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 6장 악연의 실타래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3)
진무원이 괴인의 산발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깊게 주름진 얼굴이 드러났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진무원은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당신은?”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자 괴인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못 볼꼴을 보였구나·”
“풍··· 운번주?”
“그래 나 능군휘다·”
“흑월의 월주가 당신이었습니까?”
“그래! 내가 바로 흑월의 월주다· 비록 적엽에게 패해 이렇게 비참한 신세가 되었지만·”
괴인은 바로 풍운번주 능군휘였다· 그가 적엽 진인에게 제압되어 무간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네놈을 구해준 뒤 적엽과 한바탕 싸웠다· 그리고 패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 그래도 오랫동안 알아온 정리 때문인지 숨은 끊지 않고 이곳에 가둬두더구나·”
“으음!”
진무원의 입술을 비집고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능군휘는 아홉 하늘에 속한 절대 고수였다· 그런 절대 고수가 싸움에 패한 뒤 이곳에 갇혀 있었다니·
자신이 그에게 구함을 받은 것이 삼 년 전의 일이었다· 능군휘는 무려 삼 년이나 이 지옥 같은 공간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흐흐!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온전히 나의 결정 때문이니까·”
“일단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곳을 탈출한 뒤에 하시죠·”
“빨리 나가게는 게 좋을 게다· 잠시 후면 적엽이 들이닥칠게다·”
진무원은 능군휘를 등에 업었다· 오랜 세월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능군휘의 몸은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자신 때문에 오랜 세월을 볕도 들지 않는 지하 공간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무원은 서둘러 무간옥을 빠져나왔다·
다행히도 아직 지원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대신 매캐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고개를 드니 저 멀리 무당파가 있는 곳에서부터 불길이 치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청인이 시간을 벌기 위해 방화를 한 것이다·
진무원은 망설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청인은 알아서 탈출로를 찾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진무원은 전방위 감각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얼마나 걸릴까?’
이제 곧 무당산에 천라지망이 펼쳐질 것이다· 천라지망이 완성되기 전에 무당산을 빠져나가야 했다·
수풀 너머에서 무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를 막으라고?”
“젠장! 확실히 말해줘야 알지· 우리가 무당파의 제자도 아닌데 그렇게 뭉뚱그려 설명해 주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무당파의 요청을 받은 무인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소리였다· 그들은 종남파에서 파견 나온 무인들로 무당파의 급박한 요청을 받고 정해진 장소를 이동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당파의 제자가 아닌 이상 무당산의 지리에 어두운 것이 당연했다·
차라리 무당파 혼자서 천라지망을 펼쳤다면 시간이 얼마 안 걸렸을 텐데 워낙 많은 문파의 제자들이 움직이다 보니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진무원과 능군휘에겐 그야말로 천운이 따르는 셈이었다· 진무원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경공술을 펼쳤다·
등 뒤에 업힌 능군휘가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으로 남쪽을 가리켰다·
“이 이곳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 거라· 무당파의 천라지망이 가장 늦게 완성되는 곳이다·”
진무원은 군말 없이 그의 지시를 따랐다·
능군휘는 중원의 모든 정보를 한 손에 틀어쥐고 있다는 흑월의 주인이었다· 비록 삼 년이란 시간 동안 무간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 후로도 능군휘는 몇 번이나 더 진무원의 방향을 틀게 했다·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무당산을 거의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우우!”
한줄기 사자후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진무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기혈이 순간적으로 들끓었을 정도로 강력한 사자후였다·
이 정도의 사자후를 터뜨릴 수 있는 자는 천하에 그리 많지 않았다· 능군휘가 속삭였다·
“적엽이다· 그가 오고 있다·”
굳이 그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적엽 진인 무당파의 최고수이자 능군휘와 같은 아홉 하늘에 속해 있는 절대강자·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표출하며 진무원과 능군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허공에 조그만 점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 적엽 진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진무원의 앞을 막아섰다·
“네놈은 누구냐?”
