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 1장 운명은 낮은 곳으로 흘러 고이게 마련이다 (3)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바라보는 남천명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천인역신수가 무영사태의 몸에 격중하기 직전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무영사태를 안아 드는 남자를 향해 남천명은 오히려 공력을 배가시켰다·
그렇게 극강의 공력이 주입된 천인역신수였다· 부수지 못할 것이 없었고 견딜 수 있는 존재 역시 없었다· 하지만 무영사태를 구한 상대는 남천명의 천인역신수를 어렵지 않게 흘려보냈다·
흔히들 사량발천근이라고 부르는 수법이었다· 넉 냥의 힘으로 천 근의 무게를 움직이는 고도의 공부· 하지만 그것도 비슷한 수준의 무인들을 상대할 때의 이야기였다·
남천명처럼 압도적인 내공과 파괴력을 가진 고수에게 섣불리 사량발천근의 수법을 사용했다가는 오히려 근육이 뒤틀리고 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사량발천근의 수법을 이용해 남천명의 천인역신수를 흘려보냈을 뿐 아니라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 말은 곧 상대의 내공이나 무공 수위가 그에 못지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천명은 무영사태를 안고 있는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나이는 이제 이십대 중후반 정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체격도 훤칠하다· 하지만 그의 눈을 끈 것은 바로 상대의 기도였다·
자신의 천인역신수를 아무렇지 않게 해소할 정도라면 가공할 기도나 기파가 느껴져야 정상이었지만 상대의 몸에서는 그 어떤 기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흠! 자신의 기도를 감출 정도의 경지에 올랐단 말인가?’
남천명의 입가를 따라 한줄기 미소가 번져 갔다·
예상치 못한 강자의 등장이 꺼림칙할 만도 하건만 그는 오히려 기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밀야 내에서도 그를 긴장하게 만들 만한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같은 사대마장이나 야주 정도 그 외의 존재들이 그를 긴장하게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뜻밖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이 그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남천명은 뒷짐을 쥐고 서서 남자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남자는 남천명은 신경도 쓰지 않고 무영사태에게 검은 단환 하나를 복용시킨 후 몇 군데 혈도를 눌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기식이 엄엄했던 무영사태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호오!”
남천명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는 저 검은 단환이 인세에 그리 흔치 않은 영약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 영약을 아무렇지 않게 복용시킬 수 있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이 더해갔다·
무영사태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남자가 몸을 일으켜 남천명을 바라봤다· 남천명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고요했다· 그 안엔 그 어떤 분노도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생소했고 충격적이었다·
남자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남천명이 진무원을 향해 다가왔다·
“아미파에 이런 고수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내가 아미파를 너무 우습게 보고 있던 것이 확실하군·”
“밀야에서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네·”
남천명은 굳이 밀야에서 나왔단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드러날 일이었고 그럴 목적으로 대놓고 행동한 것이기도 했다·
주위에서 염마대와 아미파 무인들 간의 생사를 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미 남천명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남천명의 시선과 관심은 온통 진무원을 향해 있었다·
“내 이름은 남천명이라고 하네·”
“····”
“그렇게 말하면 모르겠군· 청풍마영 그게 나의 별호라네·”
“사대마장?”
“그렇다네· 내가 바로 자네들이 사대마장이라고 부르는 사람 중 한 명이라네·”
진무원은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이미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천명의 기도는 은한설의 사부인 소금향과 비슷했다· 같은 공간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기도는 유사한 부분이 많았고 그런 점에서 진무원은 남천명이 사대마장 중 일인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었다·
사대마장 중 한 명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어떤 흔들림이나 동요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남천명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자네의 이름은?”
“진무원·”
“진무원?”
남천명이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잠시 턱을 만지던 남천명이 기어이 기억을 떠올렸다·
“자네··· 삼 년 전에 죽지 않았던가?”
“세상엔 그렇게 알려졌더군요·”
“아니었나 보군· 그동안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살았던 모양이군·”
진무원이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반면 남천명의 얼굴엔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진무원은 결코 녹록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 동원된 운중천의 천라지망은 사대마장이라 할지라도 결코 돌파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간 이곳 아미산에 숨어 있었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계속 숨어 있을 것이지 뭐 하러 모습을 드러냈는가? 아미파와 아무런 연관도 없으면서·”
“아미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 몰라도 당문과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당문이라· 흠!”
남천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세상의 은원이란 정말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무원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당문과 또 연관이 있다니·
결국 자신이 은거하고 있던 진무원을 불러낸 셈이었다·
“그런데 후회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자신을 드러낸 것을· 이제까지 애써 숨기며 살았는데 만천하에 정체가 드러나게 생겼으니·”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듣는 귀가 많은데·”
“남 대협께서 입만 다무시면·”
“다른 이들은 어찌할 텐가? 그들도 모두 들었을 텐데·”
“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을 겁니다·”
“호!”
순간 남천명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주위에서 기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그도 모르게 기막을 펼쳐 내부의 음파가 외부로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아마 바로 곁에서 싸우던 이들도 그들의 대화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입만 막으면 되겠군· 그럴 자신은 있는가?”
