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 1장 숨을 죽이고, 이빨을 갈다 (1)
천하를 위한 싸움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나를 위한 싸움만이 존재할 뿐·
자신의 욕망을 대의라는 말로 꾸미고
그것이 사실이라 믿고 살아간다·
강호를 지배하는 자·
수백 수천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정의에 도취되었음이다·
제혁심이 무서운 눈으로 진무원을 노려봤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눈빛만으로도 숨이 멎을 만큼 제혁심은 강력한 살기를 여과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비록 십 년이란 세월 동안 몸이 불어 예전 같은 날렵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신 강렬한 위압감과 존재감만큼은 여전했다·
살기를 머금은 것만으로도 방원 십여 장이 그의 지배력 아래 놓였다· 고전월을 비롯한 철혈대는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제혁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살기가 집중된 당사자인 진무원은 처음과 다름없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전혀 살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산책을 하러 나온 사람처럼 덤덤한 모습이 오히려 더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에 제혁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놈이 지금 감히 나를 도발하는 것이냐?”
“도발하는 것으로 보입니까?”
“못 본 사이 입심이 많이 좋아졌구나· 난 제혁심이다· 네 아비도 감히 내 앞에선 그리 망발을 하지 못했다·”
“백부는 아직도 과거 속에 사시는 모양이군요·”
“감히!”
“아버지는 백부를 존중했습니다· 하지만 저까지 백부를 존중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존중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니까요·”
“내가 자격을 갖추지 못했단 말이냐? 이 내가?”
순간 제혁심의 살기가 폭발적으로 확장됐다· 그의 살기에 노출된 이들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진무원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빛엔 측은함이 가득했다·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제혁심의 존재감은 여전히 강력했다· 하지만 진무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전 지금쯤이면 백부가 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백부는 누구보다 야심이 컸고 또 그에 걸맞은 무력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백부의 결정을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제혁심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호랑이처럼 사나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유와 먹이를 갈구하는 그 강렬한 눈빛은 어린 진무원의 가슴에도 깊이 각인되었다· 하지만 지금 제혁심의 눈빛은 십 년 전의 그 사나움이나 광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네놈이 무얼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편히 앉아서 아비의 유산이나 이어받은 주제에·”
제혁심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확장되더니 붉은색 기류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잠시 사그라들었던 철혈무상강기가 다시 발동한 것이다·
철혈무상강기는 제혁심이 창안한 고도의 강기 무공이었다· 이 무공을 창안하기 위해 제혁심은 수십 가지의 강기 무공을 익혔고 그중에서 최고의 정수만을 뽑아 철혈무상강기를 창안했다· 그만큼 철혈무상강기는 엄청난 파괴력과 위력을 자랑했다·
제혁심이 무거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진무원을 향해 다가왔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오로지 살기만이 가득했다·
쿠콰콰!
그의 몸을 중심으로 파괴의 강기가 회오리쳤다· 강기에 닿은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정원도 그 안에 피어 있던 온갖 기화요초도·
고전월과 철혈대의 무인들은 감히 제혁심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십여 장 밖으로 물러나야 했다·
진무원의 발밑으로 부러진 나뭇가지와 꽃잎이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진무원은 그중 기다란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손으로 한 번 훑었다· 그러자 잔가지와 나뭇잎이 떨어지고 매끈한 검 모양이 되었다·
진무원이 나뭇가지를 가볍게 휘둘렀다· 촉감이 마음에 드는지 진무원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 진무원은 나뭇가지로 제혁심을 겨눴다·
“고작 그따위 나뭇가지 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결과야 두고 보면 알겠죠·”
“네놈의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아예 네놈을 오체분시 해주마·”
기어이 제혁심의 화가 폭발했다·
그의 몸을 휘돌던 철혈무상강기가 붉은 창이 되어 진무원을 향해 쏘아졌다·
츄화학!
순간 진무원이 가볍게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간발의 차이로 철혈무상강기가 그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강기에 휩쓸린 머리카락 수십 가닥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왼쪽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진무원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쿠와아아!
