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 8장 지나가는 비는 피할 수 있어도 폭풍우는 피할 수 없다 (1)
북천문에 잔치가 열렸다·
문주와 군사가 한꺼번에 제자를 받아들였으니 축하해야 한다고 마도광이 주장했기 때문이다· 진무원과 하진월은 그런 마도광의 주장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단순히 제자 때문이 아니라 문도의 사기 진작 차원에서도 한 번쯤은 그런 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돼지와 소를 잡았다· 아낙들은 음식을 하고 장정들은 고기를 구웠다· 낮까지만 하더라도 무공을 수련하던 연무장에는 커다란 평상과 좌판이 깔려 시장 통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밤을 즐겼다· 고된 연무로 피곤할 만도 하건만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북천문이 몰락한 이후 각각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어떤 이들은 비적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산장에 들어가 두문불출했다· 강호를 정처 없이 떠돌던 이들도 있었고 삶에 의욕을 잃고 은거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북천문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혹독한 수련으로 하루하루가 고됐지만 그들은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북천문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천하에 그 위명을 널리 떨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중심에 있을 것이다· 일련의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지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무인들의 시선이 중앙에 있는 평상으로 향했다· 그곳엔 진무원이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존경했던 남자 진관호·
북천문의 전대 문주이자 북벽(北壁)이라는 위대한 별호로 불린 남자의 아들이 그곳에 있었다·
십여 년 전 진무원은 힘없던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북검(北劍)이라는 별호를 가진 절대의 고수로 성장했다·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 아홉 하늘에 뒤지지 않는 엄청난 위명을 얻었다·
그런 진무원이 다시 북천문을 열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진무원을 의심했다· 북검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과연 어린 그가 북천문의 기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끌어 갈 만한 능력이 있는지는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처음엔 그를 우습게 보고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삼 년이 지난 지금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무원은 진관호의 판박이였다· 아비가 걸었던 고난의 길을 따라 걸었다· 그는 결코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책임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앞장서서 가장 힘든 길을 걸어가니 문도들 역시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진무원의 곁에는 마도광과 당기문 경무생 소무상 황철 등 수뇌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른 문도들처럼 평상에 털썩 주저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크하하! 좋구나· 받으시오 문주·”
마도광이 사기그릇에 가득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진무원에게 빈 그릇을 내밀었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그릇을 받자 마도광이 그 안에 술을 가득 따랐다·
“고생하셨소 문주·”
“고생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제혁심 그 박쥐 같은 인간은 내 손으로 찢어 죽였어야 했는데 너무 편하게 죽인 것 같소·”
마도광이 아쉽다는 듯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진무원은 말없이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무생이 입을 열었다·
“결국 혁심이 그렇게 죽었구나·”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제혁심은 그와 같은 북천문의 네 기둥 중 하나였다· 한때는 호형호제했으며 한때는 증오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과거의 일이 되었다· 제혁심은 죽었고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얼굴이 되었다·
입안이 텁텁했다· 경무생이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경무생만이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황철 역시 마찬가지인 듯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북천사주 중 세 명이 진무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소수귀검(素手鬼劍) 연천화·
권마(拳魔) 조천우·
철혈무제(鐵血武帝) 제혁심·
풍제(風帝) 경무생·
한때는 북천문을 떠받들던 네 기둥이었고 웅패를 꿈꾸던 효웅들이었다· 그들 중 오직 경무생만이 살아남아 진무원과 술잔을 나누고 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구나·’
경무생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시대가 끝나감을 느꼈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 자신 역시 그렇게 떠밀려 사라질 시기가 온 것이다·
이제는 진무원을 비롯한 젊은 무인들의 시대였다· 자신의 역할은 진무원의 곁에서 그를 도울 무인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무생은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진무원이 경무생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문주?”
