정(萬兵破釘)이었다·
“으랏차!”
묵원광이 만병파정을 휘둘렀다·
쿠와앙!
순간 만병파정이 닿은 곳에 방원 반 장여의 깊은 구덩이가 생겼다·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척마대의 무인들이 기겁했다· 자칫 만병파정이 스치기만 하더라도 육신은 흔적조차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묵원광의 별호 백인력한·
백 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내가 만병파정을 앞세워 무식하게 진군했다· 그 뒤를 천무대가 따르며 척마대의 진용을 두 쪽으로 갈라놨다·
“막아라! 놈을 막아·”
심원의의 말에 몇몇 척마대 무인이 달려들었다·
쾅!
하지만 그들은 달려드는 속도보다 배는 빠르게 뒤로 튕겨났다· 그런 그들의 몸은 어육처럼 짓이겨져 있었다·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묵원광의 뒤쪽에서 율사희를 비롯한 천무대의 무인들이 각자 무기를 휘두르며 전진했다· 그 때문에 척마대의 진용은 전차 갈라지고 있었다·
“큿! 진용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 모두 뭉쳐라·”
심원의의 명령에 척마대의 무인들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들의 처절한 노력과 달리 점차 진용은 두 동강이 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심원의가 성명절기인 홍옥마수를 펼쳤다·
쾅!
“크악!”
천무대의 무인 두어 명이 피 떡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두 명이 죽으면 네 명이 달라붙었고 결국 심원의는 적진에 홀로 고립되었다·
“이런 건방진 것들이!”
심원의 눈에서 흉광이 터져 나왔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척마대가 이렇게 궁지에 몰려본 적이 없었다· 적들은 척마대의 그림자만 봐도 지리멸렬했고 그들은 철저하게 승자의 입장에서 도륙을 했으니까·
하지만 천무대는 달랐다· 그들은 척마대 자신도 몰랐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척마대가 목숨을 잃었다·
“척마대를 구하라·”
홍천학이 뒤늦게 병력을 급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사태를 되돌리기에는 모든 것은 너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정의대 무인들은 척마대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목숨을 일었고 척마대는 폭풍 속의 일엽편주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큿! 이런 실수를·”
뒤늦게 심원의가 자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적들은 오직 척마대 하나만을 보고 부나방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으악!”
척마대 무인들의 비명 소리가 연이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척마대는 이미 반격할 힘을 잃었다· 모두 조금만 더 힘을 내라·”
궁상화가 천무대와 밀야의 무인들을 독려했다·
“네놈이구나· 이들의 수괴가·”
심원의가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려 궁상화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궁상화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수장을 본진에서 떨어뜨려 놓는다· 그가 심원의를 상대하는 사이 수하들이 착실히 척마대를 죽일 것이다· 한 명 두 명 그렇게 죽다 보면 어느 순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저울추가 현격히 기운다·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도살만 남는다·
그것이 궁상화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가 심원희를 상대로 무공을 펼쳤다· 그의 무공은 가공해서 결코 심원의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만 끌면 된다·’
궁상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모든 것이 그가 그린 그림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저벅!
그때였다·
그가 미처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가 전장에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