제혁심이 다시금 진무원을 향해 강기를 날렸다·
철혈무상강기의 절초인 철혈광룡참(鐵血狂龍斬)의 초식이었다· 붉은색 강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싶더니 곧 진무원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제혁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방원 십 장이 철혈무상강기의 영향력하에 있다· 진무원이 제아무리 몸부림을 친들 철혈광룡참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라지거라!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도 없이·”
쿠와앙!
철혈광룡참의 초식이 진무원을 직격하며 굉음이 천지를 울렸다· 먼지와 꽃잎이 뒤섞여 비산하고 사방으로 후폭풍이 몰아쳤다·
집채만 한 바위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만한 위력을 가진 공격이었다· 하지만 막상 공격을 한 제혁심의 표정은 마치 똥을 씹은 것처럼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느낌이 없다·’
공격을 성공시켰다면 분명 반진력이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느낌도 전해지지 않았다·
제혁심이 모든 감각기관을 활짝 개방해 진무원의 행방을 쫓았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진무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혁심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한 빛이 떠올랐다·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역시 그렇군요·”
자욱한 먼지 속에서 진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그가 비산한 먼지를 헤치며 걸어 나왔다· 그의 몸에는 그 어떤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너?”
제혁심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런 제혁심의 모습을 보면서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싸워본 적이 언제입니까? 십 년 전 아니 북천문에서도 백부가 싸우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으니 그 이전이라고 봐야겠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지금 백부의 몸은 무인의 몸이 아닙니다· 허리엔 기름기가 끼었고 감은 무뎌지셨습니다· 강대한 무력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초식을 제대로 활용할 방법조차 잊어버리신 것 같습니다·”
“네가 감히 나를 가르치려는 것이냐?”
“사실대로 말하는 겁니다·”
“그 입을 찢어놓겠다· 챠하핫!”
제혁심의 몸에서 철혈무상강기 수십 다발이 발출되었다· 철혈무적강(鐵血無敵罡)이라고 불리는 극강의 초식이다·
쿠콰콰!
수십 다발의 강기가 진무원을 향해 쏘아져 왔다· 어떤 것은 곡선을 그리고 어떤 것은 직선으로 날아온다· 어떤 것은 빠르게 날아오고 어떤 것은 느리게 날아오면서 진무원을 완벽하게 포위했다·
초절정에 이른 고수일지라도 강기 하나를 발출하면 극심한 공력 소모에 탈진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제혁심은 절대지경에 이른 고수답게 수십 다발의 강기를 동시에 발출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공력을 자랑했다·
제아무리 무한대에 가까운 내공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수십 다발의 강기를 이런 식으로 운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이른 공력의 세밀한 운용이었다·
일찍이 강기 무공에 심취하고 오직 강기만 파고든 제혁심이기에 가능한 공격이었다· 모두가 그 엄청난 위력에 몸을 벌벌 떨 때 오직 진무원만은 다르게 생각했다·
‘백부는 겁쟁이였구나· 자신의 몸이 상하는 것을 두려워해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고 멀찍이서 강기로 공격하는구나·’
강기 무공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호전적인 성향이 강할수록 파괴력이 극대화된 무공에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 강기 무공에 몰두하게 된다·
제혁심의 경우는 그와 비슷하면서도 또 달랐다· 제혁심의 강기 무공은 상대방의 완벽한 파괴보다는 자신의 보호가 우선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똑같은 강기 무공으로 보이겠지만 진무원의 눈에는 의도된 공력의 운용이 훤히 보였다·
자신의 보호가 우선이고 공격이 그다음이다· 공력의 운용이 그랬고 멀찍이 떨어진 채 공격하는 모습이 그랬다·
진무원이 나뭇가지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매우 여유로웠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산책을 나왔다고 착각할 만큼 표표하게 걷고 있었다·
쿠콰쾅!
그런데도 강기의 공격은 그의 몸을 하나도 맞추지 못하고 지척에 떨어지고 있었다· 강기의 직격에 땅거죽이 뒤집어지고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하지만 진무원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그 사이를 걸었다·
콰콰콰쾅!
