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 2장 뜻하지 않은 곳에서 지인을 만난다 (3)
진무원은 종리무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삼 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종리무환의 얼굴은 그리 변한 것이 없었다· 단지 살집이 조금 더 붙고 눈빛이 깊어졌다는 것밖에는·
종리무환이 자리에 앉자 고천후가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은?”
“말을 마구간에 넣고 있으니 금방 들어올 겁니다·”
“음!”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종리무환이 다시 한 번 사죄하자 고천후가 굳은 표정을 풀었다· 종리무환은 미소를 지으며 기산하를 바라보았다·
“이분이 제자분인 기 소협이시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나갈 기재라더니 과연 헌앙하기 그지없군요·”
“기산하입니다 종리 대협·”
기산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종리무환에게 포권을 취했다· 정중히 예의를 갖춘 모습이지만 오만한 표정만큼은 그대로였다·
“반갑습니다 기 소협·”
종리무환이 기산하에게 포권을 취할 때 문을 열고 설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삼십 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왔다· 목덜미에서 가슴까지 이어지는 검상이 인상적인 여인은 바로 철기당의 부당주인 채약란이었다·
채약란의 뒤로 칠교검사(七巧劍士) 공손창과 낙일철궁(落日鐵弓) 담진홍이 들어왔다·
종리무환은 고천후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고천후는 종리무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채약란의 얼굴과 가슴을 훑어보았다·
노골적인 그의 시선에 채약란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파였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폈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고 대협·”
“철기당에 아주 아름다운 암호랑이가 있다더니 명불허전이군·”
“과찬이에요·”
“언제 꼭 그대와 비무를 하고 싶군· 알몸으로 말이야· 흐흐흐!”
“알몸은 좀 힘들겠지만 정당한 비무라면 언제든 응해드리죠· 하지만 고 대협이 과연 절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연세도 있으신데 무리하시면 건강에 좋지 않답니다·”
고천후의 음담패설에도 채약란은 당당했다· 겨우 이 정도의 음담패설에 위축될 거면 여자의 몸으로 철기당의 부당주가 되어 위명을 날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흥! 입심이 제법이군· 어디 입심만큼 무공도 대단한지 지켜보지·”
“결코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고 대협·”
삼 년이란 시간은 채약란에게 관록과 여유를 선물했다· 그녀는 이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동요하거나 감정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 고천후와의 대화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때 점소이가 고천후가 미리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그에 종리무환이 반색했다·
“잘됐군요· 마침 출출했는데· 대화는 식사를 하면서 하죠·”
“그러지·”
다섯 사람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진무원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삼 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그들은 전혀 진무원을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역용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변한 분위기 탓도 있었다·
삼 년 전에도 크게 튀지 않는 분위기를 갖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완벽하게 주위의 풍경과 동화되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종리무환을 비롯해 그 누구도 진무원을 알아보지 못했다·
‘철기당·’
지난 삼 년 동안 철기당에 대한 소식은 거의 듣지를 못했다· 그만큼 강호에서의 활동이 적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삼 년 만에 다시 만난 종리무환 등의 기도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단단한 분위기가 풍겼다· 편하게 지내온 자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여유와 관록이 느껴졌다·
음식을 먹고 술잔을 몇 번 나눴을 때 고천후가 입을 열었다·
“이제 배도 어느 정도 찼으니 나를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보게· 천하의 철기당이 아무런 용건도 없이 보자고 하지는 않았을 테지·”
“물론입니다·”
대답을 하는 이는 종리무환이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저희는 고 대협을 영입하길 원합니다·”
“나보고 철기당에 들어오란 말인가?”
“철기당이 아닙니다·”
종리무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고천후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철기문(鐵技門)입니다·”
“철기문?”
“철기당이 주축이 되어 그간 꾸준히 세를 모았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었기에 정식으로 출범하려 합니다· 저희는 고 대협을 철기문의 봉공으로 모시려 합니다·”
“큭! 봉공이라····”
고천후의 얼굴에 뒤틀린 미소가 떠올렸다· 누가 봐도 비웃음이 분명했다·
“이 고천후보고 겨우 신생 문파의 봉공이 되란 말인가? 일고의 가치도 없군·”
“비록 이제 시작하는 문파지만 대우만큼은 어느 문파 부럽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고 대협께서 저희와 함께한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흥!”
고천후가 코웃음을 쳤다·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다· 하지만 순간 그의 표정이 변했다· 종리무환의 곁에 앉아 있는 채약란의 모습을 본 직후였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채약란을 가리켰다·
“오늘 밤 저 계집을 내 처소에 들여보낸다면 한 번 생각해 보지· 흐흐!”
순간 채약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대번 독설이 터져 나왔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가 욕심도 많구나·”
“뭣이?”
쾅!
고천후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 음식이 담긴 접시가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탁자가 부서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가 채약란에게 삿대질을 하며 노발대발했다· 그에 채약란도 지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독설을 퍼부었다·
“양물을 세울 힘도 없는 늙은이가 어디서 감히 누굴 탐내는 거야! 그래도 예의를 갖춰 영입하려 했건만 주제도 파악 못하는구나! 전대의 기인? 지랄하고 있네·”
“이 이년이 그래도·”
고천후의 어깨가 푸들푸들 떨리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채약란이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밖으로 나와라 늙은이· 한판 뜨자·”
“오냐 좋다· 내 네년의 버릇을 고쳐주마· 내가 이기면 오늘 밤 네년을 품고 말 것이다·”
“흥! 대신 늙은이가 지면 철기문으로 들어오는 거다·”
“좋다·”
채약란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그 뒤를 고천후와 기산하가 따랐다· 세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공손창이 종리무환을 바라보았다·
“네놈은 악마야·”
“후후!”
