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 8장 무너진 하늘 아래 다시금 우뚝 서다 (1)
밀야와 운중천의 전쟁으로 천하 곳곳이 전화에 휩쓸렸지만 단 한 곳 사천성만은 예외였다· 외부에서 접근하기 쉽지 않은 폐쇄적인 지형과 사천성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당문의 기민한 대응 덕분이었다·
당문은 사천성에 같이 터전을 잡고 있는 청성파와 아미파를 설득해 외부로 통하는 관도를 아예 틀어막았다· 그 덕에 관도에서는 연일 격전이 벌어졌지만 사천성 내는 그래도 어느 정도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사천성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검문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됐다· 신분이 불확실한 자들은 아예 사천성으로의 입성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곽문정은 그들의 검문을 간단히 통과했다· 당문과 백룡상단에서 보증한 신분패 덕분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사천성으로 들어온 후에도 곽문정과 한선우의 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당문이 있는 사천성의 성도를 지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은 계속되었다·
곽문정은 한선우의 체력을 감안해 될 수 있으면 천천히 이동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배려를 해줘도 한선우는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다·
체력은 고갈되었고 육신은 피폐해져 몇 번이나 쓰러졌다· 몸살을 앓기 일쑤였고 풍토병에 걸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곽문정은 한선우를 극진히 간호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의 정은 무척 끈끈해졌다· 한선우는 곽문정을 마치 친형처럼 따랐고 곽문정은 그런 한선우를 극진히 아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사천성의 서부 고원 초입에 근접했을 때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다·
“우와!”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한선우가 탄성을 내뱉었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거대한 산들이 마치 파도처럼 끊임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 장엄한 광경에 한선우는 압도당했다· 그 모습에 곽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 역시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한선우와 같은 표정을 짓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천하에 이런 곳이 있었군요·”
“워낙 험한 곳이다 보니 사천성에 있는 사람들도 접근하기 꺼리는 곳이다·”
“그렇겠네요· 누가 감히 이곳에 접근하려 할까요? 이 안에 자리를 잡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천험의 요새나 다름없겠어요· 하지만 누가 있어 이곳에서 살 수 있을까요? 보아하니 물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지·”
곽문정이 미소를 지으며 한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그리운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선우가 그런 곽문정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형?”
곽문정을 믿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이곳까지 따라왔다· 하지만 이런 험악한 곳에 그의 스승이 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가자· 이제 목적지가 머지않았다·”
“응·”
그래도 한선우는 곽문정을 믿었다·
한없이 약하기만 하던 두 다리에도 제법 근육이 붙었지만 험준한 산을 오르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힘들다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두 달간의 고된 여정은 소년의 다리뿐 아니라 가슴도 단단하게 만들었다· 힘들다고 해서 언제까지 곽문정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헉헉!”
한선우의 조그만 입술을 비집고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그는 곽문정을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오르고 또 올랐다· 하루 종일 올랐는데도 오르고자 하는 높이의 반도 못 올랐다· 해가 지자 곽문정은 노숙할 만한 곳을 찾아 모닥불을 피웠다·
마른 건량을 먹고 따뜻한 모닥불을 쐬자 한선우는 금세 수마에 빠져들었다· 정신없이 코를 골며 자던 한선우는 문득 누군가 자신을 안아 든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구나·”
“그렇습니다·”
잠결에 누군가와 곽문정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눈을 뜨려고 했다· 하지만 눈꺼풀이 너무나 무거웠다·
“매우 강한 아이 같구나·”
“맞습니다· 그는 강하면서도 영리합니다· 군사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소중히 키워야 할 재목이구나· 고맙구나 문정아· 이 아이를 내게 데려다 줘서·”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아이와 의형제를 맺었는걸요·”
“그렇더냐?”
“이제부터 선우는 제 동생입니다·”
“동생이 생긴 것을 축하한다· 문주님도 분명 기뻐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의 손이 이마를 쓰다듬는 것을 느끼며 한선우는 다시 싶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 어린아이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으음!”
쏟아지는 햇살이 얼굴을 간질이자 한선우가 몸을 뒤척였다· 잠시 꿈틀거리던 한선우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응?”
그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어젯밤 그는 분명히 산 중턱의 공터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매우 푹신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한선우는 급히 상체를 일으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누워 있는 곳은 모옥 안에 있는 조그만 평상 위였다· 나무로 만든 모옥은 매우 잘 정돈이 되어 있고 한쪽에 있는 화로에서는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로 위에는 주전자가 뜨거운 김을 뿜어내며 끓고 있다· 잠든 사이 누군가 이곳으로 그를 옮긴 것이 분명했다·
“여긴?”
“일어났느냐?”
그 순간 누군가 모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삼십 대 후반이나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장년인이었다· 새하얀 문사복을 입은 장년인은 코와 턱에 수염을 무척이나 멋스럽게 길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담고 있는 듯한 현기 어린 눈동자를 보는 순간 한선우는 본능적으로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스··· 승님?”