“제 잔 받으십시오·”
진무원이 경무생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경무생은 술잔을 든 채 진무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무원의 얼굴에 진관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평생 그가 가장 존경하던 진관호는 자신과 꼭 닮은 후계자를 남겼다·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백부님·”
진무원의 말에 경무생이 애써 냉정해지려고 했다· 아직은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진무원은 아직 어렸다· 그에겐 자극이 더 필요했다·
“아시니 다행이오 문주· 그 상처를 꼭 기억하시오· 문주가 방심하는 순간 그와 같은 상처가 또 생겨날 것이오·”
경무생이 가리킨 것은 진무원의 목덜미에 난 상처였다· 경무생과의 대결에서 얻은 상처였다· 물론 경무생의 몸에는 그보다 더 큰 상처가 낙인처럼 남아 있다·
“물론입니다·”
“그럼 됐소·”
경무생이 진무원이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경무생의 모습에 하진월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경무생이야말로 북천문의 진정한 충신임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하진월이 당기문에게 말을 걸었다·
“참 형님 활독당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이제 겨우 쓸 만한 수준에 올라왔네· 어디를 데려가도 짐이 되지는 않을 게야·”
당기문의 대답에 하진월이 잠시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명류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당기문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성격도 약간은 음울하게 변했고 독을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게 되었다·
그는 독에 민감한 체질을 가진 무인들을 뽑아 본격적으로 독을 복용시켰다· 명류산에게는 복용시키지 못한 귀한 독까지 복용시켰고 그 결과 활독당의 무인들은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예전이었다면 당기문은 이 정도로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기문은 연일 그들을 한계치까지 몰아붙였다· 그 결과 활독당의 무인들은 연일 생사의 경계선을 오가며 독기가 쌓여가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류산이도 이 광경을 보았다면 좋아했을 겁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
당기문이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잠시 무거운 분위기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명류산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그를 추억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다시 떠들썩하게 분위기가 살아났다· 진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평상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문주님·”
문도들이 반색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진관호가 자결하던 순간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무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그만 어깨에 온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진 듯한 그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가 가장 힘들 때 자신들은 곁에 없었으니까·
갑자기 무인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문주님 이 장춘이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박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구장춘· 마도광을 따라 비적이 되었던 남자이다· 겉모습은 순해 보이지만 역발산의 힘을 가지고 있어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진무원은 그의 잔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앞을 다퉈 그에게 술을 권했다·
“저도 술을 올리겠습니다·”
“제 술도 받아주십시오 문주님·”
진무원은 웃으며 그들의 술잔을 받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보고 계십니까 문주님? 공자님이 저렇게 훌륭하게 자라셨습니다· 북천문은 공자님으로 인해 이제 다시 날개를 활짝 펼 겁니다· 이젠 두 눈 편히 감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북천문은 이제 명확한 체계를 갖춰가고 있었다· 당장은 운중천이나 밀야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진무원은 아직 젊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강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해질 것이다· 시간은 온전히 그의 편이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밤은 깊어갔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여유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란 사실을· 그래서 오늘을 더 즐기려고 애를 쓰는 건지도 몰랐다·
잔치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대부분의 사람이 술에 취해 바닥에 널브러졌고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몇 명 되지 않았다·
“휴우!”
진무원이 크게 숨을 토해냈다·
숨결에 주향이 섞여 나왔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모른다· 권하는 술잔을 거절하지 않았으니까· 어지간해서는 취기를 느끼지 못하는 그가 몸을 비틀거렸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진무원은 북천문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으로 올랐다· 바람이 차가웠다· 산 밑은 뜨거운 여름이었지만 이곳 서부고원은 초가을을 연상케 할 정도로 기온이 차가웠다·
진무원은 추위도 잊고 한참이나 북천문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북쪽이 아닌 서쪽 하늘 가장 가까운 곳에 터전을 잡았지만 그 의기와 정신만큼은 그대로 이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진무원의 입술을 비집고 그리움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오래되어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아비의 얼굴·
어린 나이에 너무도 일찍 혼자가 되었기에 아비를 추억할 시간조차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썼는지도 몰랐다· 그만큼 가슴 아픈 기억이었고 특히 아비의 마지막은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참담함으로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북천문을 재건하자 아비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그리워서 눈물이 났다·
“편해? 그곳은 편해?”
아비가 그렇다고 하며 웃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웃을 수 없었다·
“정말 못됐다· 나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편하게 지내고·”
진무원은 풀밭에 누워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펼쳐진 눈부신 별의 바다가 그의 망막을 가득 채웠다· 취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형!”
갑자기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응?”
누운 채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소년의 모습이 보였구나· 진무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문정이구나·”
“여기 있었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았네·”
“나를 찾았느냐?”
곽문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원이 팔베개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곽문정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건엽이와 선우는?”
“잠들었어요·”
“적응은 잘하고?”
“제법 잘하고 있어요·”
“다행이구나·”
잔치가 한창일 때 곽문정은 유건엽과 한선우를 돌봤다· 한선우와는 의형제를 맺었고 유건엽과도 금방 친해졌다·
곽문정이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헤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의젓해 보였는데 순식간에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진무원 앞에만 서면 어린아이가 되는 곽문정이다·
“무공은 진전이 있느냐?”
“여전히 똑같아요· 머릿속에 요만한 돌이 있어서 생각을 막고 있는 것 같아요·”
곽문정이 오른 손가락 한마디를 진무원에게 보였다·
“돌 굴러가는 소리가 예까지 나는구나·”
“헤헤!”
이제야 곽문정이 찾아온 용건을 알 것 같았다·
진무원이 일어났다·
“한판 할까?”
“헤헤!”
곽문정이 화색을 띠며 따라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애검 청련이 들려 있었다·
진무원이 그에게 손짓했다·
“덤벼라·”
“갑니다·”
쉬익!
청련이 야공을 갈랐다·
찬란한 별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어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