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 2장 검객은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은 혼란으로 물든다 (2)
염마대는 모두 죽었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한 아미파와 검혈대 활독당 무인들의 희생도 컸다· 특히 아미파가 입은 인적 피해는 엄청났다·
많은 이가 염마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죽은 이들 대부분은 아미파의 중추 무인이었다· 그나마 무영사태의 발 빠른 대응 덕에 이 정도로 끝났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많은 이가 죽었을 것이다·
그나마 멀쩡한 대전 안에는 진무원과 당기문 무영사태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무영사태가 먼저 진무원과 당기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미파의 무영이 모두를 대신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피해가 적어서 다행입니다·”
“덕분입니다 당 대협·”
무영사태가 당기문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당기문의 옆에 앉아 있는 진무원을 향했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의혹의 빛이 가득했다· 도움을 받은 것에는 감사하지만 진무원의 정체를 모르기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사대마장 중 한 명인 남천명을 쓰러뜨린 남자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무영사태에겐 충격과 경악이었다· 기존의 전설을 무너뜨렸으니 그 역시 전설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문제는 무영사태가 남자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남자· 무영사태의 눈은 그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지 아니면 잠재적인 적이 될 것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은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 했다· 이유나 정체는 몰랐지만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대협의 도움에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존성대명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이름은 진무원이라고 합니다·”
“진무원·”
조용히 그의 이름을 되뇌던 무영사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언젠가 한 번 들어봤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북검?”
“맞습니다· 그가 바로 북검 진무원입니다·”
당기문이 무영사태의 추측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무영사태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삼 년 전 무림에 혜성같이 등장해 엄청난 위명을 떨쳤던 남자· 아마 단기간 안에 그만큼 무림에 큰 충격을 던져준 이는 없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천하의 운중천이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제거하고자 했을까?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단 말인가?’
운중천의 천라지망에서 살아남은 것도 놀라운데 사대마장의 일인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무력도 상승했다· 더 놀라운 것은 남천명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리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미타불! 그의 무력은 이미 아홉 하늘이라 불리는 자들에 육박했구나· 아니 어쩌면 그들을 능가할지도····’
알 수 없는 오한이 그녀의 전신을 잠식했다·
상대는 상식을 벗어난 존재였다· 저렇게 젊은 나이에 엄청난 무위를 갖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무서운 것은 발전 속도가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이런 자가 이곳 사천 땅에 웅크리고 있었단 것인가?’
당기문과 함께 있는 진무원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전후 사정을 짐작했다·
‘당문이 그가 사천성에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겠구나·’
당문의 힘이라면 능히 청성파와 아미파의 이목을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그런 당문의 처사에 반발을 했겠지만 진무원의 도움을 받은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런 당문의 조치에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감사합니다 진 대협·”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쉽게 말을 할 수는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아미파까지 무너지면 사천무림 자체가 붕괴됩니다· 사천무림이 무너지면 천하는 그야말로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겁니다· 그런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 했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진 대협·”
진무원의 말은 무영사태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단순한 정의감이나 동정심으로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짐작보다 훨씬 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진무원은 운중천의 천라지망을 피해 사천으로 들어온 것부터 시작해 서부고원에 자리를 잡은 것까지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 털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운중천과 밀야와의 관계까지 하나도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무영사태는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설마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에 이런 사연이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정한 신뢰는 서로의 바닥을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진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음으로써 무영사태의 신뢰를 얻고자 했다·
무영사태의 시선이 당기문을 향했다· 당기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진무원의 말이 진심임을 확인해 주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무영사태가 두 눈을 감고 연신 불호를 외웠다·
드러난 진실은 너무나 엄청나서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회피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아미파는 큰 타격을 입었다· 밀야의 습격이 운중천이 의도한 것인지 혹은 그들 단독의 결정일지는 몰라도 수많은 제자가 다치거나 죽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좋든 싫든 이젠 본격적으로 강호의 일에 개입해야 했다·
무영사태가 눈을 뜨고 진무원을 바라봤다· 진무원은 여전히 처음과 같이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대가 움직이고 있다· 이 남자 역시 시대를 움직이는 거인·’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아미타불! 아미파는 앞으로 진 소협과 뜻을 같이하겠습니다·”
“운중천과 적이 될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습니다·”
“많은 제자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역시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저와 함께하겠다는 겁니까?”