적엽 진인이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노성을 토해냈다· 진무원을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가 뇌전이 치는 듯 강렬한 섬광을 토해냈다·
진무원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대였다· 무당산에서 그를 피해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적엽 진인의 눈에 순간적으로 파문이 일었다· 진무원의 눈빛 때문이었다· 무당파의 최고무공인 태극심공(太極心功)을 완성한 그의 눈빛은 무당파의 장문인도 감히 마주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진무원은 그런 그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바다처럼 잔잔해 보이는 눈동자 안에 폭풍 같은 파괴력이 언뜻 엿보였다·
적엽 진인이 다시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무명소졸은 아닐 터· 감히 무당파에서 죄인을 데리고 탈출하다니·”
“능군휘 대협은 그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까요·”
“너?”
적엽 진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진무원의 등에 가만히 업혀 있던 능군휘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적엽·”
“····”
“그래도 처음엔 자주 찾아오더니 요즘에는 아예 발길을 끊었더군· 덕분에 무척이나 적적했다네·”
능군휘의 음성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실로 지독한 원한이 담겨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손으로 적엽 진인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삼 년 동안 당한 금제에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족히 몇 년은 요양을 해야만 겨우 나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적엽 진인이 능군휘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옛 정리를 생각해서 목숨을 살려둔 것만으로 다행으로 생각하게· 그러지 않았다면 자네는 진즉에 죽은 목숨이었네·”
“그렇겠지· 그래서 고맙게 생각한다네·”
“차라리 무간옥에 갇혀 있는 것이 좋았을 텐데· 결국은 내손으로 자네를 죽이게 만드는군·”
적엽 진인의 눈에 살기가 감돌면서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수백 수천 자루의 송곳으로 피부를 후벼 파는 듯한 느낌에 능군휘가 진저리를 쳤다·
멀쩡했을 때의 그라면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그는 폐인보다 못한 상태였다· 적엽 진인의 살기를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능군휘는 생각보다 숨을 쉬기 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들자 진무원이 앞에서 적엽 진인의 살기를 모두 받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능군휘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걸렸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구나·’
삼 년 전에도 진무원의 무력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그때도 능군휘는 진무원에게 위협을 느꼈었으니까· 하지만 삼 년이 지난 지금은 진무원의 무위가 감히 가늠되지 않았다·
‘아홉 하늘? 뭐가 하늘이란 말이냐? 남들보다 그저 조금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영세군림하려는 자들이 어떻게 하늘로 불릴 수 있단 말이냐? 우리는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막는 거대한 장애물에 불과해·’
능군휘는 진무원이 자신을 비롯한 아홉 하늘 아니 모용율천의 시대를 끝내주길 바랐다·
능군휘가 진무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단순하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행동이었다· 능군휘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능군휘가 말했다·
“조심하거라· 비록 적엽의 성격은 편협하지만 지닌 검공만큼은 가히 천하제일을 넘볼 만큼 대단하니까·”
“알겠습니다·”
진무원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런 진무원의 태도가 적엽 진인의 화를 돋웠다·
“군휘· 진심으로 그 아이가 나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언제고 누군가 우리의 시대를 끝낸다면 나는 그 주인공이 이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확고한 능군휘의 대답에 적엽 진인이 입을 다물고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진무원이 거슬렸다· 그의 숨소리 눈빛 자세 그 모든 것이 적엽 진인의 신경을 자극했다· 이런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직접 알아내 보십시오·”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적엽 진인의 몸에서 살기가 폭발적으로 확장됐다·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검으로 천하제일을 논하는 적엽 진인이었다· 진무원보다 먼저 검의 길을 걸은 선배였고 구도자였다· 어쩌면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드디어 이렇게 한자리에 서게 됐다·
상황은 비록 좋지 않았지만 진무원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오직 눈앞에 있는 적엽 진인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스릉!
