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 3장 원치 않는 동행엔 사고가 따르게 마련이다 (1)
채약란의 망막에 진무원의 얼굴이 맺혔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불쑥 내뱉고 만 것이다·
진무원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저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정말인가요?”
“보았다면 기억에 남았겠죠· 특히 그쪽 같은 미인이라면야····”
진무원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채약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한참이나 진무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무원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에 그녀의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소협의 성함은 어떻게 되나요?”
“공작문의 단천운이라고 합니다·”
“단 소협이시군요· 알겠어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합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함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유는 아시겠죠?”
“물론입니다·”
“그럼 믿겠어요· 앞으로 무운을 빌게요 단 소협·”
“고맙습니다·”
채약란이 뒤돌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종리무환이 자리에 앉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 착각한 모양이야·”
“그래요?”
종리무환이 진무원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가 아는 채약란은 결코 무언가를 쉽게 착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다· 별다른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았다· 권법이나 장공을 익혔으면 손바닥이나 손등에 굳은살이 박였을 것이다· 검이나 도를 익혔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진무원의 손은 마치 여인의 섬섬옥수처럼 너무나 곱고 깨끗했다·
무엇보다 진무원의 몸에서는 흔한 무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무인이라고 추측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무인이 아닌데도 누님이 익숙함을 느꼈단 말인가?’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신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을 착각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영 찜찜한데·’
하지만 종리무환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눈앞의 낯선 남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거친 방법으로 고천후를 영입했으니 이제 그의 마음을 풀어서 철기문에 충성을 바치게 해야 했다·
종리무환은 고천후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공손창과 채약란이 그들의 대화에 합류하고 곧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비록 편협하고 오만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천후는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가 채약란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너는 내가 처음으로 인정하는 계집이다· 받아랏·”
“어르신이 더 정정하셨다면 당한 것은 저였을 거예요· 손속에 사정을 봐주셔서 감사해요·”
“봐주긴 지랄···· 아무튼 대단한 승부였다·”
채약란을 바라보는 고천후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계집이라고 우습게 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것도 사실이다· 최선을 다하고도 졌기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철기문이라고 했지? 그럼 문주는 역시 용무성 그인가?”
“맞아요·”
“흠! 그저 낭인들을 이끌고 돈벌이에나 치중하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야망이 큰가 보군· 개파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진 않을 텐데·”
“그래서 고 대협의 도움이 더 필요합니다· 저희 문파의 봉공이 되어주십시오·”
“흠! 저 계집 아니····”
“부문주입니다·”
“그래 부문주와의 싸움에서 패했으니 하급무사를 하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데 정말 봉공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건가?”
“그렇습니다·”
“으음!”
고천후의 눈에 처음으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이놈 사람을 다를 줄 아는구나·’
망신을 주자면 얼마든지 줄 수도 있는데 오히려 예를 갖춰 정중하게 부탁해 온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고천후가 물었다·
“그럼 철기문의 군사는 자네이겠군·”
“부끄럽지만 소생이 철기문의 군사를 맡고 있습니다·”
“자네와 같은 군사가 있고 부문주와 같은 무인이 있는 문파라면 앞날이 환하겠군· 내 미력하지만 철기문의 봉공으로서 소임을 다하겠네·”
“감사합니다· 제가 봉공께 먼저 술 석 잔을 올리겠습니다·”
고천후는 종리무환이 따라주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연거푸 마셨다· 뒤이어 공손창과 채약란이 각각 석 잔의 술을 더 올렸다· 술잔이 어느 정도 돌자 분위기가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거기에 고천후의 제자인 기산하까지 끼어들자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이 빛났다·
‘용 당주가 문파를 만들었나 보군· 그렇게 악착같이 재물을 벌어들인 것도 문파를 만들기 위함이었나?’
하나의 문파가 자리를 잡기 위해선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자금이 소요된다· 용무성이 철기당주로 수많은 의뢰를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진무원이 몸을 일으켰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과거의 인연을 만났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과거의 인연과 편하게 인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를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역시 당분간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길 생각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이 아니란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양지에서 노리는 도검보다 음지에서 쏘아진 화살이 더 무섭다는 사실도 알았다· 진무원은 한 번 한 실수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가자·”
유건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일어났다· 유건엽은 총총걸음으로 진무원의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그 꼬마 놈 근골이 아주 좋이 보이는구나·”
유건엽의 등 뒤로 고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진무원을 따라 일어선 모습을 보니 골고루 균형이 잡힌 몸이 한눈에 들어왔다· 겨우 대여섯 살짜리 꼬마의 몸치곤 무척이나 근골이 좋았다·
유건엽이 뒤돌아서 고천후를 바라봤다· 그러자 고천후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꼬마야 무공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 원한다면 내 제자로 받아들여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유건엽은 고천후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급히 진무원의 뒤를 따라 객잔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유건엽의 모습에 고천후가 입맛을 다셨다·
“아깝군· 제법 근골이 좋아 보이는데·”
“봉공께는 이미 제자가 있지 않으십니까?”
