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 1장 숨을 죽이고, 이빨을 갈다 (2)
제혁심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철혈성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의 죽음 즉시 고전월이 철혈성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제혁심과 함께 술자리를 하던 지역 유지들과 상인들은 모두 지하의 뇌옥에 감금되었고 철혈대의 무인들도 점혈당한 채 전각에 갇혔다·
고전월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제혁심의 곁에서 아부하던 자들을 모조리 쳐 내고 철혈성의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썩은 가지를 잘라내고 이제까지 등한시되던 인재들을 등용하며 체제를 다시 정비했다·
그렇게 철혈성은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진무원이 있었다· 진무원의 강력한 존재감이 제혁심을 대신해 철혈성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고전월은 절벽에 서서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았다· 볼품없는 조그만 어선의 선수에 홀로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문주님·”
그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제혁심을 제압한 진무원은 미련을 두지 않고 철혈성을 떠났다· 그는 고전월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거나 자신을 따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전월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고전월뿐만이 아니었다· 철혈성의 대부분 무인이 그랬다· 진무원이 남긴 잔향은 실로 강력해서 아직까지도 철혈성의 무인들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군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북천문은 문주님으로 인해 다시 천하를 질타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그를 찾아온 남자는 바로 북천문의 군사인 하진월이었다· 그는 고전월을 설득하고 철혈성을 장악할 방도를 알려주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한 고전월이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믿게 되었다·
하진월은 철혈성의 내부 상황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부에 있는 고전월도 모르는 사실까지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특히 내부의 분열과 불만이 있는 인사들의 명단까지도 줄줄이 꿰차고 있어서 고전월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하니 철혈성을 장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장악하고 보니 철혈성에 이렇게 많은 구멍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일단 완벽하게 철혈성을 장악하고 자중하고 있으라고 했지?”
진무원은 별말이 없었지만 군사인 하진월은 그에게 명확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제부터 하진월의 말을 따를 생각이다·
그가 휘하의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철혈성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문주님이 다시 부르는 그날까지 모두 근신한 채 무공을 수련한다· 배에 끼어 있는 기름을 털어내고 언제든 전장으로 달려갈 수 있게 육체를 단련한다·”
“예!”
무인들의 힘찬 대답이 철혈성에 울려 퍼졌다·
조용한 변화 하지만 누구도 모르는 극적인 변화였다·
☆ ☆ ☆
어선이 정박하자 진무원이 내렸다· 그 뒤를 청인이 따랐다· 어선을 보낸 청인은 진무원을 포구 근처 한적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말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그가 진무원에게 말고삐를 쥐어주며 말했다·
“이걸 타고 가면 될 거야·”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청인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청인의 모습을 보며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삼 년 전 그날부터 청인은 진무원을 따랐다· 그동안 청인이 한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흑월 내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날 이후 완전히 활동을 멈추고 모든 조직이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심지어는 이제까지 운영하던 거점까지 모조리 옮기면서 청인은 졸지에 공중에 붕 떠버렸다·
그 후 청인이 한 일은 북천문에 새로운 정보 조직을 신설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하진월의 설득이 있었다· 결국 청인은 하진월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정보 조직을 구축했다·
은류(隱流)라는 이름의 정보 조직은 새로이 출범한 북천문의 눈과 귀가 되었다· 아직은 만들어가는 과정이고 흑월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규모도 미미했지만 그래도 독자적인 정보 조직이 있다는 것은 북천문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
청인은 은류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북천문에 머무는 법이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군사인 하진월조차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능력만큼은 확실해서 은류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는 신뢰도가 무척이나 높았다·
잠시 청인을 바라보던 진무원이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평범하게 변했다· 내공을 이용해 얼굴 형태를 바꾼 것이다·
청인이 그에게 신분패를 내밀었다·
“단천운 그 이름을 사용하면 될 거야· 호남성 영주의 공작문(孔雀門) 출신이야· 공작문은 십여 년 전에 대가 끊겨 멸문했고 단천운은 오지에서 급사했어· 물론 그가 급사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지·”
요컨대 실제로 존재하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청인이 단천운의 존재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단천운이라····”
“내성적인 성격이라 말수도 적은 편이니까 그 이름으로 활동해도 문제가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라구· 부현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민심이 더 흉흉해졌어· 아마 사천까지 가는 길이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같이 가지 않습니까?”