적엽 진인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손잡이에 양각된 선명한 두 글자 무도(無道)· 적엽 진인이 무도를 들어 진무원을 겨눴다· 순간 진무원은 눈앞에 거대한 검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완벽한 검신일체(劍身一體)의 모습·
그의 눈빛 몸짓 숨 쉬는 것 하나까지도 검을 움직이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일반적인 검객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는 검객을 상대로 진무원은 검을 뽑아 들었다· 무당파 제자에게서 빼앗은 평범한 청강검이었다· 적엽 진인이 들고 있는 무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그러나 진무원은 두렵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떤 검이든 상관없었다· 일단 검을 쥐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무원은 전신이 충만해져 옴을 느꼈다·
적엽 진인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검을 쥔 모습 걸음걸이만 보아도 상대의 경지를 알 수 있는 적엽진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진무원의 경지는 범상치 않았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제대로 된 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진무원을 경시하던 마음을 버렸다· 상대가 진짜 검객이라면 그에 걸맞은 마음가짐으로 싸워야 한다·
그가 진무원을 향해 가볍게 걸음을 내딛었다· 순간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고한 경지에 이른 검객의 걸음걸이라고 보기에는 산만하다고 느껴질 만큼 경박해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 수십 수백 가지의 다른 가능성이 혼재하고 있었다·
삼재검법을 펼칠 수도 있고 태극혜검을 펼칠 수도 있다· 그 어떤 검법이든 상대의 대응에 따라 펼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자세· 무당파의 입문 무공 중 하나인 칠성둔형(七星遁形)의 보법이었다·
걸음걸이 하나에 별의 일곱 가지 변화를 담는 입문 보법· 그리고 일곱 가지의 변화는 또다시 각자 일곱 개로 분화를 한다· 그렇게 종국에는 삼백마흔세 개의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한 번에 일곱 가지 변화를 담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빠지고 엄청난 정신력이 소모되는데 그 하나하나를 언제 다 익힌단 말인가?
하지만 칠성둔형의 기본이 되는 일곱 가지 걸음만 걸을 줄 알면 다른 보법들을 익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도사가 칠성둔형을 다른 보법을 익히는 징검다리 정도로만 생각했다·
무당파에는 태천구궁보(太天九宮步) 오행은무보(五行隱霧步)와 같은 절정의 보법이 존재한다· 적엽 진인도 그런 보법들을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고 할까? 결국은 모든 보법을 익힌 그가 제일 처음 익혔던 칠성둔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궁극을 이뤘다·
적엽 진인 몸으로 발산하는 미묘한 몸의 언어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진무원은 눈이 시려 옴을 느꼈다· 적엽 진인이 몸으로 발산하는 미묘한 검의 언어가 머리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순간 진무원이 검을 휘둘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휘두른 일검이었지만 적엽 진인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놈!’
자신의 변화를 허용치 않겠다는 진무원의 의지가 느껴졌다· 상대는 자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수련을 한 검객이었다·
“대단한 후배가 나타났군· 그럼 어디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칠성둔형보 그 궁극의 보법이 펼쳐진 것이다·
순간 진무원의 전방위 감각이 발동됐다·
‘왼쪽!’
생각이 채 정리도 되기 전에 적엽 진인의 몸이 왼쪽에서 나타났다·
무도가 시린 빛을 발산했다·
캉!
하지만 무도의 궤적은 진무원이 들고 있는 청강검에 막혔다· 막대한 충격이 손잡이를 타고 어깨까지 전해지며 진무원의 몸이 들썩였다·
적엽 진인의 몸이 곳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났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순간 이동이라고 착각할 만큼 그의 보법은 가공했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진무원의 몸짓은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진무원은 왼발을 몸을 지탱하는 축으로 삼았다· 왼발은 기둥처럼 박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오직 오른 발을 조금씩 움직여 적엽진이 출몰하는 방향을 경계했다·
카카캉!
적엽 진인과 진무원 사이에서 청명한 검명과 함께 불꽃이 연신 튀었다· 능군휘의 눈에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찌르고 후리고 베고····
그들은 검이 가지는 기본 묘리를 충실하게 펼쳐 냈다·
능군휘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검객 두 사람이 격돌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명인의 반열에 오른 악공 두 사람이 합주하는 것처럼 합이 딱딱 들어맞았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짜고 검무를 춘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능군휘는 두 사람의 대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흉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대를 움직이는 거인과 새로운 시대를 염원하는 젊은 검객의 싸움은 무당산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적엽 진인의 몸이 일렁이더니 어린 소동이 툭 튀어나왔다·
검을 들고 있는 소년은 바로 적엽 진인이 키운 양신이었다·
“간다·”
적엽 진인과 양신이 진무원을 향해 쏘아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