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 8장 난세는 영웅을 원하고, 영웅은 패웅을 부른다 (2)
부현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진무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몇 번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 운중천의 저지선이 남쪽으로 후퇴하고 부현 일부가 밀야에게 넘어갔다·
진무원과 철기문이 도착했을 무렵 부현 곳곳에서는 초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과 두어 시진 전까지만 해도 죽고 죽이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거리 곳곳에는 아직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피 웅덩이가 생겨나 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운중천의 무인들이 부상자와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 부현의 모습에 화산파와 종남파 무인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안전한 본산에서만 있었기에 그들은 이런 아수라 지옥도를 볼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강호는 예와 의가 있는 멋스러운 곳이었다· 그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강호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몇몇 이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우웨엑!”
“이럴 수가!”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부인하고 싶었다· 현실은 그들의 막연한 상상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
반대로 진무원과 철기문의 무인들은 표정은 담담했다· 속세와 떨어져 높은 산에서 유유자적하던 도사들과 달리 그들에겐 이런 현실이 익숙했다·
그들의 강호는 곧 전장이었다·
죽음은 늘 가까운 곳에 있었고 강하지 않으면 오늘 하루를 기약할 수 없는 곳이었다·
“휘유! 대단한데· 긴장 바짝 해야겠어·”
“그러게· 자칫 방심하다간 골로 가겠어·”
철기문의 무인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은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용 문주가 강하게 단련시켰군·’
그때 종리무환이 진무원을 향해 다가왔다·
“우리는 운중천 무인들과 함께할 겁니다· 단 소협은 어찌하겠습니까?”
“저희는 따로 숙소를 잡겠습니다·”
“밀야와의 전투 직후라 숙소를 잡기 힘들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찾아보면 있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숙소를 잡지 못하면 저희를 찾아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진무원은 종리무환 등에게 포권을 취한 후 곽문정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용무성이 그런 진무원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종리무환이 묻자 용무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아서 말이야·”
“누구? 단 소협 말입니까?”
“그래!”
“그런가요?”
“분명 얼굴은 낯선데 분위기가 묘하게 익숙하단 말이야·”
“흐음!”
종리무환의 눈이 빛났다·
분명 채약란도 용무성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 한 명의 말이라면 그러려니 넘기겠지만 두 명이 똑같은 말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조용히 뒷조사를 해봐야겠군·’
종리무환은 멀어지는 진무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무원과 곽문정은 부현 남쪽에 있는 조그만 농가로 들어갔다· 농가의 주인은 군말 없이 두 사람에게 거처를 내줬다·
농가는 흑월에서 관리하는 비밀 거점이었다· 비록 월주인 능군휘를 찾기 위해 강호에서 모습을 감췄지만 그렇다고 활동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강호 곳곳에 이런 비밀 거점을 마련해 두고 꾸준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임시 월주가 되면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농가의 주인은 바로 흑월의 정보원이었다· 이미 전갈을 받은 듯 그는 진무원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보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월주께서 떠난 직후 척마대가 밀야의 본진을 기습했습니다· 커다란 피해를 입은 밀야에서 다시 보복 공격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운중천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나 봅니다· 결국 기세에서 밀린 운중천이 전략적인 후퇴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밀야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지속적으로 부현에 전력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부현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화산파와 종남파도 치려는 듯합니다·”
“음!”
“다음번 전투가 승부의 향방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겁니다· 그 때문에 운중천에서도 최대한 많은 전력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시기는 언제쯤으로 보고 있습니까?”
“예측하기 힘듭니다· 아마 오늘 밤에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정보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원은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의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이젠 예측한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진무원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흑월의 정보원은 말없이 진무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언덕 위 평평한 분지에 수많은 군막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부현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밀야의 본진이었다·
본진 가장 깊숙한 곳에 커다란 군막이 있었다· 그 어떤 장식도 없어 삭막하게 보이는 군막 안에는 십여 명의 무인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칼날 같은 기세를 발산하는 무인들의 중앙엔 푸른 전포를 입은 젊은 무인이 앉아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궁상화 천무대의 대주였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모여 있는 자들은 바로 천무대의 조장들이었다· 각 조장 밑에는 십여 명의 조원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은밀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궁상화의 양쪽으로 부대주인 묵원광과 율사희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궁상화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궁상화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난 보름간 우리는 척마대를 지켜보았다· 놈들의 무공 전략 그리고 사소한 몸짓 하나까지도· 놈들이 우리들의 형제를 죽일 때도 우리는 지켜봤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나직했지만 강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놈들은 분명 강하다· 그리고 똘똘 뭉쳐 있다· 오십 명이 넘는 인원이 마치 한 몸처럼 의사를 주고받고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놈들의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을뿐더러 타격을 입히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놈들은 무인이라기보다는 군인에 더 가깝다· 놈들을 잡으려면 더 빨라야 하고 더 일사불란해야 한다·”
“흐흐! 우리처럼 말이오?”
