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 7장 혈풍(血風)은 불청객과 함께 찾아온다 (1)
광원(廣元)은 사천성 초입에 위치한 현이다· 섬서성에서 들어오는 관도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주요 전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광원으로 들어가는 관도의 초입에는 검문소가 있었다· 청성파와 아미파 그리고 당문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검문소이다· 세 문파에서는 검문소에 각각 수십여 명의 전력을 파견해 엄중하게 검문하고 있었다·
신분이 불확실한 자는 절대 통과할 수 없었다· 설혹 통과하더라도 의심이 간다면 감시 인원이 은밀히 따라붙었다· 그 때문에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그 덕분에 사천성이 전쟁의 겁화에서 이제껏 안전을 지켜온 것도 사실이다·
폐쇄적인 지형과 세 문파의 적극적인 개입 덕분에 사천성은 풍요를 누리고 있었고 운중천에도 가장 많은 원조를 하고 있었다·
당진월은 당문에서 파견 나온 중년의 무인이었다· 그는 당문의 직계이기도 했고 광원의 검문소를 관리하는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평소 성정이 치밀하고 원칙에 충실해서 어떤 편법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벽창호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광원의 검문소가 철벽같은 경계망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진월은 오늘도 검문소에 나와 있었다· 검문소 바깥쪽으로 긴 행렬이 보였다· 사천성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상인도 있었고 일반 백성도 보였다· 간혹 무기를 든 무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무인들은 일반 백성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검문을 했다·
무인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그만큼 검문소를 지키고 있는 무인들의 기세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통과· 다음 오시오·”
당진월의 외침에 뒤쪽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상인들이 다가왔다· 짐을 실은 수레만 스무 대가 넘었고 상인들과 호위하는 보표들까지 물경 백 명이 넘는 대규모 행렬이었다·
“소속을 밝히시오·”
“우린 태평상단 소속의 상인들이오· 나는 이번 상행의 책임자인 정학문이오·”
책임자로 보이는 삼십 대 초반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서 신분을 밝혔다·
“정학문?”
“여기 신분증과 증명서가 있으니 확인해 보시오· 운중천에서 발급한 것이니 믿을 수 있을 것이오·”
정학문은 자신 있게 신분패와 증명서를 내밀었다· 당진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분패와 증명서를 받아 들었다· 경험상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자들일수록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당진월은 자세히 정학문의 얼굴을 살폈다·
평범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이다· 아마 길을 가는 남자들 중 백 명 중 이삼십 명은 정학문과 같은 얼굴형을 가졌을 것이다· 그 정도로 평범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눈매와 눈빛만은 인상에 남았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가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정학문의 쾌활한 표정과 눈빛이었다· 외부의 어떤 요인도 정학문에게서 웃음을 앗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정학문이 내민 증명서에는 운중천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품이었다·
“운중천에서 보증한 증명서가 맞구려 정 대협”
당진월과 무인들은 다른 상인들의 신분패도 꼼꼼히 확인했다· 의심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학문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통과해도 되겠소이까?”
“목적지가 어디시오?”
“도강언(都江堰)으로 가려고 하오·”
“성도가 아니고 도강언?”
“성도에는 이미 많은 상단이 들어와 있으니 이번 기회에 도강언 쪽에 지부를 낼 생각을 하고 있소· 물론 그전에 청성파와 협의를 해야겠지만·”
“음!”
도강언은 청성파가 자리 잡은 청성산 밑에 위치한 현이다· 청성파의 영향력 하에 있는 곳이지만 성도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상단은 도강언이 아닌 성도에 지부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역으로 도강언에 지부를 내겠다는 생각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경쟁자가 없는 곳이라면 그나마 활동하기가 수월할 테니까·
당진월은 수레에 실린 짐까지 모조리 확인했다·
“이건 모피가 아니오?”
“그렇소· 질 좋은 모피요· 어렵게 구한 최상급의 물건들이오·”
“흠! 지금과 같은 여름철에 모피라?”
“지금은 여름이지만 서너 달만 지나면 겨울이 옵니다· 당연히 수요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정학문의 말도 일견 타당했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당진월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차가워졌다·
“사천성이야말로 모피의 본산지 중 한곳이지· 그런 사천성 안으로 모피를 들여간단 말인가?”
“그건····”
정학문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개도 웃지 않을 헛소리· 상인들이 그런 이치도 모른단 말인가? 네놈들은 누구냐?”
당진월의 뒤로 이제까지 지켜보던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흠! 사천성이 모피의 본산지였나?”
정학문이 혀를 찼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남은 것은 사막의 모래처럼 무미건조한 표정뿐· 그런 그의 모습에서 방금 전 사람 좋게 웃던 상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과연 동일인일까 의심이 될 정도로 돌변한 그의 모습에 당진월이 외쳤다·
“수상한 놈들이다! 모두 제압하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옛!”
무인들이 힘찬 대답과 함께 태평상단의 무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 그들의 몸에서는 서릿발 같은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성과 아미 당문의 정예들이다·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기에 그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정학문이 고개를 저었다·
“쯧! 될 수 있으면 조용히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군· 깨끗이 정리하고 청성산으로 이동한다·”
“존명!”
이제까지 상인과 보표로 위장하고 있던 이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적수공권이었지만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와아아!”