“그러고 싶지만 가봐야 할 곳이 생겼어·”
진무원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청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흑월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어·”
“흑월이 말입니까?”
“그러니까 찾아가 봐야지· 어쨌거나 나의 근원이니까·”
지난 삼 년 동안 어디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던 흑월이다· 흑월의 구성원 대부분은 청인의 형제와도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 흑월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청인의 입장이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부디 원만하게 일이 해결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될 거야· 흑월이 그렇게 꽉 막힌 곳은 아니니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음!”
청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무원을 바라봤다· 비록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신뢰감은 여전했다· 아마 수십 년의 세월이 다시 흘러도 진무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청인은 그렇게 확신했다·
진무원과 청인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혼자가 된 진무원은 말을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철혈성을 정리하느라 오래 북천문을 비어놓았다· 물론 하진월과 당기문이 알아서 잘 이끌고 있겠지만 그래도 문주가 되어서 문파를 오래 비워두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북천문으로 향하는 진무원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철혈성의 일을 그래도 원만하게 해결했기 때문이다· 철혈성을 장악하면서 북천사주 중 두 곳이 그의 영향력 아래 들어왔다· 예전 북천문의 성세에 비하면 조금은 모자라지만 그래도 구대문파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전력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하진월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울 정도였다· 사천성 서부고원에 북천문을 세우자는 것도 그의 의견이었다· 서부고원은 명류산의 고향 마을이 있고 그를 기리자는 뜻도 있었다·
그런 하진월의 결정 덕분에 당기문의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다· 그 결과 새로운 제자들을 키우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
진무원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그 속에서 명류산이 웃고 있는 듯했다·
“잘 있지?”
명류산은 진무원에게도 아픈 손가락이었다· 지금도 간혹 그를 생각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울적해질 정도이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런 때일수록 오히려 힘을 냈다· 이제 와서 명류산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이곳에서 사천성의 서부고원까지는 무려 육천 리가 넘었다· 하루에 백오십 리씩 가더라도 사십 일이 넘게 걸리는 엄청난 거리였다·
경공술을 펼치면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을 테지만 진무원은 그러지 않았다· 먼 거리를 가려면 체력 비축은 필수였다· 그리고 그것이 꼭 먼 길을 갈 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진무원은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말을 몰았는데도 머물 만한 마을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말을 멈추고 노숙할 만한 곳을 찾았다·
혼자서 노숙할 만한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무원은 개울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 모닥불을 피웠다· 말의 안장 뒤쪽에 있는 자루를 열자 조그만 솥과 곡물 가루 육포가 나왔다·
진무원은 솥에 곡물 가루와 육포를 조금 넣고 물을 부었다· 내용물이 담긴 솥을 모닥불 위에 걸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만장단애에서 추락하던 순간부터 겨우 목숨을 건져 하진월 등과 다시 만난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당시 진무원은 극심한 내 외상을 입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은한설로 인해 그의 내상은 악화되었다· 만영결이라는 천고의 심법이 없었다면 아마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당기문이라는 걸출한 의원의 도움까지 받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난 진무원은 하진월 등과 함께 사천의 서부 고원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서부고원에 자리를 잡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당기문이 죽어도 명류산의 부모에게 그의 죽음을 알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운중천의 그물 같은 감시망을 피해 사천성으로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사천성의 서부고원에 도착할 수 있었고 명류산의 부모에게 그의 죽음을 알렸다·
명류산의 부모는 그의 죽음을 알고 크게 슬퍼했지만 진무원 등을 탓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원하던 대로 이름을 날렸잖아· 놈도 저승에서 만족할 거야·”
