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 4장 산 자는 선인(善人)이고, 죽은 자는 악인(惡人)이다· (3)
진무원은 객잔으로 돌아왔다·
간밤의 전투 때문인지 객잔 안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점소이는 물론이고 객잔이 주인까지 보이지 않았다· 진무원은 식당을 지나 특실로 들어갔다·
“형!”
곽문정이 제일 먼저 그를 맞아주었다·
“별일 없었느냐?”
“주인과 점소이들이 도망간 것 외에는요·”
밀야가 기습해 오자 객잔의 주인과 점소이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그들이 어디로 피신했는지는 곽문정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곧 다시 돌아올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때 방 안에서 표승우가 걸어 나왔다· 그가 진무원을 보며 반색을 했다·
“단 형·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물건을 전해줄 사람을 찾으러 나갑니다· 별일 없으면 문정이와 함께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하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군요·”
“동행만 해주시면 됩니다· 물건을 전달해 줄 사람은 제가 찾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진무원은 흔쾌히 허락을 했다· 그제야 표승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의뢰인의 물건이 못내 부담스러운 표승우였다· 하루라도 빨리 이 물건의 주인을 찾아줘야만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는 어서 부현을 떠나고 싶었다· 간밤에 벌어진 밀야와 운중천의 치열한 전투는 경험 많은 보표인 그에게도 큰 두려움을 안겨줬다·
이곳은 복마전이었다·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진무원이 어느 정도 고수인지 쉽게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안전하리라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표승우는 진무원 곽문정과 함께 객잔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부현 동쪽에 있는 빈민가였다· 삼 년 전쟁은 수많은 유민을 양산했고 갈 곳을 잃은 이들은 이곳 빈민가로 흘러들었다·
거리에는 각종 오물이 넘쳐났고 악취가 후각을 자극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눈에는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온통 절망스러운 분위기만이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표승우 등이 들어서자 사람들이 증오심을 은밀히 표출했다· 원망이 가득한 눈동자에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무인들의 싸움에 삶의 터전을 잃은 자들은 무기를 든 자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쩝!”
표승우도 사람들의 적대감을 느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만 다셨다·
“아무래도 우린 환영을 받지 못하는 존재 같네·”
“그러게요·”
“얼른 물건만 전해주고 여길 빠져나가야겠다·”
표승우의 말에 곽문정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들은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법은 알고 있나요?”
“이곳 북쪽에 조그만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 하얀 깃발을 걸고 기다리고 있으면 인수자가 나타날 거라고 했어·”
“인수자가 누군지는 모르고요?”
“전혀!”
“음! 그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아주 더러운 상황이지·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으니까·”
“그러네요·”
그들은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길을 몇 번이나 꺾어서 들어가자 마침내 조그만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에는 어른이 앉을 만한 바위 몇 개와 깃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긴가?”
표승우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깃대에 하얀 깃발을 달았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요·”
“그러게·”
표승우와 곽문정이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무원은 그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댔다·
“이 상자가 무엇이기에·”
표승우가 의뢰인이 남긴 상자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중으로 된 상자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아침에 나왔는데 벌써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그때까지도 공터에는 그 어떤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여기서 기다리면 사람이 나온다는 게 맞아요?”
“의뢰인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표승우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진무원은 여전히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에 표승우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 부현까지 오는 동안 진무원은 저런 모습을 자주 보였다· 말을 타면서도 시시때때로 눈을 감고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모습은 표승우에게는 무척이나 신기하게 보였다·
‘저것도 무공을 수련하는 방법인가?’
보표로 제법 성공한 표승우였지만 진무원과 같은 수준에 이른 고수가 어떤 식으로 수련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절대의 경지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육체의 수련보다는 정신의 수련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설마 저자가 절대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겠지?’
진무원의 나이를 많이 쳐줘 봐야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정도였다·
표승우는 이내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럴 리도 없을뿐더러 정말 그렇다면 자신이 너무 비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표승우가 갑자기 눈을 끔뻑거렸다· 왠지 눈이 침침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곽문정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것이 표승우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 기억한 풍경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으음!”
타는 듯한 갈증에 표승우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희미한 등불이었다·
잠시 영문을 알지 못해 표승우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여긴? 큭!”
표승우가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비명을 내질렀다· 전신이 석상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옆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용없어요· 미혼향에 당한데다가 마혈을 제압당했어요·”
간신히 고개를 돌리니 곽문정이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마혈이 제압당한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미혼향에 당했다고?”
“네! 무색무취해서 전혀 느끼지 못한 사이에 당한 것 같아요·”
“단 형은?”
“형은 아마 다른 방에 갇힌 것 같아요·”
“으음!”
표승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설마 대낮에 사방이 환히 트인 공터에서 미혼향에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혼향이라니·”
“우리가 앉아 있던 바위에 발라져 있던 것 같아요· 한 번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흡수되는 것이라서 느끼지 못했구요·”
“어린 친구가 대단히 영민하군· 바위에 미혼향이 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다니·”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십 대 초반에 풍성한 턱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의 등장에 표승우가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누구요?”
