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 7장 혈풍(血風)은 불청객과 함께 찾아온다 (3)
수목은 푸른 비취빛을 띠고 사계절이 항상 푸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청성산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청성산이라는 그 자체보다 도가의 성지인 청성파(靑城派)가 존재하는 산으로 더 유명했다·
입구인 건복궁을 통과하면 월성호라는 커다란 호수가 있고 그 위로 오동천 천사동 상청궁이 있고 그 위에 태상노군을 모시는 노군각이 있다·
그 외에도 청성산 곳곳에는 수많은 도관이 존재했고 그 모든 도관을 뭉뚱그려 청성파라 불렀다· 청성파의 무인들은 평소 각 도관에 흩어져 무공을 익히거나 정신을 수양했다·
구대문파의 일좌라는 위명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모습과 풍경이었다· 실제로 청성파는 구대문파 중에서도 가장 전력이 약한 축에 속했다· 도사의 수도 겨우 수백여 명 남짓했고 영향력도 같은 사천성에 있는 당문이나 아미파에도 밀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사천성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 청성파를 당문이나 아미파 밑으로 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비록 세력은 열세일지 모르지만 개개인의 무위는 결코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청성파의 장문인인 광무 진인(狂武眞人)의 무위는 실로 대단해서 운중천의 아홉 하늘에 크게 뒤지지 않을 거란 소문이 나 있었다·
청성파의 입구라 할 수 있는 건복궁에는 평소 수십여 명의 도인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검문을 통과해야만 월성호를 건너는 배에 탈 수 있었다·
건복궁의 정문에서는 이대제자인 정명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으하함! 향화객도 다 돌아갔고 지루하군·”
“이 친구 그러다 운공 사부님이 보시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곁에 있던 정운이 하품을 하는 정명을 타박했다· 하지만 정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배배 꼬았다·
“설마 운광 사부님이 예까지 나오시겠는가?”
운광은 광무 진인의 막내제자로 건복궁에 있는 무인들을 통솔하는 중년의 무인이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걸세· 자네도 알지 않는가? 운광 사부께서 불시에 경계 태세를 점검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쩝! 알겠네·”
정명이 입맛을 다시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좀이 쑤셨지만 운광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정도로 크게 혼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밖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무슨 상황 말인가?”
“아 밀야와의 전쟁 말일세· 지금 사천성 밖은 난리도 아니라는데·”
“휴! 그러게 말일세· 우리 청성파야 전화에서 한발 빗겨나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다른 구대문파들은 전쟁을 치르느라 장난 아니라더군·”
“그렇겠지·”
정명과 정운이 눈가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이곳 청성산에만 있다고 해서 세상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향화객들의 입을 통해서 도관에 물건을 공급하는 상인들의 입을 통해서 들을 것은 다 듣고 있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오직 청성파만이 빗겨나 있는 것 같았다· 속세를 떠나 도를 수련하는 게 도인의 일이라지만 홀로 독야청청하는 것 같아서 괜스레 죄스러웠다·
그때였다· 정명의 시야에 건복궁으로 올라오는 일단의 사람들이 보였다·
“향화객인가?”
“이 시간에?”
벌써 사위가 컴컴해졌다· 무공을 익힌 무인들도 이 시간에는 잘 돌아다니지 않는다· 하물며 향화객이 이런 늦은 시간에 산에 오를 리 없었다·
“누구지?”
정명과 정운이 두 눈에 내공을 집중하며 안력을 끌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쉬익!
“컥!”
갑작스럽게 파공성이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정명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보게 정명·”
널브러진 정명을 바라보는 정운의 동공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정명의 이마에는 비수가 박혀 있었다·
정운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스 습격이다! 컥!”
그 순간 또 다른 비수가 날아와 그의 목젖에 박혔다· 정운은 목을 부여잡고 그대로 쓰러졌다· 잠시 사지를 부르르 떨던 정운이 그대로 절명했다·
그 직후 건복궁에서 도사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습격이라니?”
“정명? 정운?”
도사들이 절명한 정명과 정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사이 비수를 날린 무인들이 건복궁에 도달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감히 청성파의 무인에게 살수를 쓰다니!”
중년도사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는 바로 건복궁의 도사들을 이끄는 운광 진인이었다· 운광 진인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어느새 습격자들은 건복궁의 정문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그들은 말도 없이 다짜고짜 무기를 휘둘러 청성파의 무인들을 공격했다·
“큭!”
“습격자다! 어서 상청궁에 이 사실을 알려라!”
운광 진인의 명령에 도사 중 한 명이 비상종을 울리며 신호용 폭죽을 쏘아 올렸다·
“네놈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감히 청성파의 무인을 상하게 한 죄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운광 진인이 노성과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 습격자들 사이에서 삼십 대로 보이는 무인이 걸어 나왔다· 그는 바로 남천명이었다· 그가 이죽거렸다·
“청성파가 뭔 대수라고·”
“네놈이 이들의 수괴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정체를 밝혀라!”
“알고 싶다면 스스로 알아내 봐·”
“이익!”
남천명의 도발에 운광 진인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쉬가악!
눈이 부시게 시린 빛이 어둠을 갈랐다· 운광 진인은 일검에 모든 공력을 집중했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육체가 먼저 적의 무서움을 느끼고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남천명의 옷깃 하나 잘라내지 못했다· 남천명은 마치 부유하는 유령처럼 그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며 운광 진인을 지나쳐 갔다·
“멈춰라 놈!”
운광 진인이 돌아서 남천명을 따라잡으려 했다· 하지만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덜컥!
