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 8장 무너진 하늘 아래 다시금 우뚝 서다 (3)
교남(膠南)은 산동성 해안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항구에는 수많은 고깃배와 상선이 정박해 있었고 거리에는 상의를 벗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어부뿐 아니라 무기를 차고 있는 무인들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교남은 평범한 항구도시에 불과했다· 교남 주민들 대부분은 고기잡이로 하루를 연명하는 어부였고 그들의 삶은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십여 년 전 이곳에 한 문파가 자리를 잡으면서 상황이 변했다·
철혈성(鐵血城)·
북천사주의 일원인 철혈무제(鐵血武帝) 제혁심이 세운 문파가 바로 교남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철혈성이 들어온 이후 교남은 눈부시게 발달했다· 고깃배 일색이던 항구에 상선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덩달아 교남도 발전하면서 여타 도시 못지않은 성세를 구가하게 되었다·
철혈성이 있는 곳은 본래 욕화도라 불리는 교남 앞바다의 조그만 무인도였다· 교남에서 배를 타면 한식경이면 갈 수 있는 조그만 섬에 제혁심은 철혈성을 세웠고 지난 십 년 동안 욕화도는 그야말로 철옹성이 되었다·
배를 타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고 설령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사방이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인지라 유일한 출구는 접안 지역뿐이었고 사전에 허락받지 않은 자는 철혈성에 절대 들어설 수 없었다·
교남 항구에서 바라보는 철혈성의 모습은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촛대 같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철혈성을 가리켜 촛대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교남 앞바다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실제 철혈성에 들어가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일반인에게 철혈성에 들어가 볼 기회는 절대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항구에는 멀리서나마 철혈성을 구경하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구곡객잔은 교남 앞바다에 있는 조그만 객잔이다· 다른 객잔 대부분이 철혈성을 구경하러 온 외지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데 반해 구곡객잔은 주로 현지 어민들을 상대로 장사했다·
비록 객잔 자체는 오래되고 허름하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음식이 맛있다 보니 손님이 끊이지 않는 편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손님이 몇 명이라도 있을 시간인데 구곡객잔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손님이 하도 없다 보니 구곡객잔의 주인은 바다가 보이는 제일 좋은 자리에 앉자 연신 하품을 해댔다·
“으하함! 죽겠구나· 어떻게 이렇게 손님이 없을 수 있지?”
정말 신기할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평소에도 손님이 없다지만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객잔 주인이 연신 죽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객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객잔 주인은 반색하며 달려갔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 있습니까?”
“보다시피 아주 널널합니다· 헤헤!”
객잔 주인은 헤픈 웃음으로 손님을 맞았다·
이제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손님이다· 아주 넉넉한 살집과 푸근한 인상이지만 눈매가 제법 날카로워 보였다·
‘상인이구나·’
교남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하다 보니 제법 사람 보는 눈이 늘었다고 자부하는 객잔 주인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님이 상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실 교남에 오는 대부분의 상인들이 눈앞의 손님과 같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상인은 방금 전까지 주인이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 덥다·”
“헤헤! 무엇을 드릴깝쇼?”
“교자 한 접시 하고 생선 요리 먹을 만한 걸로 하나만 내오시오·”
“혼자 드실 겁니까?”
“조금 있으면 일행이 또 올 것이오· 이 인분으로 준비해 주시오· 술도 한 병 내오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음식을 내오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주인이 급히 주방으로 달려갔다·
상인은 미소 띤 얼굴로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 철혈성의 우뚝 솟은 모습이 보인다·
“아주 지랄 같은 곳에 세워졌군·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자신만의 철옹성을 구축해 놨구나·”
상인은 투덜거리며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가 들고 있는 손수건이 금세 흥건하게 젖었다·
그때였다· 객잔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잿빛 피풍의를 걸친 남자였다· 남자는 평범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얼굴에 특징이 없는 그런 밋밋한 인상이다·
상인이 남자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어 여기야·”
남자는 곧장 상인이 있는 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은 정말 평범했다· 만일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어디서 보았어도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상인이 남자를 보며 히죽 웃었다·
“흐흐! 그 얼굴도 잘 어울리는군·”
“그런가요?”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남자의 반응에 상인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들어 남자가 자연스럽게 웃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그에게서는 항상 경직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선 전혀 그런 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에게선 여유가 느껴졌다· 그 어떤 긴장감도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왔네?”
“그런가요? 볼 거 다 보면서 천천히 온다고 왔는데·”
“뭘 봤는데?”
“감숙성 섬서성 산서성 모두 들러 왔습니다·”
“그럼 다 봤겠네?”
남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상인이 다시 물었다·
“어때?”
