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 7장 싸우려는 자는 들어오고, 팔려는 자는 나간다 (2)
곽문정은 공진성에게 들은 내용을 함지평에게 모두 말했다· 그러자 공진성도 덩달아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거래 때문에 만난 상인들의 표정들이 다들 심상치 않더구나·”
“그랬군요·”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까지 전화에 휩쓸릴 확률이 높아·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나을 듯하구나· 어차피 거래도 모두 끝났으니 내일 철수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음!”
공진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곽문정을 바라봤다·
마냥 어리기만 하던 곽문정은 이제 한 사람의 어엿한 보표가 되었다· 비록 백룡상단과 관계없이 단독으로 의뢰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축하해 줄 일이었다· 특히 곽문정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봐 온 공진성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밖으로 나온 곽문정은 보표와 상인들에게 공진성의 결정을 알렸다· 그들은 공진성의 결정에 어떤 의문도 보이지 않고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백룡상단의 상인들이 무사히 상행을 마칠 수 있던 것은 공진성의 빠른 결정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공진성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모두에게 공진성의 명을 전하고 거처로 돌아온 곽문정은 곧 검을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유려하게 곡선을 그리는 검신에서는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다른 검들처럼 살벌한 예기를 흩뿌리지는 않았지만 그 오롯한 존재감만으로도 여타 병장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청련(靑蓮) 곽문정이 자신의 검에 붙인 이름이다·
곽문정은 마른 천으로 조심스럽게 청련의 검신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청련이 그의 손길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나직한 검명을 흘렸다·
공력을 주입하지 않았는데도 검명을 흘린다는 것은 청련이 그 자체로 명검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곽문정은 자신에게 명검을 만들어준 이를 떠올렸다·
“형 나 잘할 수 있을까?”
함지평의 의뢰를 받아들였지만 가슴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고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표가 나지 않았지만 지금 곽문정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해 있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빨리 뛰고 머리는 멍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곽문정은 청련을 닦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검을 닦는 것은 곧 마음을 닦는 것·
검은 곧 마음의 투영이다·
마침내 청련의 검신에서 먼지 한 올까지 모두 사라지자 곽문정은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휴!”
곽문정은 청련을 검집에 꽂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부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리를 밝히고 있는 화려한 등불의 행렬이 곽문정의 눈에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처럼 위태하게만 보였다·
다음 날 백룡상단은 새벽에 성화객잔을 떠났다·
올 때와 달리 그들이 끌고 온 마차와 수레는 텅 비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시간을 더 투자해서라도 수레를 가득 채워 나오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상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어떤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마차 위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에 있는 상인 대부분은 벌써 수십 차례 이상 중원을 횡단한 경력이 있었다· 때문에 주위의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면서도 눈치가 매우 빨랐다·
어제와는 다른 공기가 부현을 지배하고 있었다· 경험이 많은 상인들은 그것이 전장의 공기라는 것을 눈치채고 한시라도 빨리 부현을 빠져나가길 원했다·
백룡상단은 부현의 초입에 있는 검문소에 도착했다· 검문소에서는 들어왔을 때 본 무인들이 검문하고 있었다· 검문소의 조장 임상운은 들어오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해 보였다
공진성이 말을 몰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누구? 아 백룡상단이군요·”
임상운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공진성과 백룡상단의 행렬을 훑어보았다·
“벌써 나가시는 겁니까?”
“예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경비만 더 많이 소요되니까요·”
임상운이 마뜩치 않은 시선으로 공진성을 바라보았다·
“흠!”
“왜 그러십니까?”
