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 2장 검객은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은 혼란으로 물든다 (3)
청성파의 광성진인과 아미파의 무영사태가 하진월을 따라 북천문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사천성 서부 고원지대에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문파가 들어서 있는 것에 놀랐다·
소름이 다 끼쳤다· 그들의 이목을 피해서 북천문은 이제 완벽한 문파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전력은 결코 청성파나 아미파에 뒤지지 않았다· 아니 단합된 모습이나 위압감은 오히려 두 문파를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해 보였다·
‘북천문은 결코 신흥 문파가 아니구나·’
‘이렇게 탄탄한 전력이라니· 만일 북천문이 적이었다면 아미와 청성은 진즉에 멸문을 당했겠구나·’
그들은 북천문이 적이 아닌 것에 감사를 했다·
하진월은 두 사람을 자신의 거처로 안내했다· 그의 거처에는 당기문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당기문은 당문의 대표 자격으로 앉아 있었다·
“드디어 사천성의 패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셨군요· 이렇게 어렵게 발걸음을 해주신 것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하 군사 이렇게 소중한 전력을 공개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젠 우린 운명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을 공개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진월의 대답에 광성진인과 무영사태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그들은 하진월과 많은 대화를 했다·
하진월은 거침이 없었다· 단순히 지식만 쌓은 게 아니라 그 활용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사천성에서만 안주하던 광성진인과 무영사태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천문 지리는 물론이고 병법과 용인술까지 그의 지식은 끝이 없었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 이렇게 많은 지식이 들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하진월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했다·
그들은 은연중 하진월을 사파연합의 군사로 인정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파연합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런데 진 문주께서는?”
광성진인이 주위를 둘러봤다· 막상 북천문의 주인인 진무원이 보이지 않자 의아한 것이다·
“문주께서는 북천문을 떠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떠나?”
“아무래도 사천성 안에서 천하의 정세를 파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직접 보고 판단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으음!”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제든 연락이 가능하고 필요 시 금방 달려오실 테니까요·”
“그렇다면야·”
광성진인과 무영사태 등이 은연중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혈겁을 겪고 나니 진무원과 같은 절대 고수 한 명 있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제 사파연합이 출범했으니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당면한 문제?”
“남천명은 밀야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절대 고수 그런 존재가 소식이 끊겼으니 분명 밀야에서도 사정을 알아보려 할 겁니다·”
“으음!”
“아직 사파연합은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떡하자는 겁니까?”
“지금부터 사파연합의 힘을 총동원해 사천성 내의 정보를 차단하고 교란하려 합니다·”
“으음!”
“여러분의 협조가 절실합니다·”
“어떻게 말이오?”
하진월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자연스러운 미소에도 사람들은 왠지 섬뜩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 ☆ ☆
유독 새까만 눈동자가 진무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의 주인은 유건엽이었다· 유건엽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입에서는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할 만하니?”
유건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천문에 온 이후 유건엽의 성격은 많이 밝아졌다· 특히 곽문정과 한선우와 어울리면서 눈에 띄게 밝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말수가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보다 어두운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유건엽은 매일같이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다· 무공 수련이라고 해봐야 맨발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게 거의 전부였지만 그래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렸다· 그러다 보니 체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내가 알려준 심법은 잘 익히고 있느냐?”
“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열심히 익혀 두거라·”
“어디 가시나요?”
“섬서성으로 간다·”
“섬서성이라면?”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지·”
“그런 곳에 왜?”
“그렇지 않고서는 이 싸움의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
진무원이 빙그레 웃으며 유건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 어린 유건엽은 모를 것이다· 세상이 전쟁의 광기로 미쳐 돌아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이유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면에 가려진 진실을 알아야만 해법을 찾아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사파연합이 출범하면서 그에게도 정신적인 여유가 생겼다·
하진월의 능력이라면 무리 없이 사파연합을 체계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북천문과 사파연합은 하진월에게 맡기고 자신은 직접 강호로 나가 동향을 파악하거나 개입할 생각이었다·
“일단 심법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야만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 그러니까 하루도 쉬지 않고 부단히 익히거라·”
“예!”