진무원이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미소였다· 하지만 남천명은 그 미소가 무척이나 서늘하다고 생각했다·
“듣기엔 검을 쓴다지? 검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굳이 검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호오!”
“하지만 남 대협 같은 분을 상대하려면 검이 있는 게 확실히 좋을 것 같긴 하군요·”
진무원이 근처에 나뒹구는 검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죽은 아미파 제자의 무기였다·
남천명의 낯빛은 처음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기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즉 무기의 구별이 없는 경지에 올랐단 뜻인가?’
오직 절대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그럴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진무원 역시 절대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 이미 그럴 거라고 추측하긴 했지만 진무원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더욱 충격적이었다·
‘저 나이에 절대의 경지라니·’
문득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럴진데 향후 십 년 정도만 이런 속도로 발전하면 누가 있어 진무원의 적수가 될 수 있을까?
‘오늘 반드시 제거해야겠구나·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의지는 그의 육신을 통해 표출되었다·
가공할 기파가 진무원을 향해 휘몰아쳤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기파 앞에서 진무원은 뒤집히기 직전의 일엽편주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진무원은 굳이 남천명의 기파에 저항하지 않았다·
‘강한 힘에 강하게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세상이 바뀌고 천 번을 변하더라도 나는 굳은 마음 하나면 충분할지니·’
지금 진무원에게 필요한 것은 굳은 마음 하나뿐이었다·
검첨은 바닥을 향하고 눈은 반쯤 감은 진무원의 모습은 얼핏 보면 허점투성이에 가까웠다· 하지만 남천명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진무원의 전신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천명은 잠시 진무원을 노려보았다· 그의 강렬한 기파에도 진무원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그가 느끼는 중압감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정중동(靜中動)의 묘리인가?’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결코 쉽지 않을 일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남천명 같은 절대 고수라면 말이다·
청풍마영이라는 별호답게 남천명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경공술과 섬격의 무공을 자랑했다· 그의 빠름에 비견될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명 북천문의 풍제 경무생뿐이다· 하지만 진정한 무위에서는 많은 손색이 있었다·
“어디 한번 볼까? 자네의 검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천명이 움직였다·
콰콰콰!
남천명이 도달하기도 전에 강렬한 기파가 해일처럼 밀려와 진무원을 덮쳤다· 그 순간 진무원이 살짝 대지를 박찼다· 그러자 그의 몸이 기파에 휩쓸려 훌훌 뒤로 날아갔다·
마치 실이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는 진무원의 모습에 남천명이 더욱 속도를 높였다·
허공에 희끗한 잔영만을 남긴 채 남천명은 진무원의 코앞에 도달했다·
“하앗!”
그의 손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진무원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예의 천인역신수였다· 이전과 달리 오직 진무원에게만 집중되었기에 공력의 농도와 파괴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다·
캉!
하지만 진무원은 남천명의 천인역신수를 어렵지 않게 쳐 냈다· 가공할 위력이 담긴 천인역신수와 격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에 들린 평범한 청강검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카카캉!
진무원과 남천명이 연이어 격돌했다·
남천명의 공격은 숨 쉴 틈 없이 이어졌다· 그의 몸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어떤 때는 동시에도 나타나는 것이 순간 이동을 하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그에 반해 진무원은 두 다리는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방어에만 집중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쾅쾅!
마치 거대한 쇠망치로 바위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주위 공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땅거죽은 파헤쳐져 속살을 드러냈다·
그들이 발산하는 기파에 휩쓸린 전각은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아미파와 염마대의 무인들은 기겁하며 전장을 옮겼다·
천 년의 역사를 가진 금정사는 두 무인의 격돌에 처참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금정사의 역사는 곧 아미파의 역사였다· 아미파의 중심이 타인들의 싸움에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남천명은 풍렬일기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그의 몸이 진동하더니 곧 바람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시작된 진동은 곧 천지를 집어삼킬 듯 증폭되었다·
“크윽!”
“헉! 귀가····”
주위에서 싸우던 무인들이 갑작스러운 이명에 놀라 비칠거렸다· 아미파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염마대의 무인들까지도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들의 고막이 터지고 찢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퍼엉!
남천명의 몸이 움직이는데 공기가 터져 나갔다· 소리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무형의 벽을 돌파한 것이다·
속도는 곧 힘이 된다·
빠르면 빠를수록 상대가 받는 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종국에는 반응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남천명의 몸은 음파의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양쪽으로 흐르는 격류는 적의 공격에서 신체를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콰아앙!
소리의 속도를 넘어선 엄청난 공격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세히 보면 남천명의 양 주먹에도 빠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뇌전이 일고 있었다·
풍렬일기공이 극성에 이르면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상식을 넘어선 속도는 우레를 부르고 작렬하는 뇌전은 진무원을 직격했다·
뇌전의 주먹에 직격당한 진무원의 신형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진무원의 입가로 옅은 혈흔이 내비쳤다· 내장이 진탕되고 기혈이 들끓었지만 진무원은 오직 방어에만 치중했다·
진무원은 천하에 이런 무공도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작렬하는 뇌전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오래도록 담아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진무원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환상과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진무원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쩌어엉!
처음으로 남천명의 움직임이 멈췄다·
뒤이어 진무원의 거센 반격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