순간 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어깨에서 허리까지 갈라져 상체가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당했는지 느끼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상대가 언제 손을 썼는지도 보지 못했다·
“으아악!”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운광 진인의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의 비명 소리 때문인지 모르지만 잠들어 있던 청성산이 깨어났다· 어둡기만 하던 도관에 불이 밝혀지고 조용하던 산에 다급한 종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남천명이 그런 청성산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산세가 좋구나·”
그사이 염마대가 건복궁을 지키던 도사들을 모조리 도륙한 뒤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건복궁을 지나자 광활한 월성호가 펼쳐져 있었고 조그만 조각배 여러 척이 조그만 선착장에 매어 있었다·
남천명은 망설이지 않고 조각배에 올라탔다· 그러자 조각배가 무언가에 이끌린 듯이 절로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염마대의 무인들이 급히 다른 조각배를 타고 남천명을 따라갔다·
댕댕댕!
청성산에 다가갈수록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럴수록 남천명의 입가에 어린 미소도 짙어졌다·
“좋네· 살인하기 딱 좋은 분위기야·”
☆ ☆ ☆
당가타 가장 깊은 곳에 가주인 당관호의 거처가 있다·
만독제(萬毒帝)라는 별호처럼 천에서 독을 가장 잘 사용하는 독인(毒人)이 바로 당관호였다·
당관호의 거처에는 불이 꺼지는 법이 거의 없었다· 불이 꺼지는 시간은 새벽에 한 시진 정도에 불과했다· 혹자는 그래서 당관호를 가리켜 잠을 잊은 사람이라고도 불렀다·
당관호의 거처는 하루 열두 시진 온전히 열려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누구라도 쉽게 당관호를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오대세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당관호는 창문을 활짝 열고 불이 꺼진 당가타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파여 있었다·
평상시와 달리 이상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이고 불안감이 느껴졌다·
“허어! 왜 그러는가? 나도 이제 나이가 든 것인가? 이리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니·”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도 잠이 없었지만 오늘은 잠을 자기 그른 것 같았다· 결국 당관호는 한숨을 내쉬며 서가에서 책자를 하나 꺼내 펼쳤다·
평상시라면 금방 책에 몰입할 수 있을 텐데 글자가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당관호는 책을 읽는 것도 포기했다·
“휴우!”
그가 한숨을 내쉴 때였다·
“할아버님·”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왔다·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당관호가 반색했다·
“미려야 네가 어떻게 소식도 없이?”
여인은 바로 당미려였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당관호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당미려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알려드릴 소식도 있고 겸사겸사해서 찾아왔어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보다시피 나는 건강하단다· 너도 잘 지냈느냐?”
“예 보시다시피 잘 지내고 있어요·”
당미려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항상 가주라고 불렀지만 사적으로는 할아버지가 되는 당관호였다·
공식적으로는 당기문과 당미려 모두 당문에서 파문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당관호는 운중천의 눈을 피해 음으로 양으로 당기문과 당미려를 지원해 왔다· 북천문이 운중천의 눈을 피해 사천의 서부고원에 자리를 잡을 수 있던 것도 당관호의 배려 덕분이었다·
사천 무림의 맹주라 할 수 있는 당관호였다· 그에겐 그만한 힘과 권력이 있었다· 진무원과 북천문의 존재를 감추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손녀의 모습에 당관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품에서 놓아줄 때이지만 그래도 반가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리에 앉거라·”
“예!”
“기문인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숙부님은····”
“아직도 스스로를 자책하며 지내는 것이냐?”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지셨어요· 아직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지만·”
“기문이 그 아이는 늘 마음이 여렸지·”
당기문은 아직도 명류산의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명류산의 죽음을 잊기 위해 그는 더욱 독에 매달렸다· 그래서인지 성격도 어딘지 모르게 어둡게 변했다·
“그는··· 어떻게 되었느냐?”
“지금쯤이면 돌아왔을 거예요·”
당미려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당미려의 모습을 보면서 당관호는 안쓰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당미려가 진무원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모를 당관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은한설이 나타난 순간 그녀는 진무원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도저히 두 사람 사이에 파고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정리한다고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태연한 척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쓰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최근엔 본연의 미소를 회복하고 있어서 그나마 나았다· 삼 년 전 이곳으로 도주해 왔을 때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아마 지금도 진무원이 들어오자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당문으로 내려온 것일 게다·
“미려야·”
당관호가 손을 뻗어 당미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당미려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전 괜찮아요· 진짜예요·”
“그래 안다·”
당관호도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가주님!”
밖에서 누군가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저 철문입니다·”
“철문? 들어오게·”
문을 열고 중년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투박한 이목구비와 거친 마의를 입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당철문· 사적으로는 당관호의 조카였고 공적으로는 당가의 외당주 직위를 갖고 있었다·
그는 당미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당관호가 물었다·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인가?”
“큰일 났습니다·”
“무슨?”
“광원의 검문소에 파견 나간 무인들이 모두 몰살당했습니다·”
“뭣이?”
당관호가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기에 인근 지부의 무인들이 가봤더니 글쎄 삼 파에서 파견된 제자들이 모두 전멸을 당했더랍니다·”
“흉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청성과 아미에 이 사실을 알렸느냐?”
“이미 전서구를 띄웠습니다· 지금쯤이면 그들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당장 수뇌부를 모조리 소집하게·”
“알겠습니다·”
당철문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남겨진 당관호가 몸을 떨었다·
“할아버지?”
당미려가 불렀지만 당관호는 듣지 못한 듯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렇게 불안했던가?”
사천성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당문과 청성 아미파가 만든 벽은 결국 바람을 막지 못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