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 8장 지나가는 비는 피할 수 있어도 폭풍우는 피할 수 없다 (4)
진무원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황량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진무원의 눈은 겉으로 보이는 이면에 담긴 풍경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조그만 연못과 모옥 그리고 은한설이 보였다· 은한설이 있는 곳에서 사흘을 보냈다·
“한설·”
은한설은 은둔을 택했다· 그녀는 세상에 나오길 거부하고 혼자만의 세상을 선택했다· 사부에게 이용당했다는 충격이 그녀를 외부의 세계와 단절하게 만든 것이다·
아직 그녀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그나마 진무원과 함께하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진무원은 그녀에게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마음의 상처는 스스로 치유해야 한다· 진무원은 단지 곁에서 그녀가 힘을 잃지 않도록 응원해 줄 뿐이다·
은한설 혼자 두고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가야 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일문의 문주였다· 문주로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진무원이 북천문으로 돌아온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이었다· 북천문은 여전히 활기가 넘쳐흘렀다· 연무장에서는 무인들이 연무를 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커다란 곽문정이 한선우와 유건엽을 데리고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산기슭에 있는 하진월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거처 안에서는 하진월이 소무상과 함께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주님·”
하진월과 소무상이 일어서 진무원을 맞이했다·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문주님을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하진월이 진무원에게 의자를 권했다· 진무원이 사양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검주가 훈련시키고 있는 무인들의 성취에 대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검혈대(劍血隊)를 말씀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검혈대는 검에 재능이 있는 자들을 모아 만든 조직이었다· 소무상 직속의 조직으로 실전 같은 수련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파열되는 일은 예사였다· 검혈대에 몸을 담은 자 치고 서너 군데 이상 뼈가 부러지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소무상은 정말 그들이 겨우 숨만 붙어 있을 정도로 혹독하게 굴렸다· 검혈대는 욕을 하면서도 소무상을 따랐고 그 결과 벽을 깬 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검혈대의 눈에는 독기와 살기가 넘쳐흘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소름이 끼치게 만들었다·
“저 새끼들 눈깔 까뒤집은 것 봐라· 지 에미 애비도 저놈들 눈깔을 보면 심장이 떨어지겠다·”
오죽했으면 마도광이 그들을 보고 혀를 찼을 정도였다·
“당장 실전에 투입해도 될 정도니 검혈대는 앞으로 큰 전력이 될 겁니다·”
“잘됐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검주·”
“아닙니다· 다 문주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소무상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소무상의 모습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하진월이 물었다·
“은 소저는 여전한가요?”
“그렇습니다·”
“아쉽군요· 은 소저만 도와줘도 큰 힘이 될 텐데·”
그의 음성에는 진한 아쉬움이 배여 있었다· 현재 북천문에 필요한 것은 은한설과 같은 절대고수였다· 하지만 은한설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녀를 전력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재정은 어떻습니까?”
“백룡상단의 지원 덕분에 풍족한 편입니다· 산에서 지내는 동안은 문제가 될 거 없지만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가면 부족할 듯합니다·”
“새로운 재원을 마련해야겠군요·”
“그건 제가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문주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이군요·”
“모든 것이 생각한 대로 궤도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대로만 된다면 머지않아 세상에 나갈 수 있을 듯합니다·”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진무원이 두 사람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하진월과 소무상이 잠시 흠칫하다가 이내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은 늘 이랬다·
오만해질 만도 하건만 늘 한결같이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다· 그 모습이 진무원에겐 어울렸다· 그리고 그들이 진무원을 따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세 사람은 잠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눴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금의 평화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란 사실을·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그들의 이야기가 한참 무르익어갈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군사님 저 장위영입니다·”
“위영? 안으로 들어오라·”
하진월의 눈이 빛났다· 장위영은 그가 아끼는 수하 중 한 명이었다· 두뇌가 명석하고 눈치가 빨라 하진월의 의중을 빨리 꿰뚫어 보고 행했다· 하진월로서는 아끼지 않을 수 없는 인재였다·
장위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하진월이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밖에 좀 나가보셔야겠습니다·”
장위영의 말에 하진월이 미간을 찌푸리며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진무원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 뒤를 소무상과 하진월이 따랐다·
밖으로 나오자 북천문의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하진월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분분히 비켜섰다· 그러자 땀으로 흠뻑 젖은 말과 그 위에 누군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방금 전에 갑자기 말이 연무장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듯해서····”
진무원이 말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말 위에 엎드려 있는 굴곡진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진무원이 급히 인영을 말에서 내렸다·
“당 소저?”
인영의 정체를 확인한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 가쁜 숨만 몰아쉬는 여인은 분명 당미려였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당 소저·”
진무원은 급히 당미려의 명문혈에 장심을 대고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 당미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당 소저라니?”