진무원은 유건엽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곽문정이 말고삐를 쥔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곽문정과 동행할 생각이었다·
“형!”
“가자·”
“예!”
두 사람은 말을 타고 함께 북천문을 나섰다·
곽문정은 들뜬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삼 년 동안 무수히 강호를 주유했지만 진무원과 함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헤헤!”
말을 모는 곽문정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진무원은 그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다시 강호를 주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절로 들떴다·
“섬서성으로 간다구요?”
“그렇다·”
“그럼 한중(漢中)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겠군요· 주요 관도에는 운중천의 검문이 이뤄지고 있을 테니 귀찮은 것을 피하려면 차라리 한적한 산길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아는 길 있느냐?”
“헤헤! 그럼요· 제가 보표 생활이 몇 년인데요· 중원 구석 곳곳 안 가본 곳이 없다니까요· 길 안내는 저에게 맡겨주세요·”
“그럼 부탁하마·”
“걱정하지 마세요·”
곽문정이 자신의 가슴을 쾅쾅 치며 장담했다· 그런 곽문정의 모습이 진무원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삼 년이란 시간은 곽문정을 성장하게 했다· 그동안 곽문정은 혹독한 수련을 했고 나이에 비해 뛰어난 성취를 얻었다·
무엇보다 곽문정은 곧고 올바르게 자랐다· 어려서부터 보표로 천하를 돌아다니다 보니 많은 경험을 하고 그 경험들로 인해 일찍 성숙해졌다·
그것이 진무원이 생각하는 곽문정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곽문정은 앞장서서 이끌었다· 꽤나 들뜬 듯 곽문정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진무원은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간혹 맞장구를 쳐줬다·
햇볕이 뜨거웠다· 더위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관도 양쪽으로 보이는 논에서는 농부들이 한참 잡초를 뽑고 있었다·
얼굴은 시뻘게지고 팔다리는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장은 뜨겁고 괴롭지만 이 더위가 지나가면 곧 추수를 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말에 탄 채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그가 보았던 그 어떤 미소보다 아름다우면서도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그들은 오늘의 고단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농부들의 모습은 진무원의 가슴에도 작은 파문을 만들어냈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었으면· 누군가를 죽이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위해 한 알의 알곡이라도 키워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거의 이뤄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진무원은 희망을 품었다·
두 사람은 꼬박 열흘을 말을 달려서야 사천성과 섬서성의 접경 지역인 광원(廣元)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천명이 이끄는 염마대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던 검문소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지키고 있었다·
“문주님·”
그들은 바로 북천문에서 파견 나온 무인들이었다· 큰 타격을 입은 삼 파의 무인들을 대신해 당분간은 그들이 검문소를 지킬 것이다·
청성파를 비롯한 삼 파의 무인들이 정파 무인들 특유의 느슨함과 위압감이 있었다면 이들에겐 특유의 거칠면서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도광을 따라 비적으로 천하를 떠돌던 자들이었다· 눈치가 비상하게 빠른데다가 무공 또한 무척이나 강했다· 어지간한 소문파 하나 정도는 그대로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무력과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을 잘 부탁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십시오 문주님· 이곳 검문소는 이 유지황이 철벽같이 지키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유 조장님·”
진무원의 미소에 검문소의 조장 유지황이 히쭉 웃었다·
겉보기엔 한없이 투박해 보이는 유지황이었지만 사실은 너구리보다 더 교활하며 눈치가 빨랐다· 오죽하면 그의 상관인 마도광조차 골머리를 앓을까? 하지만 북천문을 향한 그의 충성심은 진짜였다·
비적으로 천하를 떠돌면서도 누구보다 더 북천문을 그리워했던 이가 바로 유지황이었다· 진무원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유지황은 충성을 맹세했을 정도였다·
진무원은 유지황과 검문소를 지키는 무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곤 밖으로 나섰다· 곽문정도 그들과 살갑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진무원을 따랐다·
광원을 빠져나온 후 곽문정이 앞장섰다· 그렇게 이틀을 말을 달리자 한중(漢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한중의 객잔에 여장을 풀었다·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과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한중에는 전운이 물씬 감돌고 있었다·
객잔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무인이었고 그들의 허리춤에는 무기가 걸려 있었다· 진무원과 곽문정이 객잔 안으로 들어오자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노골적인 경계의 시선에도 두 사람은 놀라지 않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만난 대부분의 무인이 그들과 같은 시선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었다· 운중천이라고 해서 늘 표식이 있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밀야의 무인이라고 해서 자신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 중에도 밀야나 운중천에서 파견 나온 무인들이 있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새로운 인물들이 객잔에 들어올 때마다 사람들은 그가 위협이 될 존재인지부터 살피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진무원은 아예 무기를 들지 않았고 곽문정은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경계의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의 등장에 객잔 주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분위긴지라 그의 행동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방 있습니까?”