“아미타불!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습니까? 중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세속과 담을 쌓고 살았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몰랐다면 모를까 진실을 알고서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무영사태는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진무원은 무영사태의 말이 진심임을 깨달았다·
그들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놀랍도록 닮은 미소였다·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자 하진월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진무원이 북천문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청성파를 방문했다· 그의 곁엔 당기문과 무영사태가 함께 하고 있었다·
청성파는 광무진인이 남천명에게 목숨을 잃은 후 사제인 광성진인이 장문대행을 하고 있었다· 광성진인은 광자 배의 막내로 혈겁 때 겨우 살아남았다·
하진월은 그들과 사흘 밤을 지새웠고 한 가지 합의를 도출해 냈다·
가칭 사파연합(四派聯合)이 그것이었다·
그 중심에 북천문이 있었다· 사천무림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세 문파가 북천문이라는 신흥 강자를 그들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한 것이다·
청성파와 아미파 그리고 당문이 사천성의 패자로 자리를 잡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북천문을 사천무림의 맹주로 인정했다· 그만큼 진무원의 무력을 높게 평가하고 자신들을 이끌 만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사천성에서 새로운 폭풍이 태동하고 있었다·
☆ ☆ ☆
삼십 대 초반의 남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 어디를 봐도 황량한 풍경이었다· 낮은 언더 위에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제외하면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적갈색의 대지 위로 붉은 석양이 살짝 걸쳐 있어 더욱 쓸쓸하게 보였다·
남자의 얼굴에 석양이 비춰 붉게 물들어갔다· 그는 멍하니 서서 한동안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해를 머금은 남자의 눈은 특이하게도 잿빛이었다· 잿빛 눈동자는 깊고 혼탁해 도무지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는 미남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혼탁한 눈동자로 인해 어쩐지 둔해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남자는 완전히 해가 지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황량한 대지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장원이 보였다· 장원의 담벼락 곳곳에 불에 그슬린 자국이 상흔처럼 남아 있었다·
장원의 정문에는 십여 명의 무인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인들은 남자를 보자마자 황급히 장원의 문을 열었다·
정문이 열리자 수십여 채의 거대한 전각군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지어진 것도 있었고 최근에 지어진 것도 있었다· 예전에 지어진 듯한 전각엔 불에 그슬린 자국과 보수한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설마 우리가 이곳을 사용하게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북천문의 터전을·”
남자가 바라보는 전각군이 있던 자리는 북천문의 옛 터전 위에 세워진 것이다· 십 년 전 북천문의 옛 터전은 커다란 화재로 소실되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운중천의 지부가 들어왔다· 그리고 이젠 다시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세상사는 돌고 돌게 마련이다·
남자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수많은 전각군 중에서도 가장 큰 전각이었다· 전각을 지키던 무인들이 급히 그를 향해 예를 취했다·
“군사님을 뵙습니다·”
“음!”
군사라고 불린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지나쳤다· 남자를 바라보는 무인들의 눈에는 경외감이 가득했다·
남자가 들어선 방은 무척이나 넓었다· 방 한쪽에는 커다란 서가가 존재했고 서가에는 수많은 서책과 서신들이 잘 분류되어 있었다·
탁탁!
그때 무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창문을 활짝 열자 커다란 매가 보였다· 매가 부리로 창문을 두드린 것이다·
“군아구나·”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내밀자 매가 올라탔다· 매의 발목에는 조그만 통이 매여져 있었다·
군아라고 불리는 매는 영물이었다·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남자를 찾아오도록 훈련이 되어 있었고 천 리 먼 길이라도 하루에 주파할 정도로 날개 힘이 좋았다·
남자는 군아를 전서구 대신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남자는 군아의 발목에 매여진 통에서 돌돌 말릴 종이를 꺼냈다· 겨우 어른 손바닥만 한 종이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서신을 읽어 내리는 남자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었다·
“마영좌와 염마대가 연락이 끊겼다? 지금 이 말을 나보고 믿으란 것인가?”
남천명과 염마대의 무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가 아는 남천명은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 천하에서 그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자는 채 열 명을 넘지 않을 것이고 그를 확실히 압도할 수 있는 자는 서너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를 살아 있는 재앙이라고 불렀을까?
그런 위대한 무인이 연락이 끊겼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남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남천명을 사천성으로 보낸 자가 바로 그였다· 남천명의 무위라면 별문제 없이 사천무림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이 잘못된 것인가? 이 가경의의 판단이·”
마령서생(魔靈書生) 가경의·
밀야의 군사라 불리는 남자가 바로 그였다·
야주가 가장 신뢰하고 사대마장이라 불리는 마인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이가 바로 가경의였다·
사천무림을 지탱하고 있는 세 축인 청성파와 당문 아미파가 비록 대단하다고 하지만 남천명이라면 별다른 피해 없이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남천명의 소식이 끊긴 이상 최악의 가정을 해야 했다·
“사천 땅에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그 변수는 마영좌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하고 위험하다·”
가경의의 잿빛 눈동자에 갑자기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혼탁하기만 하던 잿빛 구름이 걷히고 눈부신 햇살처럼 광채가 흘러나왔다·
“우선은 마영좌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
누군가를 사천성으로 보내야 했다·
그는 나머지 사대마장을 생각했지만 이내 그들이 각자 다른 임무를 맡아 중원 각지로 흩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자신이 그렇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지금 밀야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전력이 중원 곳곳의 전선으로 파견 나간 상황이었다· 마땅히 보낼 만한 여유 전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사천성 안에 대체 무엇이 도사리고 있기에·”
그의 예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강력한 변수가 사천성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가경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수십 가지의 가정과 주변 상황 천하의 정세가 그의 머릿속에서 어우러지며 커다란 그림이 그려졌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그는 몇 번이나 다시 되돌리며 수정을 했다· 그것이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