그러면서 아들의 별호인 혈견무랑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렇게 그들은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진무원의 가슴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직후 하진월이 말했다· 이곳에서 새로운 북천문을 시작하자고· 그리고 일행은 모두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북천문은 그렇게 아무도 오지 않는 사천의 서부고원에서 새로운 시작을 했다·
하진월과 당기문이 새로운 북천문의 틀을 짜는 동안 진무원은 폐관수련을 했다· 혼마 조운경과의 연이은 격전은 진무원에게 내상만 안겨준 것이 아니었다·
생사를 오가는 사투 속에서 진무원은 깨달음의 단초를 얻었고 멸천마영검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진무원은 오로지 무공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진무원이 폐관수련을 하는 사이 하진월은 청인을 이용해 천하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북천문의 틀을 잡아갔다· 백룡상단에 있던 황철과 곽문정을 불러들인 것도 그즈음이었다·
황철을 통해서 비황대의 대주인 마도광과 접촉했다· 북천문이 멸문한 지 십 년이 넘었고 그사이 비황대는 진짜 마적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마도광이 아니었다면 통제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마도광은 아직도 북천문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렇다고 그가 황철과 하진월의 말만 듣고 서부고원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진무원을 직접 보기를 원했고 다짜고짜 진무원이 폐관수련을 하고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승부가 어떻게 났는지는 진무원과 마도광밖에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그날 이후 마도광이 부하들을 이끌고 서부고원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마도광은 마적질을 하면서 모은 엄청난 재물을 기꺼이 하진월에게 내놨다· 하진월은 그 재물을 바탕으로 북천문의 재건을 시작했다·
인적 자산과 물적 자산이 갖춰졌다· 거기에 하진월이라는 걸출한 책사의 머리까지 더해졌다·
하진월은 북천문의 체계를 잡아가는 한편 인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투입하는 한편 청인을 이용해 정보 조직을 만들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면서 아무것도 없이 황량하던 서부고원에도 건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전각을 지을 재료가 부족해 건물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무인들의 가슴엔 웅지가 가득했다·
혹독한 환경은 사람들을 뭉치게 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북천문의 무인들은 조금씩 성장해 갔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하진월뿐만 아니라 소무상 마도광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
무인들이 성장을 하고 문파가 커져가는 만큼 엄청난 양의 자금이 소모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마도광의 재물도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 위기가 닥쳐왔다·
그때 나선 것이 바로 백룡상단이었다· 원래는 감숙성 난주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백룡상단은 전란을 피해 사천성으로 옮긴 상태였다· 백룡상단은 그야말로 파격적이리만큼 엄청난 금액을 북천문에 지원했다· 그만큼 백룡상단의 노태태는 북천문의 잠재력을 크게 봤다·
백룡상단은 단순히 금전적인 지원만 한 것이 아니었다· 진무원 등과 인연이 깊은 아들 윤자명을 아예 북천문에 파견했다·
재정적으로 안정이 되자 북천문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들은 은밀히 세를 넓혀갔다·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에 휩쓸린 천하는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다·
진무원이 다시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북천문은 더 이상 미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나름의 체계와 무력을 갖춘 잠룡의 대지가 된 것이다·
진무원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도광이 경무생을 영입할 것을 제안했다· 북천사주의 일인인 경무생은 그때까지도 어떤 움직임도 없이 풍운산장에 칩거하고 있었다·
마도광은 경무생이 사실은 북천문의 전력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고육지책을 쓴 거라고 말했다·
진무원은 당장 경무생을 영입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고집 또한 마도광에 못지않았다· 그는 진무원을 주군으로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진무원의 무력을 직접 평가하길 원했다· 경무생의 무력은 실로 대단했다· 풍제(風帝)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을 만큼 빠르고 강했다· 진무원의 뺨에 난 상처도 그때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결국 경무생을 제압했다·
그제야 경무생도 진무원을 인정하고 북천문에 합류했다· 하지만 운중천의 감시를 감안해서 제자 중 상당수는 풍운산장에 남겨두었다·
애초에 경무생을 따른 무인 대부분은 북천문의 진정한 충신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며 북천문과 풍운산장을 오갔다·
비황대와 풍운산장의 무인들까지 합류한 북천문의 문도 수는 무려 삼천 명에 육박했다· 구대문파에 뒤지지 않는 전력이다· 그리고 진무원에겐 그들을 이끌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진무원이 상념을 정리하며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더 집어넣을 때였다·
“이쪽에 불빛이 있다·”
갑작스러운 소음이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