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 8장 지나가는 비는 피할 수 있어도 폭풍우는 피할 수 없다 (2)
“우웩!”
육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도사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가슴 섶과 바닥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노도사가 토해낸 피에는 부스러진 내장 조각이 담겨 있었다·
노도사의 얼굴엔 이미 죽음의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노도사가 절망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도사가 죽거나 다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영기가 가득하던 청성산에는 오직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했다·
노도사의 이름은 광무 진인이었다· 그리고 구대문파의 하나인 청성파의 장문인이 바로 그였다·
광무 진인의 앞에는 남천명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광무 진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데 반해 남천명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남천명이 염마대와 청성파를 습격한 것이 불과 두세 시진 전이다· 대적의 습격을 직감한 광무 진인은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결사항전에 나섰다·
비록 말석이라고 하지만 구대문파의 일원인 청성파였다· 광무 진인은 결사항전을 한다면 최소한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사이 인근의 아미파와 당문에 전서구를 띄워 지원을 받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광무 진인의 계획은 남천명이 이끄는 염마대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었다· 청성파가 띄운 전서구는 염마대가 쏜 화살에 맞아 청성산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결국 광무 진인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남천명이 이끄는 염마대와 결전을 치렀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처참했다· 청성파의 일대제자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고 광무 진인 자신도 큰 내상을 입고 말았다·
광무 진인은 충혈된 눈으로 남천명을 바라보았다·
“청성파에서 혈겁을 지르고도 무사할 줄 아는가?”
“무사하지 않으면?”
남천명의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사천 무림은 하나다· 아미파와 당문이 그대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추적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올지도 모르지·”
“어이쿠! 무서워라·”
“지금은 웃고 있지만 차후에도 웃을 수 있다고 자신하지 말거라 밀야의 마인이여· 내 무능하고 힘이 없어 이 치욕을 당하지만 아미파와 당문이 반드시 이 복수를 해줄 것이다·”
“아미와 당문이 그렇게 대단한가?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그들에겐 기회가 없을 테니까·”
“무슨?”
“겨우 청성파 하나 정도로 끝낼 거라 생각했나? 이 내가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남천명의 음성이 스산하게 변했다· 순간 광무 진인은 주위의 기온이 내려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광무 진인은 남천명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사실을 직감했다·
평생 무공에 미쳐 살아온 광무 진인이다· 비록 사천성 밖으로 나간 적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무공이 강호의 그 누구에게도 뒤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자부심은 남천명에 의해 송두리째 무너지고 짓밟혔다·
남천명은 강했다· 그냥 단순히 강한 것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강했다· 세상 천지에 그와 같은 무인이 존재할 줄은 정말 예상치도 못했다·
남천명과 손속을 겨룬 지 불과 오십여 초 만에 광무 진인은 피를 토하며 극심한 내상을 입고 말았다· 그나마도 남천명이 고양이 쥐 갖고 놀 듯이 여유롭게 대했기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던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다 당신은 누구요?”
“참 빨리도 물어보는군·”
남천명이 혀를 찼다·
광무 진인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설령 대라신선이 와도 그를 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남천명이 고개를 들어 야공을 바라봤다· 어두운 하늘을 수놓은 별의 바다가 그의 망막에 맺혔다· 그런 그의 전신에서는 절대자의 위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이름은 남천명· 하지만 사람들은 푸른 바람 속에 숨어 있는 검은 그림자라고 부르지·”
“처 청풍마영(靑風魔影)?”
“그게 내 별호야·”
“맙소사! 사대마장이라니!”
광무 진인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사대마장(四大魔將)·
살아 있는 재앙이라 불리는 희대의 마인들이다·
이제껏 밀야와의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무인들이 사대마장에 의해 희생당했다·
운중천에서는 사대마장을 제거하기 위해 그야말로 안 해본 방법이 없었다· 정예 무인들을 긁어모아 인해전술을 펼치기도 했고 절진으로 유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사대마장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이후 사대마장은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흑익신창(黑翼神槍) 파산마부(破山魔斧) 백야마녀(白夜魔女) 청풍마영(靑風魔影)이라 불리는 네 명의 마인·
그중 청풍마영은 모든 것이 어둠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몰랐다·
“그 그럼 다른 사대마장은····”
“글쎄! 그냥 놀고먹지만은 않겠지·”
광무 진인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남천명의 말은 사대마장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는 뜻이다· 사대마장은 전장의 향방을 좌우할 정도의 절대고수들이다· 그런 이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는 것은 중원에 큰 위기가 닥쳐왔다는 뜻이다·
“아! 태상노군이시여 중원을 굽어 살피소서!”
광무 진인이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더니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명문 청성파를 이끌어온 광무 진인의 허망한 최후였다·
“쯧! 그놈의 태상노군은·”
남천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광무 진인을 잃은 청성파의 무인들은 사기가 급격히 꺾였다· 그렇지 않아도 열세였는데 이제는 싸울 의지마저 잃고 말았다· 염마대는 그런 청성파의 무인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날이 밝았을 무렵 청성파의 도관에는 죽은 시신으로 가득했다· 까마귀가 피 냄새를 맡고 날아왔다·
청성파는 정기를 잃었다· 살아남아 도주한 장로와 일대제자의 수는 불과 수십여 명에 불과했다· 미리 대피한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를 합치더라도 겨우 이백여 명 정도였다·
청성파가 다시 재기하려면 족히 십 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그 정도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마영좌시여·”
염마대의 대주 구광문이 남천명에게 보고했다·
구광문의 전신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얼마나 많은 이를 죽였는지 모르지만 혈향이 깊이 몸에 배었다· 그러고서도 피가 모자란지 두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남천명이 혀를 찼다·
‘하긴 그런 목적으로 키워진 녀석들이니 오히려 당연한 일인가?’