“저 노괴를 그렇게 격동시키다니·”
“세상이 좁다고 제멋대로 활개 치던 이를 끌어들이려면 극단적인 방법이 최고예요·”
“흠! 과연 부당주가 고천후를 이길 수 있을까? 그래도 귀영창이라면 가히 창법의 대가라 할 수 있는데·”
“누님도 그간 장족의 발전을 했습니다· 분명 이길 겁니다·”
종리무환의 음성엔 채약란을 향한 신뢰가 굳건히 담겨 있었다·
콰쾅!
순간 밖에서 뇌성벽력이 울려 퍼졌다· 채약란과 고천후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종리무환과 공손창은 담소를 기울일 뿐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만큼 채약란을 믿는 것이다·
진무원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의 귀에도 채약란과 고전후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싸울 때마다 강렬한 기파가 넘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나는 맹렬하고 다른 하나는 날카로웠다·
‘맹렬한 것은 고전후이고 날카로운 것은 채 부당주의 것이군·’
객잔의 벽에 막혀 있지만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두 사람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방위 감각을 통해 그들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고천후가 채약란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의 귀영창은 맹렬한 기세를 발산하면서 채약란의 요혈을 위협하고 있었다· 반대로 채약란은 방어를 공고히 하면서 간간이 반격하고 있었는데 그 공격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그때마다 고천후가 움찔하면서 물러났다·
고천후가 진신절기인 산화칠절창법(散花七切槍法)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채약란의 몸에는 조그만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
“어린년이 제법이구나·”
벽 너머로 고천후의 음성이 들려왔다· 상대를 인정하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담겨 있었다· 설마 채약란의 무공이 이렇게 뛰어날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족의 발전을 했구나·’
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그 후부터는 쉽게 발전하지 않는다· 이른바 정체기에 접어드는 것이다· 정체기의 벽은 너무나 높고 단단해서 쉽게 깨지지 않는다·
많은 무인이 용맹 정진하지만 그 벽을 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벽을 깨는 극소수의 무인만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채약란에게서 바로 초절정고수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채약란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거대한 벽을 깨고 진일보했다· 그 결과 전대의 고수인 고천후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승부는 이미 정해졌군·’
진무원은 술잔을 들며 종리무환과 공손창을 바라봤다· 그들은 이미 싸움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쩌엉!
그 순간 벽 너머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더니 객잔 전체가 들썩였다· 그리고 곧 정적이 찾아왔다·
“끝났군요·”
종리무환이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공손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객잔 입구를 바라봤다· 잠시 후 객잔 문이 열리더니 채약란이 보무도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얼굴이 벌게진 고천후와 기산하가 따랐다·
누가 봐도 승패는 명백했다· 채약란이 이긴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채약란이 자리에 앉자마자 시원하게 술잔을 들이켰다·
“캬! 술맛 좋다!”
이어 그녀가 고천후를 바라봤다·
“약속은 지키겠죠?”
“끄응!”
“설마 천하의 귀영창이 자신이 한 말도 지키지 않는 소인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약속은 지킨다· 끄응! 오늘부터 노부는 철기문의 문도가 되겠다· 하아!”
기어이 고천후가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서 있을 기력도 없다는 듯 채약란의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주름진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십여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나도 늙었나 보구나·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고천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공이나 관록은 고천후가 채약란보다 월등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체력은 달랐다· 고천후는 나이가 들었고 채약란은 아직 한창때였다·
초반에 제압하지 못하고 싸움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것은 결국 고천후였다· 결국 고천후는 체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채약란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진무원의 생각은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고천후가 최근 싸워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실전이란 제대로 손질하지 않은 검과 같았다· 하루라도 소홀히 하면 금방 녹슬고 무뎌져 결국은 정작 필요할 때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채약란은 달랐다· 지난 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감각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활력이 넘치는 눈빛과 생동감 있게 꿈틀거리는 탄력 있는 근육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종리무환이 웃으며 고천후에게 술잔을 건넸다·
“반갑습니다 고 대협· 이제 같은 밥을 먹는 식구가 되었군요·”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나를 격동시킨 것인가?”
“십 할 확신은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끄응!”
고천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흘렸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살기 어린 눈으로 객잔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은 사람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고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누출하는 놈이 있다면 내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단죄를 할 것이다!”
그의 서슬 퍼런 음성에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고천후는 그 광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종리무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들의 입단속은 저희가 시키겠습니다· 그러니까 고 대협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음!”
종리무환이 눈짓을 했다· 그러자 공손창과 채약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각 탁자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탁자에 앉은 자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했다· 혹시 나중에 있을 문제의 소지를 미연에 차단하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들의 위세에 질려 순순히 자신의 신분을 말했다· 진무원과 유건엽이 앉아 있는 탁자에도 사람이 왔다· 그는 바로 채약란이었다·
“이봐요!”
진무원이 고개를 들어 채약란을 바라봤다· 삼 년 만의 조우이다·
채약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