“예상보다 처참하더군요·”
“그렇지? 아주 지옥이 따로 없어·”
상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이곳 산동성은 전화에서 비껴나 있어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지역은 말도 못하게 처참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를 때 객잔 주인이 주문한 음식을 내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희 구곡객잔의 명물인 어소두부(魚燒豆腐)와 교자입니다· 술은 잘 익은 소홍주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호! 어소두부의 맛이 그럴듯하구먼· 잘 먹겠습니다·”
상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어소두부는 생선과 두부를 함께 넣고 볶는 요리로 섬세한 불 조절이 필요한 요리였다· 특히 신선한 생선이 필수이기에 내륙지방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요리기도 했다·
상인과 남자는 좋은 안주에 술잔을 기울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두런두런 이어졌다· 그들의 대화는 별달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객잔 주인이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상인이 피식 웃었다·
“여기도 마찬가지군· 교남의 주민 전체가 철혈성의 눈과 귀가 되어주고 있어·”
만일 상인과 남자가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게 보였다면 객잔 주인은 그 사실을 철혈성의 누군가에게 전했을 것이다·
“어디나 패자가 상주하고 있는 지역은 똑같더군요·”
“하기는····”
이번엔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그렇게 마시다 보니 소홍주는 금세 동이 났다·
“한 병 더 시킬까?”
“됐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죠·”
“벌써 가려고?”
“시간이 되었으니까요·”
“으음!”
남자가 먼저 자리를 일어나자 상인은 남은 음식을 허겁지겁 입에 털어 넣었다·
“같이 가자고· 제길!”
그는 계산대 위에 동전 몇 개를 남겨둔 채 남자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걷자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으슥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그리 크지 않은 어선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상인이 말했다·
“저 배가 우리를 철혈성에 태워다 줄 거야·”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선에 올라탔다· 그와 상인이 타자 어선은 곧장 바다로 나갔다·
어선이 향한 곳은 바로 철혈성이 있는 욕화도였다·
뱃사람들은 남자와 상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배를 몰 뿐이었다· 조그만 어선은 높은 파도를 헤치고 빠른 속도로 욕화도로 접근했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접촉은 했습니까?”
“응· 군사의 말대로 이미 작업이 끝났더군· 그래도 아직은 좀 망설이는 눈치야· 그 부분은 감안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욕화도가 가까워질수록 상인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어렸다· 가까이서 바라본 철혈성은 실로 거대했다· 욕화도 전체를 뒤덮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성곽과 그 위로 삐쭉 튀어나온 수많은 전각 군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압도하고 있었다·
“후우!”
상인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어선의 선수에 꼿꼿이 서 있었다· 높다란 파도 때문에 어선이 상하로 위태롭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남자의 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아래 남자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심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 녀석·’
맨 처음 그를 봤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시절에도 그는 강했다· 그때도 눈빛만큼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처럼 깊으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삼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거기에 경륜까지 더해지며 여유가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괴물이었는데 시련을 겪으면서 더 강해졌으니····’
상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남자의 행보를 옆에서 지켜봐 왔다·
강호에서 큰 명성을 얻었을 때도 지켜봤고 나락에 빠졌을 때도 지켜봤다· 그리고 지옥과도 같은 진창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기어 나오는 것도 지켜봤다·
남자는 그 모든 시련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했으며 그때마다 더 강해졌다· 삼 년 전에도 강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는지조차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선수에 서서 한참이나 철혈성을 바라보던 남자가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 근육이 미묘하게 움직이며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깊고 유현한 눈동자 그리고 최근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오른쪽 턱과 목을 가로지르는 굵고 선명한 흉터·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는 진무원이 분명했다·
흑암대전 직전 섬서성에서 사라졌던 진무원이 산동성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진무원과 함께 있는 상인의 정체는 바로 청인이었다· 진무원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 역시 사라졌다· 그렇게 그는 세상에서 잊힌 사람이 됐다· 하지만 그는 죽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는 진무원의 곁에서 모든 시련을 그와 함께했다·
청인이 진무원에게 말했다·
“배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야· 이 이상 접근하면 저쪽에서도 알아차릴 거야·”
어선에서 철혈성까지의 거리는 아직 삼백여 장이 넘었다· 어선을 타고서도 한식경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거리였다· 하지만 이 이상 다가가면 철혈성의 경계망에 걸릴 것이 분명했다·
진무원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뭐가?”
진무원이 대답 대신 선수를 박차고 철혈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이십여 장을 날아갔다· 하지만 발밑은 디딜 곳 하나 없이 검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배를 몰던 어부들은 진무원의 몸이 바다에 빠질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진무원은 가볍게 수면을 박차고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청인이 중얼거렸다·
“수상비(水上飛)인가?”
말 그대로 물 위를 질주할 수 있는 극상승의 경공술이 수상비다· 무공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면 어렵지 않게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수면이 잔잔한 호수나 연못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이렇게 불규칙하게 일렁이는 높은 파도 속에서 수상비를 펼친다는 것은 초절정에 이른 고수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진무원은 수면 위를 스치듯 비행하는 제비처럼 순식간에 파도를 헤치고 철혈성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인이 갑판에 털썩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알아서 잘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