강기의 비가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진무원의 몸을 맞추지 못했다· 마치 강기가 알아서 진무원을 피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계류보(溪流步)는 이제 또 다른 경지를 열었다· 단순하게 계곡 사이를 격렬하게 흐르는 물이 아닌 강을 지나 바다에 합류한 조류처럼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언뜻 보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변화가 있고 격렬한 움직임이 존재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이익!”
너무나 자연스럽게 강기의 공격을 피하면서 다가오는 진무원의 모습에 제혁심이 이를 악물며 다시 공격했다· 하지만 그 어떤 공격도 진무원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은 제혁심의 가슴속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던 악몽을 끄집어내게 만들었다·
‘또 똑같다· 그자와····’
그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남긴 자·
북천문을 박차고 나와 세상 두려울 것이 없을 때 그에게 처음 좌절을 안겨준 자·
그의 조소 어린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래도 용에 근접한 줄 알았는데 조금 큰 뱀에 불과했군·’
그 이후 웅지를 접고 이곳 철혈성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오직 이곳에서 그는 정신적인 안정을 느꼈다· 그것이 그가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였다·
지금 제혁심은 진무원의 모습에서 그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새긴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무공도 다르고 생김새는 더 달랐다· 그런데 묘하게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두 사람이 풍기는 여유로운 분위기 세상을 굽어보는 듯한 그 눈빛이 너무나도 닮았다· 그래서 소름이 끼쳤다· 미친 듯한 위기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이야아아!”
제혁심이 닥치는 대로 강기를 발출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너무나 수월하게 강기의 비를 피해냈다· 몇 번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그의 몸은 이미 제혁심의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그 순간 제혁심은 진무원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무심한 듯 깊이 가라앉은 새까만 눈동자· 언뜻 담담하게 보이는 그 깊은 눈빛 속에 가라앉아 있는 광포한 폭풍의 편린을·
폭풍이 일렁이기 시작하는 순간 제혁심의 전신에 소름이 올라왔다·
“크윽!”
그가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진무원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가 제혁심의 목젖을 노리고 날아왔다·
제혁심의 망막에 그 모습이 맺혔다·
생각보다 느린 공격이었다·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으로 한 걸음만 옮기면 나뭇가지를 피하고 반격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었다·
이상하게 몸이 굳었다· 마치 전신이 아교가 가득 들어 있는 통 안에 잠긴 것 같이 움직이기 힘들었다·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
눈과 머리는 진무원의 검이 다가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 몸은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진무원이 뻗은 나뭇가지가 그의 망막을 가득 채운 그 순간 제혁심은 미간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푸화학!
허공에 한줄기 핏줄기가 치솟아오르며 제혁심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고전월과 철혈대의 눈에는 그 모든 광경이 이상하리만치 너무나 선명하게 들어왔다· 다른 모든 감각은 모두 마비된 채 오직 시력만 정상인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각인을 시킨 것처럼 또렷했다·
털썩!
그들의 꿈은 제혁심의 육중한 동체가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끝이 났다·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흐르면서 몽혼하던 감각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불신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너무나 충격적인 광경에 전신의 힘이 빠져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치 봐서는 안 될 무언가를 목도한 기분이다·
제혁심이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러러보고 따랐던 전설이 눈앞에서 무너진 모습은 그들의 가슴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진무원이 나뭇가지를 버리고 제혁심에게 다가갔다· 제혁심은 겨우 고개를 들어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엔 생기란 존재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겨우 미간에 생긴 조그만 흠집에 불과했지만 대신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뇌가 곤죽이 되었기 때문이다·
“크흐흐! 너는··· 그와··· 닮았어· 하지만 조심··· 난 후회····”
제혁심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것이 북천문의 네 기둥 중 하나이던 제혁심의 최후였다·
옛 전설이 무너지고 새로운 전설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전월의 몸이 격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자 고전월이 북천문의 문주님을 뵙습니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이제까지 제혁심과 진무원의 싸움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이 고전월을 따라 일제히 부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