“그래 내가 너를 가르칠 것이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정말 스승님이 맞나요?”
“그렇다· 너의 조부님과는 매우 오래전에 교류했었지· 그때의 인연으로 너를 이렇게 제자로 맞이하게 되는구나·”
장년인의 부드러운 미소에 한선우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장년인의 말이 진심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선우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장년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홉 번의 절을 올렸다·
“불초 제자가 스승님을 뵙습니다·”
“앞으로 나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할 자신이 있느냐?”
“천지신명께 맹세코 스승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성심으로 받들겠습니다·”
“나 역시 천지신명께 맹세하겠다·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가르치겠다· 하나 따라오고 못 오고는 너의 노력과 재능에 달렸다· 너는 반드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스승님·”
“일어나거라·”
“예!”
한선우가 몸을 일으켰다· 장년인은 그런 한선우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밖으로 나가자꾸나· 너에게 우리 문파를 보여주겠다·”
“예!”
한선우는 장년인을 따라 모옥 밖으로 나갔다· 문밖으로 펼쳐진 전경을 보는 순간 한선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고원에 둘러싸인 널따란 분지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분지 좌우로는 돌로 만든 집이 가득 들어서 있고 중앙에는 커다란 연무장이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연무장에는 수백 명의 무인이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흐압!”
무인들이 기합과 함께 일제히 전각을 내질렀다· 강렬한 발길질에 대지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진동을 일으켰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느낌에 한선우가 흠칫 몸을 떨었다·
무공이라곤 일초반식도 모르는 한선우였지만 진각에 담긴 맹렬한 기세만큼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수백 명의 무인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합을 딱딱 맞춰 움직였는데 그때마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하늘을 덮었다·
“저들은?”
“우리의 문도이다· 우리 문파의 근간을 이루는 기둥이라 할 수 있지·”
장년인의 음성에는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한선우가 물었다·
“우리 문파라 함은?”
“북천문(北天門)· 우리 문파의 이름은 북천문이다·”
“북천문··· 북천문·”
한선우는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하진월이다·”
장년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삼 년 전 세상에서 사라졌던 하진월이 사천성의 서부 고원에 북천문의 군사라는 신분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현판도 없고 커다란 전각도 없다· 하지만 북천문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무인이 모여 수련하고 있는 모습은 어린 한선우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선우가 하진월에게 물었다·
“북천문은 어떤 문파입니까 스승님?”
“북천문은 백 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른 문파에 비해 긴 역사는 아니지만 그들이 갖지 못한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지·”
“투쟁의 역사?”
“지난 백 년 동안 밀야에 맞서 싸운 강호 최강의 방패가 바로 북천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강하다는 이유로 토사구팽을 당한 비운의 문파이기도 하지· 십여 년 전 북천문은 강호인들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강호를 지켜오던 북천문은 그렇게 갈가리 찢어지고 흩어져 십여 년의 세월을 보냈단다·”
“아!”
한선우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제자의 모습에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안타까워할 필요 없다· 다행히 문주님께서 지난 삼 년 동안 다시 북천문을 일으켰으니까·”
“어떻게요?”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다녀 설득했지·”
“그게 설득한다고 되나요? 십 년이나 흩어져 있었으면 각자 다른 생각을 품었을 텐데요·”
하진월의 미소가 짙어졌다· 거기까지 생각한 제자가 기특한 것이다· 그가 제자로 선택한 아이는 정말로 총명했다· 그 사실이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 네 말처럼 흩어진 제자들은 십 년이란 세월 동안 각자 다른 길을 찾았다· 어떤 이들은 독자적인 야망을 갖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북천문의 옛 영화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 모든 이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 문주님은 어떻게 그들을 설득하신 건가요?”
“문주님에겐 불굴의 의지가 있단다· 그리고 무척이나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지·”
“그럼 무공으로 굴복시킨 건가요?”
“어떤 이들에겐 그렇게 했지· 이제부터 네가 만날 사람들은 문주님께서 그렇게 굴복시키고 충성의 맹약을 받아낸 자들이다·”
“그렇게 강제로 맹약을 받아낸들 그들이 진심으로 충성할까요? 충심으로 따르는 자들도 배신하는 세상인데 하물며 무력에 굴복한 자들이 충성을 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네 말이 맞다·”
하진월이 한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어린 제자는 인간관계를 냉철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책사가 가져야 할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무력에 굴복한 자들이 진심으로 충성하긴 쉽지 않지· 그래서 문주님께선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단다·”
“그게 뭔가요?”
“바로 북천문을 한시적으로만 유지하기로 하신 거지·”
“한시적이라니요? 그럼 일정 기간이 지나면 북천문을 해체하시겠다는 건가요?”
“그렇다· 문주님께서는 일정 조건만 충족되면 북천문을 해체하겠다고 약조하셨다·”
“그 조건이란 것이 뭔가요?”
한선우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어려서부터 천재라고 불리던 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조건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진월이 제자의 질문에 답했다·
“운중천과 밀야의 해체·”
작지만 강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한선우의 가슴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