당진월 휘하의 무인들이 정문학의 부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 문파에서 뽑은 정예답게 그들의 무위는 대단했다· 검기와 도기가 여기저기서 솟구쳐 올랐다·
쉬가악!
곳곳에서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려 퍼졌지만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슨?”
오히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은 삼 파의 무인들이었다·
상대는 마치 유령 같았다· 그들은 마치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나비처럼 표홀하기 그지없었다· 삼 파의 무인이 공격해 오면 그만큼 물러나고 그들이 지치면 다시 다가왔다·
삼 파 무인들의 검은 헛되이 허공만 갈랐다·
“이런!”
당진월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천하에는 수많은 운신법이 존재했지만 이런 운신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존재할 만한 곳은 알고 있었다·
“역시 밀야구나·”
“훗!”
정학문이 대답 대신 비웃음을 흘렸다·
“감히 밀야가 사천성을 노리다니 무슨 목적인 게냐?”
“꼴 보기가 싫어서 말이야·”
“무슨 말이냐?”
“중원 전역이 전화에 휩싸였는데 이곳 사천만 빗겨나 있다는 것이 보기 싫었거든·”
“겨우 그런 이유로····”
“그보다 못한 이유로 죽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놈!”
정학문의 조소에 당진월이 발끈해 달려들었다·
쉬쉭!
그의 옷자락과 소매에 숨겨져 있던 각종 암기가 허공을 갈랐다· 그중에는 당문이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는 금용암기도 다수 존재했다·
“흥!”
정학문이 조소를 흘렸다· 그는 당진월이 날린 암기를 피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당진월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걸렸다·
“입만 살아 있는 놈이었구나·”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암기들이 격중하기 직전 정학문의 몸이 환상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디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당진월이 사방으로 암기를 날렸다· 정학문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다· 팔방풍우(八方風雨)를 응용한 수법이었다·
푸확!
그 순간 당진월은 등에 화끈한 통증을 느끼고 입을 떡 벌렸다·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당진월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복부를 비집고 하얀 손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꿈같았다· 그것도 지독한 악몽·
“그르륵!”
당진월이 피를 울컥 토해냈다· 그가 쏟은 핏속에는 잘게 부스러진 내장 조각이 섞여 있었다·
“너 너는?”
“내 원래 이름은 남천명이야·”
“남천명?”
“그렇게 말해서는 알지 못하겠지? 그럼 이렇게 말하면 알까?”
정학문 아니 남천명이 당진월의 귀에 입을 바싹 갖다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순간 당진월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핏발 선 두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다 당신이····”
“후후! 알았으면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잘 가·”
남천명이 손가락으로 당진월의 머리를 톡 밀었다· 그러자 당진월의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그것이 당진월의 최후였다·
남천명이 뒷짐을 진 채 전장을 바라보았다·
전장은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쓰러지는 자들 대부분은 삼 파의 무인들이었다· 남천명이 이끌고 온 자들의 피해는 전무했다· 그야말로 가공할 무위였다·
순식간에 검문소에 있던 백여 명의 무인이 목숨을 잃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인근의 지부에 위험을 알리는 신호 폭죽은 미처 발사하지도 못했다·
“끄으으! 악마들이다·”
“어떻게 저런?”
검문소를 통과하길 기다리던 백성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들의 눈앞에서 사람이 죽고 잘린 팔과 다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대학살에 그들은 감히 도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몸만 벌벌 떨었다·
몇몇 사람은 바닥에 엎어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냈다· 그래도 토악질은 멈추지 않았다· 속이 뒤집어지고 하늘이 노래졌다·
그 순간 몇몇 무인이 그들 사이로 뛰어들어 무기를 휘둘렀다·
“으악!”
“살려줘!”
백성들과 상인들은 놀란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도주했지만 남천명이 이끄는 무인들은 그들이 도망가도록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한 명 한 명 끝가지 추적해 목숨을 빼앗았다·
그렇게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살해당했다· 도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무림이라는 세계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하필 이들과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순식간에 학살을 마친 무인들이 남천명의 주위로 다가왔다· 그들은 더 이상 상인이나 보표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빛과 기도 등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없이 어두운 눈빛과 서릿발보다 차가운 분위기는 과연 그들이 동일인이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들 중 가장 강해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마영좌(魔影座)시여 모두 정리했습니다·”
“이대로 청성산으로 향할 테니 아이들에게 긴장 풀지 말라고 해·”
“물론입니다· 저희 염마대(閻魔隊)는 방심이라는 단어를 모릅니다·”
“염병! 군마대의 어린것들도 그렇게 떠들다가 이번에 큰코다쳤다더구나·”
“예? 설마····”
남자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군마대의 대주인 척천경은 밀야에서도 알아주는 강자였다· 그런 강자가 이끄는 군마대가 패퇴했다는 말은 쉽게 믿기 힘들었다·
“왜 거짓 같으냐?”
“아 아닙니다·”
남자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믿을 수 없어도 남천명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푸른 바람이 그에게 진실을 속삭여 준다· 누구도 그의 푸른 바람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럼 가자꾸나· 그 녀석 말대로 화끈하게 놀려면 시간이 부족하니까·”
“알겠습니다·”
남천명이 앞장서 걸어갔다·
스스로를 염마대라고 밝힌 남자와 무인들이 남천명의 뒤를 따랐다·
문득 남천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성파 다음은 당문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당문이라···· 그들의 독이 과연 쓸 만할지 모르겠군·”
남천명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