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 8장 난세는 영웅을 원하고, 영웅은 패웅을 부른다 (1)
창룡검제가 무너졌다·
충격적인 소문이 천하를 강타했다· 믿을 수 없는 소문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믿어야 했다· 창룡검제를 쓰러뜨린 자 바로 담수천이었기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창룡검제 빈사 상태가 되어 반강제로 강호에서 은퇴했다고 한다·
적엽 진인에 이어 창룡검제까지 무너졌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전설이 붕괴되었다·
살천랑에 이어 전설을 무너뜨린 자 담수천·
담수천은 정당한 비무로 창룡검제를 쓰러뜨렸다고 했다· 그리고 선언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밀야와의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살천랑이 적엽 진인을 쓰러뜨렸을 때와 달리 운중천은 침묵을 택했다· 반대로 강호는 밀야와의 전쟁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담수천에 열광했다·
현 강호 젊은 무인들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는 척마대 전원이 담수천을 지지하고 따른다는 성명을 냈다· 그들의 성명은 많은 이에게 영향을 끼쳤다· 수많은 젊은 무인이 담수천을 따르겠다고 강호로 나섰다·
이제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후기지수로 분류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새로운 하늘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적엽 진인이 죽었고 창룡검제가 무릎을 꿇었다·
강호를 지배하던 기존의 질서가 급격히 붕괴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고 있었다· 그 선두에 담수천과 살천랑이 있었다·
“그들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그것은 강력한 예감이었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었다·
진무원도 담수천이 비사원을 쓰러뜨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놀라지 않았다·
담수천은 단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해 온 구도자였다· 그가 걸어온 고행의 길은 일반인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혹독했다·
그는 전설에 도전할 자격을 가진 몇 안 되는 무인이었고 창룡검제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해 보였다·
담수천은 아직 부현으로 오지 않았다· 창룡검제에게 입은 내상이 완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그가 부현으로 오는 순간 많은 것이 변할 것을 직감했다·
“그는 정말 대단하군요· 설마 창룡검제를 쓰러뜨릴 줄이야·”
곽문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의 얼굴엔 부럽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가 보기엔 진무원이나 담수천 모두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강함은 둘째 치고 일단 목표를 정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그 집요함은 실로 두려울 정도였다·
“이로써 많은 것이 변할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어졌구나·”
“형이 머리 아프겠어요·”
“내 대신 머리를 쓰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군사님요?”
“그래! 고민은 그가 하겠지·”
진무원은 빙긋 웃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 역시 머리가 무척이나 아팠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이제까지 겨우 정리한 것들이 담수천의 등장으로 인해 원점에서 다시 계산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담수천의 등장은 그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등줄기를 따라 올라오는 전율이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담수천·’
곧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진무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몰았다·
부현이 멀지 않았다· 능군휘를 북천문으로 보낸 후 다시 말을 몰아 이곳까지 오는 데 거의 열흘이 걸렸다· 근 보름간의 공백이 있었던 셈이다· 그사이 부현의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단 소협?”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무원이 돌아보자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진무원을 보고 다가왔다·
“아! 채 부문주님·”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이는 바로 채약란이었다· 그의 등 뒤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종리무환 임진엽 공손창 고천후 모두 철기문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실로 오랜만에 보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있었다·
‘용무성·’
철기문의 문주인 용무성이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무성은 일문의 문주답게 묵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매서운 시선을 진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이 채약란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단 소협·”
“그러네요· 철기문도 부현으로 오신 겁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러는 단 소협도 부현으로 가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잘됐네요·”
채약란이 반색을 하는 사이 종리무환 등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단 소협·”
“오랜만입니다·”
“단 소협도 운중천의 의뢰를 받은 겁니까?”
“의뢰?”
진무원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종리무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닌가 보군요·”
“그럼 철기문은 운중천의 의뢰를 받았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부현을 지키는 전쟁에 참여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죠·”
“음!”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철기문까지 동원할 정도로 부현의 사정이 악화된 것인가?’
철기문의 무인들은 그야말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무인들과의 대결이 아닌 전쟁을 대비한 모습이었다·
그때 용무성이 특유의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자네가 단 소협이군· 내 부문주와 군사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네·”
특유의 호탕한 목소리가 진무원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진무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쪽은 철기문의 문주라는 용무성 대협이신가 보군요·”
“호! 내 이름을 알고 있는가?”
“저분들과 상남까지 동행하면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래? 내 수하들도 극찬을 하더군· 자네가 없었다면 결코 상남에 무사히 도착하지 못했을 거라면서·”
용무성의 눈이 반짝였다· 진무원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은 존재는 담수천이나 살천랑이 아니라 바로 단천운에 관한 이야기였다·
채약란과 종리무환 그리고 동행한 철기문의 문도들이 하나같이 그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어지간하면 타인에 대해 언급하는 법이 거의 없는 그들을 그렇게 흥분시킨 존재가 누군지 말이다·
‘두 번째지· 나를 이렇게 호기심이 동하게 만든 존재는·’
첫 번째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북검이라는 별호로 강호를 뒤집어 놓았던 위대한 검호·
두 번째가 바로 단천운이었다·
아직 명성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군마대를 상대로 탕마군과 낭인들을 지킨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천운이라는 존재를 누구보다 주목하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흐흐! 그보다 자네도 부현에 가는가?”