“내 이름은 중요한 것이 아니네· 중요한 것은 자네의 이름과 정체지·”
“그게 무슨?”
남자가 표승우를 벽에 기대앉게 한 후 자신도 의자를 끌어와 마주보고 앉았다· 그의 손에는 표승우가 가져온 상자가 들려 있었다·
“자넨 누군가? 이 상자를 왜 자네가 가지고 있는가?”
“나의 이름은 표승우요· 그리고 그 상자는 내 의뢰인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오·”
“자세히 듣고 싶군·”
“내가 왜 그 이야길 당신에게 해야 한단 말이오?”
“왜냐면 이 상자를 받기로 한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네· 그러니까 나는 자네의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네·”
“음!”
남자의 말에 표승우가 침음성을 흘렸다· 남자의 강렬한 눈빛은 진실을 갈구하고 있었다· 표승우는 그의 말이 진심임을 직감했다·
그는 남자에게 이곳으로 오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남자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그럼 이 조장이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그렇소! 벽력탄을 귀신처럼 부리는 자의 기습에 목숨을 잃었소·”
“결국 그렇게 되었군· 아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었구나·”
남자가 탄식을 흘렸다· 눈을 반쯤 내리 깔은 그의 얼굴엔 아쉬움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이제 물건을 받았으니 우리를 이만 풀어주시오·”
“아직은 풀어줄 수 없네·”
“그게 무슨?”
“우리는 아직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네· 만일 자네가 그들이 파견한 간자라면 우리 전체가 위험해진다네· 그러니 아직은 자네를 풀어줄 수 없네·”
“개소리하지 마쇼· 내 의뢰인과의 신의를 생각하여 물건을 가져왔소· 그런 나를 의심하다니·”
“부디 우리를 이해해 주길 바라네· 우리는 무척이나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네· 우린 자네를 풀어주는 모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네·”
“그러니까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보라구· 계속해서 자기 얘기만 하지 말고·”
참다못한 표승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남자의 시선이 표승우 반대편에 있는 곽문정을 향했다·
“소형제는 누군가?”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볼게요·”
“뭔가?”
“우리 형은 어디 있나요?”
“형?”
“공터에서 같이 잡혀온 형 말이에요·”
“자네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는데·”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표정에서 곽문정은 진무원이 잡혀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긴 형이 겨우 미혼향에 정신을 잃을 리 없지· 그나저나 미혼향에 정신을 잃고 당하다니· 난 아직 멀었구나·’
곽문정이 자책했다·
표승우처럼 그 역시 미혼향에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까부터 그는 제압된 마혈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 통했는지 손가락부터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남자가 검을 빼서 곽문정의 목을 겨눴다· 곽문정의 애검인 청련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자네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관대승이 파견한 자들인가?”
“관대승? 운중천의 총관인 관대승 말입니까?”
“그렇다·”
“우리는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형의 의뢰인이 부탁을 해서 이곳까지 온 것뿐입니다·”
자신의 검이 목에 겨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곽문정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곽문정을 보며 잔뜩 인상을 썼다·
‘진짜 관대승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가?’
곽문정의 맑은 눈동자를 보자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와 그를 믿는 자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공아천이었다·
운중천의 중추무력 조직인 검도각(劍刀閣)의 부각주였다· 검도각의 각주인 표소류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본래 그는 운중천에 충성심이 강했었다·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가득했던 그의 심중에 변화가 생긴 것이 삼 년 전이었다· 바로 진무원이 운중천에 들어왔던 그 시기였다·
그는 북천문이 진짜로 밀야와 내통했다고 믿었었다· 그래서 북천문을 증오했었다· 하지만 진무원에 의해 그 모든 것이 운중천의 음모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배신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공아천은 운중천을 믿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하지만 진무원을 향한 천라지망에 참여했던 그날 그의 믿음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순수했던 믿음은 깨지고 돌아온 것은 지독한 배신감과 회한뿐· 운중천에는 그런 자들이 적잖았다· 공아천은 그런 자들과 교분을 나눴다·
처음엔 믿었던 단체에 배신당한 서로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비밀결사의 단체가 되었고 결국에는 연판장을 돌리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운중천 내에는 조금씩 균열이 일어났다·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수많은 이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그래서 공아천은 더 냉정해야 했다·
‘연판장의 비밀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운중천 내에 피바람이 불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단호해져야 했다·
오직 죽은 자만이 선한 자였다· 죽은 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입을 열 수 없으니까·
그가 결의를 다질 때였다·
쿵!
갑자기 강렬한 진동에 석벽 전체가 울렸다·
공아천의 안색이 변하는 그 순간 밖에서 사람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스 습격이다·”
“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