“제자는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근골이 뛰어날수록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고·”
“그런가요? 전 아직 제자를 키워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군요·”
“언젠가 자네도 알게 될 것이네· 제대로 된 제자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강호에 인재는 많지만 진실로 뛰어난 인재는 그리 많지 않지· 진정 뛰어난 재능을 발견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어야 할 걸세·”
“충고 명심하지요·”
종리무환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 층 복도를 걸어가는 유건엽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그 정도의 재능을 가졌단 말인가? 천하의 귀영창이 욕심을 낼 정도로?’
유건엽이 방으로 들어갔지만 종리무환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방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방으로 들어온 진무원은 유건엽에게 침상을 양보하고 창가에 앉았다· 칠흑 같은 밤 달빛마저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 칠흑 같은 어둠 속에도 집이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하루를 소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집념을 가지고 하루를 꽉 차게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모두 가려 버리고 검은 일색으로 물들여 버린다·
지금의 시대가 그랬다·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먼 훗날의 꿈을 생각할 여유를 잃어버렸다· 당장 살아남는 것이 급선무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렇게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든다·
‘운중천 밀야·’
예상보다 그들의 전쟁이 길어지고 있었다·
하진월의 예상대로라면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면 안 된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두 문파이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서로 적당히 싸우다가 물러났어야 한다· 그래야 피해도 줄이고 내부의 단합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은 날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피해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가고 있었다·
‘모용율천은 암중에서 운중천을 지배하면서 한편으로는 밀야에도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필요할 때마다 밀야를 격동시켜서 중원 전역을 전쟁의 공포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적당히 해야 했다· 적당히 싸우다가 물러나야 밀야의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운중천의 중원 지배력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치 생사대적이라도 되는 양 밀야가 끈질기게 운중천을 공격하는 형국이다·
그 말은 곧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했다·
‘모용율천이 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거나 밀야 내부의 상황이 급변한 것·’
어쩌면 두 가지 다 해당될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 어느 쪽이든 죽어나는 것은 하급무사들과 일반 백성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섬서 산서 감숙 지역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그런데도 운중천과 밀야는 이 세 지역에 계속해서 인원을 투입하고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였다·
‘모용율천·’
그동안 하진월은 은류를 이용해 부단히도 모용율천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은류의 역량을 총동원해도 모용율천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만큼 모용율천과 모용세가의 모든 것이 어둠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결국 이 싸움의 근원은 모용율천과 모용세가이다· 그들을 쓰러뜨리기 전에는 이 지옥 같은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이제까지는 모용율천과 모용세가가 철저하게 음지에 숨어 있었지만 지금은 진무원이 어둠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진무원은 그 점을 철저히 이용할 생각이다·
생각을 모두 정리한 진무원이 눈을 떴다· 그러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유건엽의 얼굴이 보였다·
“왜 자지 않고 있느냐?”
“아직 대답을 못 들어서요·”
“무슨 대답?”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대답·”
“흠!”
진무원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파였다·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게 싫은 건가요?”
“그보다는 내가 제자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게 크겠지·”
“정식 제자가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무공만 배울 수 있다면····”
진무원을 바라보는 유건엽의 눈엔 무공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유건엽이 이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다·
진무원은 잠시 유건엽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공이 절정에 이른 무인도 버거워할 진무원의 눈빛을 유건엽은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의 눈빛에 진무원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너를 제자로 받을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
“····”
“하지만 너에게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잡고 활용하느냐는 전적으로 너에게 달려 있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해요· 열심히 할게요·”
“이제 그만 자거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테니까·”
“예!”
그제야 유건엽이 잠자리에 들었다·
진무원은 유건엽이 잠이 들길 기다려 밖으로 나왔다·
“휴우!”
마음이 무거워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진무원처럼 홀로 무공을 깨우친 자들은 남을 가르치는 데 익숙지가 않았다·
진무원의 고민은 밤새도록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