“그렇습니다·”
“잘됐군· 부현까지 멀지 않았으니 같이 가세·”
“그렇게 하죠·”
진무원은 용무성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부현이 멀지 않은데다가 같이 동행하면서 얻을 이점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 용무성이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바로 곽문정이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 꼬마 보표 아니던가?”
삼 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곽문정의 외모 많이 성숙해졌지만 용무성은 단숨에 그를 알아보았다·
“오랜만입니다 용문주님·”
곽문정이 용무성에게 포권을 취했다·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는 내심 당혹함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용무성과 철기문의 핵심 무인들은 자신이 진무원과 깊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자신이 단천운으로 역용한 진무원과 동행하고 있었다·
당장은 아무런 생각이 없겠지만 동행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의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곽문정이 슬쩍 곁눈질로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무원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에 곽문정도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결심했다·
“그 꼬마 보표가 이리 자라다니· 단 소협과는 어떻게 동행하는 것인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래?”
곽문정이 워낙 태연하게 대답해서 용무성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못했다·
상대는 보표였다· 자신들만큼이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직업이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 중 한 명이 단천운이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어쨌거나 반갑군· 자네 혹시 진··· 아닐세·”
용무성이 말끝을 흐렸다·
그가 아는 진무원은 죽은 사람이었다· 괜히 그를 언급해 곽문정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용무성의 마음을 알아차린 종리무환이 개입했다·
“자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어서 부현으로 가죠·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음!”
용무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잠시 멈춰 섰던 일행들이 다시 부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무원은 그들을 조용히 따랐다·
거의 백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삼 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원이 늘었지만 그래도 다른 문파에 비하면 무척이나 규모가 작았다· 하지만 개개인의 무공 수준은 무척이나 높아 보였다·
‘아직도 소수정예를 지향하는가 보군·’
철기문에 소속된 무인들 대부분은 낭인 출신이었다· 그 때문인지 특유의 거칠면서도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용무성의 명령에는 일사불란하게 따르고 있었다·
곽문정이 진무원 곁으로 따라붙었다·
“철기문에까지 의뢰를 넣은 것을 보니 운중천에서도 부현에 총력을 집중하는 모양이네요·”
“그런가 보구나·”
진무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철기문 용무성·’
예전에 진무원에게 관대승을 조심하라고 경고를 했던 이가 바로 용무성이었다· 관대승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용무성은 관대승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은류를 이용해 용무성의 뒷조사를 해봤지만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역시 비밀을 간직한 자·’
아직까지는 그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현에서 같이 머물다 보면 무언가 알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진무원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부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불어 거리에 보이는 무인들도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었다· 그들 역시 철기문처럼 문파 단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개중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이들은 바로 화산파와 종남파의 무인들이었다·
부현에서 밀리면 본산이 위험해지기에 그들 역시 정예 무인들을 파견한 것이다· 진무원이 떠나 있던 보름 동안 부현의 사정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부현으로 향하는 무인들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가득했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벽력탄같이 불안정한 기운이 공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때 화산파에서 청수한 인상의 늙은 도사 한 명이 철기문의 무인들을 향해 다가왔다· 마치 동네 촌로처럼 둥글둥글하면서 평범한 얼굴에 대춧빛 혈색이 인상적인 도사였다·
하지만 평범한 외향과 달리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마치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늙은 도사의 접근에 용무성이 앞으로 나섰다·
“철기문의 용무성이라고 합니다· 진인의 존함은 어찌 되시는지?”
“용 문주시구려· 이 늙은이의 이름은 상무라고 하네·”
“아 상무 진인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용무성이 늙은 도인의 정체를 알아보고 급히 포권을 취했다·
상무 진인은 화산파의 장문인인 상원 도장의 사제였다· 매화삼십육검(梅花三十六劍)을 극성으로 익힌 절정의 검객으로 평소의 성품은 무척 온화하지만 일단 검을 뽑으면 절대 상대를 봐주는 법이 없다고 했다·
“철기문도 부현으로 가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고맙군· 이렇게 강호의 위기에 기꺼이 나서주다니·”
“다 대가를 받고 하는 일입니다·”
“대가를 받는다고 누구나 다 나설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상황은 아니지·”
상무 진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용무성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어쨌거나 최선을 다해 싸워주게· 이런 말 하면 뭐하지만 부현이 뚫리면 화산파나 종남파가 위험해진다네· 구대문파 중 두 문파가 무너지면 천하는 수습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일 걸세· 그런 일은 없어야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진무원은 상무 진인이 굳이 번거롭게 용무성을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화산파와 종남파가 무너지지 않게 최선을 다해 싸워 달라·
결국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무원은 오히려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왜 이제까지 움직이지 않았는지· 천하가 혈풍으로 물들 때까지 화산파가 무엇을 했는지 말이다·
이제껏 운중천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은 단 한 번도 전력을 외부로 내보내지 않았다· 물론 운중천에 많은 지원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물자와 비용이었지 실질적인 무력은 파견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던 이들이 턱밑에 칼날이 들어오자 그제야 움직인 것이다·
‘결국 자파의 안위가 천하의 안위보다 우선이란 말이군· 구대문파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상무 진인과 화산파의 무인들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