“아니 당 소저가 왜?”
사람들도 당미려를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당 소저 정신을 차리십시오·”
“으음!”
당미려가 겨우 눈을 떴다·
“무슨 일입니까? 당 소저·”
“지 진 소협?”
“저 진무원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당 소저·”
“흐윽! 다 당문이··· 습격을 받았어요·”
당미려가 왈칵 눈물을 쏟으면서도 겨우 말을 이었다·
“습격?”
“밀야가··· 청성파를 습격한 후 당문마저··· 그 때문에····”
당미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정신을 잃었다·
“미려야·”
그때 뒤늦게 소식을 들은 당기문이 달려왔다· 그가 정신을 잃은 당미려를 보고 기겁했다·
“아니 미려야?”
“정신을 잃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고정하십시오·”
“미려가 왜?”
“당문이 습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당문이?”
당기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비록 북천문에 몸을 담고 있지만 당문은 그의 고향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당문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감히 어떤 놈들이?”
“밀야인 것 같습니다·”
“밀야가?”
당기문의 얼굴에 찐득한 살기가 떠올랐다· 진무원은 사람을 불러 당미려를 데려가 치료하게 했다·
“피해가 얼마나 된다던가?”
“당소저가 혼절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문으로 가야겠네·”
“같이 가겠습니다·”
진무원이 망설이지 않고 당기문의 옆에 섰다· 그러자 하진월이 소무상에게 말했다·
“검혈대와 활독당을 데리고 따라가십시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검혈대와 활독당의 무인들이 말을 끌고 왔다·
진무원과 당기문이 말에 올라타자마자 출발했다· 그 뒤를 소무상이 이끄는 검혈대와 활독당이 따랐다·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하진월이 중얼거렸다·
“기어이 난세의 바람이 사천성까지 덮치는구나·”
☆ ☆ ☆
당기문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말이 게거품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정상적이라면 사흘이 넘게 걸릴 거리를 그는 단 하루 만에 주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아!”
당기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건물은 무너지고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당가타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럴 수가!”
그가 말에서 내려 당가타로 다가갔다· 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당가타에는 격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서진 잔해 사이에는 아직 수습 못한 시신이 깔려 있었고 바닥에는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흐어엉!”
그때 그의 귀에 누군가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기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예전 가주의 거처가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너진 폐허 더미에 불과했다· 그곳에 수십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살아남은 당문의 무인들이었다·
그들 앞에는 백여 구의 시신이 흰 천에 덮인 채 누워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각주님? 으허헝!”
당기문을 발견한 당문의 무인들이 달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설마 너희만 살아남은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아이와 아낙들은 피신시켰습니다· 젊은 아이들도 상당수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가주님은 왜 보이지 않느냐?”
“가주님은··· 크허헝!”
무인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당기문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찔해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버텨야 했다· 겁화에서 살아남은 당문의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당기문이 흐느껴 우는 젊은 무인들을 뒤로 하고 비칠비칠 걸음을 옮겼다·
유독 붉게 물든 흰 천이 보였다 당기문이 떨리는 손으로 흰 천을 들췄다· 그러자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누워 있는 당관호의 모습이 보였다·
“가 가주님·”
애써 버티던 당기문의 무릎이 꺾였다· 당기문이 당관호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
당관호의 시신은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가슴은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쩍 벌어져 있었고 왼쪽 어깨와 오른쪽 다리는 보이지도 않았다·
“어··· 떻게?”
“적의 수괴와 맞서 싸우다가 그만····”
“흐어엉!”
당기문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당관호는 남천명에 맞서 막상막하로 싸웠다· 그는 은마사를 비롯해 수많은 암기를 모두 사용해 남천명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내공이 고갈됐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천명이 반격에 나서 그의 숨을 끊었다·
당관호가 죽자 남천명과 염마대는 미련 없다는 듯이 당가타를 빠져나갔다· 그 덕에 당문의 많은 무인이 살아남았지만 수뇌부는 이미 괴멸된 후였다·
당기문은 당관호의 시선을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다· 그의 울음에 진무원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당관호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북천문은 지금의 힘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당관호는 진무원뿐만 아니라 북천문 전체의 은인이었다·
은인의 죽음은 당기문뿐만 아니라 진무원의 가슴마저 찢어지게 아프게 했다·
진무원이 살아남은 당문의 무인에게 물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모릅니다· 하지만 남쪽으로 간 것은 분명합니다·”
“남쪽?”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알겠습니다·”
진무원이 말위에 올라탔다·
“검혈대와 활독당은 지금부터 흉수들을 추적합니다· 놈들을 따라잡을 때까지 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존명!”
진무원이 말위에 올라탔다·
그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밀야·”
피의 바람이 그와 북천문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고 있었다·
피의 소용돌이를 향한 진무원의 질주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