“그렇다· 우리처럼·”
묵원광의 너스레에 궁상화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를 따라 다른 조장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궁상화와 묵원광의 호언장담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제껏 궁상화와 천무대가 맡은 임무 중에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척마대의 반격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때문에 화가 난 사우명이 천무대의 동의도 없이 광무군을 동원해 부현을 공격했다·
그 때문에 양측 모두 많은 피해를 입었고 생각보다 작전 시기가 늦어지게 됐다· 하지만 그로 인해 척마대의 전력을 더 면밀히 파악했으니 아예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이번 작전은 단지 척마대만 제거하는 데 있지 않았다· 부현에 와 있는 운중천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암살을 병행할 것이다·”
“요인 암살이라? 의도는 좋긴 한데 우리끼리 하기에는 조금 인원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군장(軍長)께서 지원할 것이다·”
군장이라면 광무군의 수장인 화의사신 사우명을 말함이다· 광무군에는 암살을 전담하는 조직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이번 작전에 동원될 터였다·
“그렇다면야!”
묵원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얼굴에는 자못 기대된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제껏 성질을 죽이고 지켜만 봤더니 온몸이 근질거렸다·
궁상화의 시선이 율사희 뒤쪽에 있는 검은 무복을 입은 남자를 향했다·
“암살대는 무영이 이끈다·”
“명단은?”
“작전 전에 보내주마·”
“알겠다·”
“원광은····”
궁상화의 폭풍 같은 지시가 이어졌다· 그는 묵원광을 비롯한 조장들에게 각각의 임무를 내렸다·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천무대 무인들 얼굴이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궁상화의 작전은 매우 치밀했다· 그는 천무대와 척마대의 전력을 냉철하게 비교했고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 작전을 짰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전은 놀랄 만큼 정교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시간을 맞추는 것이다· 한 조라도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이번 작전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만일 변수가 발생하면?”
“그럼 지체 없이 물러난다·”
“에이! 그럼 너무 아쉬운데·”
묵원광이 코끝을 찡그렸다· 그러자 궁상화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내가 계산하지 못할 변수 따윈 없을 것이다·”
“하긴 대주의 잔머리는 군사도 인정할 정도니까·”
묵원광의 너스레에 조장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덕에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미소는 궁상화의 다음 말에 싹 사라졌다·
“첩보에 의하면 담수천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
“담수천· 대단한 자이지· 설마 중원이 자랑하는 아홉 하늘 중 하나를 쓰러뜨리다니·”
“흥! 우리에겐 문휘가 있잖소·”
궁상화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묵원광이 말한 문휘는 그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성은 ‘궁’씨였다·
궁문휘 바로 궁상화의 동생이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밀야 제일의 기재였다·
문(文)에 군사 가경의가 있다면 무(武)에는 궁문휘가 있다· 궁상화도 천재라고 불리는 족속이지만 궁문휘는 그보다 더했다·
사대마장조차 감당하지 못해 야주가 직접 무공을 가르치고 키우는 자가 궁문휘였다· 그야말로 밀야의 희망이자 미래라고 할 수 있었다·
‘문휘는 그야말로 괴물이지· 그 녀석이 출관하는 날 전쟁의 향방이 바뀔 것이다·’
자신의 동생이지만 상식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괴물이 바로 궁문휘였다· 열다섯 살 이후로 궁상화는 단 한 번도 궁문휘를 이겨본 적이 없었다·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 지금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조만간 문휘가 전장에 참여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전장의 양상이 바뀌겠지· 그때까지는 우리가 전장을 지배한다·”
“흐흐! 당연한 말을 다 하시오· 늘 하던 일인데·”
묵원광이 가슴을 쾅쾅 쳤다· 궁상화가 명령을 내리면 당장에라도 운중천의 진용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천무대 내에서도 성질이 폭급하기로 유명한 묵원광이었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무력을 소유하고 있어 누구도 감히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율사희가 물었다·
“작전 시간은요?”
“세 시진 후 새벽 동이 터오를 때·”
궁상화의 목소리가 천마대의 피를 뜨겁게 달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