염마대는 그저 그런 흔한 무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천 무림에 있는 청성파 아미파 당문을 상대하기 위해 키워졌다· 세 문파의 초식과 무공을 철저히 분석하고 파훼하는 법을 익혔다· 어떻게 보면 세 문파의 가장 상극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지금쯤이면 그들도 움직이겠군·’
다른 사대마장에게도 염마대와 같은 존재들이 붙었다· 그들 역시 지금쯤 남천명처럼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은 전선이 섬서성과 산서성 감숙성 같은 중원의 북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대로 호북이나 호남성 안휘성 같은 성들은 전화의 위협에서 빗겨나 있었다· 그 때문에 운중천과 중원의 문파들은 온전히 북부 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들도 깨닫게 되겠지· 중원에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는 것을· 자신들 역시 언제든 전란의 소용돌이 휩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에게 전쟁은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든 전쟁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려움은 공포를 부르고 공포는 무서운 속도로 전염된다· 공포에 전염된 자들은 위축되게 마련이다·
“다음은 당문인가?”
그의 시선은 이미 다음 행선지를 향하고 있었다·
☆ ☆ ☆
해가 뜨자 진무원은 북천문을 홀로 나섰다·
그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경공술을 펼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진무원은 눈을 반쯤 감고 바람을 느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바람을 충분히 만끽하고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산봉우리 세 개를 넘었다·
황량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런 풍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한설·”
그는 은한설을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순간 그의 주위 공간이 일렁인다 싶더니 전혀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는 조그만 연못 그리고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조그만 모옥까지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림 같은 풍경도 진무원의 눈길을 잡아 끌지는 못했다·
진무원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연못 근처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 은한설에게·
은한설이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진무원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
“한설·”
“무원·”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의 눈동자엔 서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외의 어떤 풍경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돌아왔구나 무원·”
진무원의 이름을 부르는 은한설의 목소리엔 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윽한 그녀의 눈빛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돌아왔다 한설·”
“응!”
은한설이 진무원의 코앞에 멈춰 섰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 상태로 은한설이 진무원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은한설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좋아 보이네·”
“응!”
“갔던 일은 잘된 모양이네?”
“응!”
“수고했어·”
진무원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모옥을 바라봤다·
“냄새가 좋네· 양고기 화과야?”
“응· 그렇지 않아도 이때쯤 올 거 같아서· 하지만 맛은 보장 못해·”
은한설과 같은 수준에 이른 고수의 육감은 때로는 예지력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그 누구도 은한설에게 진무원이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은한설은 직감으로 진무원이 올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배고프다· 들어가자·”
진무원이 과장되게 배를 문지르며 은한설의 손을 잡아끌었다·
모옥 안은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이 조악한 침상과 조그만 탁자 하나만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갓 만든 것으로 보이는 화과와 밥 각종 반찬이 놓여 있었다·
“맛은 보장 못해·”
“하하! 맛있겠는걸·”
진무원이 양손을 비비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화과를 그릇에 덜어 맛봤다· 한 숟가락을 맛본 진무원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와! 맛있는걸! 솜씨가 많이 늘었는데?”
“놀리지 마·”
“진짜야!”
“하지만 무원이 만든 화과가 훨씬 맛있는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그리고 나한테는 이게 훨씬 더 맛있어·”
진무원은 다시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는 화과를 흡입했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에 은한설이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은 금세 화과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더 먹을래?”
“응!”
은한설이 다시 화과를 퍼주자 진무원은 그마저 금세 해치웠다· 순식간에 화과와 반찬이 모두 동났다·
은한설이 다시 물었다·
“차는?”
“마실래·”
“잠깐 기다려·”
은한설은 진무원이 보는 앞에서 차를 끓였다·
“향기가 좋네·”
“야생화로 만든 차야· 무원이 없는 동안 야생화를 따서 만들어봤어·”
음식을 하고 차를 만들다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삼 년이란 세월은 은한설의 많은 것을 바꿨다·
은한설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녀의 변화가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란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마침내 은한설이 진무원에게 잘 우린 야생화 차를 내놨다·
“흠!”
향기가 제법 좋았다·
진무원은 차를 조금씩 마셨다· 입안에서 굴리며 맛을 음미하고 향을 즐겼다· 은한설은 두 팔로 턱을 괴고 진무원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때?”
“좋아!”
“진짜야? 처음 하는 거라서 자신이 없었는데·”
“좋아! 진짜야!”
진무원은 눈을 감고 차 맛을 한참이나 음미했다· 은한설도 말없이 진무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시간이 흐른 후 먼저 말문을 연 이는 진무원이었다·
“세상이 많이 어지럽더라·”
“····”
“밀야와 운중천의 전쟁에 죄 없는 많은 이가 죽어가고 있어·”
이번엔 은한설이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진무원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앞에서 밀야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소금향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은둔을 택한 그녀를 배려해서였다·
“조만간 다시 세상에 나가야 할지도 몰라·”
“무원·”
“그땐 밀야의 많은 이가 다치거나 죽을 거야·”
은한설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진무원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못 알아들을 은한설이 아니었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무원· 밀야는 나의 고향이야· 내 손으로 고향에 사는 이들을 죽일 수는 없어·”
“알고 있어· 도와달라고 온 게 아니야· 단지 한설에게는 미리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고마워·”
“미안하다·”
진무원의 씁쓸한 음성이 모옥 안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