“두 분이서 머물 만한 방은 이미 다 나갔습니다· 대신 십 인실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내드리겠습니다·”
“십 인실?”
진무원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십 인실이라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면 그마저도 감지덕지였다·
“자리에 앉아계시면 금방 식사를 내오겠습니다·”
주인이 후다닥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진무원과 곽문정은 빈자리에 앉았다· 방이 모두 떨어졌다는 주인의 말이 거짓이 아닌 듯 객잔 안의 탁자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모두 부현으로 가는 걸까요?”
“글쎄다·”
곽문정의 물음에 진무원도 답하지 못했다·
철혈성에 다녀올 때와 또 다른 분위기였다· 그때보다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가 없어 보였다·
마치 객잔 전체에 기름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불씨를 당기는 순간 객잔 안은 거센 화마에 집어삼켜질 것이다·
비단 객잔뿐만 아니라 섬서성 전체의 분위기가 그랬다· 밀야와 운중천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답게 살기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진무원은 차분히 객잔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조그만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진무원 등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이제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의 등 뒤에는 두개의 검이 교차로 매어져 있었다·
호쾌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곽문정을 보며 웃었다·
“너 문정이지?”
순간 곽문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승오 형· 여긴 어떻게?”
남자의 이름은 표승오· 곽문정과 마찬가지로 보표였다·
곽문정이 백룡상단에 속해 있는데 반해 표승오는 돈을 많이 주는 상단이라면 언제든 자리를 옮겼다· 그에겐 오직 돈만이 전부였다· 의리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언젠가 백룡상단에 고용되었지만 금방 돈을 더 준다는 사람에게 고용되어 떠났다· 곽문정이 그와 함께 한 시간은 불과 서너 달에 불과했지만 하도 인상이 강렬해서 아직까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표승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일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일?”
“저기 저 양반이 내 고객이야· 이번에 부현까지 가는데 보호를 부탁하더라구·”
표승오는 방금 전까지 자신과 같이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를 가리켰다· 평범해 보이는 남자는 무엇이 불안한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고 있었다· 남자는 조그만 상자를 꼭 껴안고 있었다·
보표는 지키는 사람· 즉 상단이나 사람에게 고용되기만 하면 최선을 다해 지키면 그만이다·
곽문정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아무리 봐도 중년의 남자가 표승오를 고용할 정도의 재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보기와 다르게 재산이 많은 건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기에 곽문정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너는? 보아하니 상단을 호송하는 것 같지는 않고·”
“전 형하고 부현으로 가요·”
“형?”
표승오의 시선이 진무원을 향했다· 진무원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단천운입니다·”
“반갑소 단 형· 목적지가 같으니 가는 내내 자주 보겠구려·”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하! 그럼 피곤할 텐데 쉬시오· 내일 출발할 때 다시 봅시다·”
표승오가 진무원과 곽문정에게 인사를 한 후 자신의 탁자로 돌아갔다·
곽문정은 자리에 앉는 표승오를 보며 살짝 찌푸린 인상을 펴지 못했다·
진무원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불안해서요·”
“뭐가?”
“저 형이 맡는 일이 결코 평범할 리 없거든요· 큰돈이 되는 일만 쫓다 보니 위험도 커요· 부디 별문제 없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