“방금 전 명령서를 받았습니다· 이제부터 부현 외부로 나가는 자들을 철저히 단속하라더군요·”
“무슨 이유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워낙 갑작스럽게 내려온 명령이라·”
임상운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내려온 명령서 때문에 새벽부터 검문을 두 배 강화해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검문을 강화하라는 명령에 대기시켜 두었던 부하들까지 총동원했다· 그 때문에 부하들의 불만도 극에 달한 상태였다·
“임 대협이 고생하시는군요·”
“고생이랄 것까지 있겠습니까? 그냥 명령을 따르는 것인데· 단지 짜증이 좀 날 뿐이죠·”
“그렇겠습니다·”
“근데 백룡상단도 나가려면 명령서가 철회될 때까지 기다려야겠습니다· 알다시피 운중천의 명령서는 절대적이거든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만일 다른 곳에서 물건을 구입하지 않으면 저희는 큰 손해를 봅니다·”
“사정이야 딱하지만····”
“임 대협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진성이 임상운의 두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임상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촉 때문이다· 들어올 때의 족히 두 배는 됨직한 무게였다·
공진성은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지만 경비에 보태 쓰십시오·”
“크음! 하지만 명령서가····”
“하면 명령서가 전달되기 전에 저희가 빠져나간 것으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공문서 위조····”
갑자기 임상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또 하나의 돈주머니가 쥐어졌기 때문이다· 공진성이 두 번째 돈주머니를 건넨 것이다·
임상운이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그가 두 번째 돈주머니를 받는 모습을 본 수하는 없는 것 같았다·
‘하나는 부하들에게 나눠 주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가지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탐욕의 악마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공진성은 그런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 법·’
그는 돈의 힘을 믿었다· 그래서 그토록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닌가?
“명령서를 받기 전이라····”
“눈만 한번 감아주시면 됩니다·”
“으음! 좋습니다·”
결국 임상운은 돈의 위력에 굴복했다· 그가 부하들에게 검문소를 열 것을 지시했다· 부하들은 그런 임상운의 지시에 어떤 불만도 없었다· 이런 경우 그들에게도 돈 부스러기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임 대협·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럽시다· 돈 많이 버시고 다음에 또 찾아오십시오· 그땐 더 잘해드릴 테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임 대협·”
공진성은 임상운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검문소를 통과했다· 백룡상단이 모두 나가자마자 검문소에는 다시 저지선이 세워지고 삼엄한 경계가 시작되었다·
“휴!”
“살았구나·”
마차에 타고 있던 상인들은 검문소를 완전히 빠져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곽문정의 뒤에 타고 있던 한선우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똑똑하지만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십여 세· 아직은 세상이 두려운 나이였다·
곽문정은 그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자신이야 무공을 익힌 무인이지만 상인들이나 한선우는 자신을 방어할 어떤 무력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돈이라면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지만 그것도 최소한의 질서라는 것이 유지될 때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쩌면 부현에서는 그 최소한의 질서라는 것조차 사라질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문득 곽문정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 앞쪽에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 때문이다·
한눈에 봐도 족히 천여 명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병력이 부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살벌한 기세를 풍기는 무인들의 어깨와 머리에는 뿌연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회색 무복을 입은 열한 명의 무인이 말을 몰고 있었다· 비록 얼굴 전체가 희뿌연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들의 강렬한 눈빛을 가릴 수는 없었다·
“음!”
그들의 강렬한 기도에 선두에 있던 공진성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들의 기도에 압도당한 것은 다른 보표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나운 맹수 앞에 알몸으로 선 것처럼 정신이 다 아찔해졌다· 몸은 푸들푸들 떨려오고 자신도 모르게 이를 딱딱 부딪쳤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공포에 반응하는 것이다·
곽문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누구지 저 정도의 예기를 자연스럽게 흘릴 수 있는 자들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보표로서의 경험은 누구보다 많은 곽문정이었다· 그는 곧 저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척마대 저들은 척마대구나·’
위급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전쟁에 투입되며 각 문파에서 정예 병력을 차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젊은 무인들의 집합체·
흑암대전이라 불리는 삼년전쟁을 통해 부각된 그들의 무위는 실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밀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강호의 무인들에겐 희망의 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투입되었다는 것은 곧 이곳이 지옥이 된다는 것·’
항상 그랬다·
척마대가 투입된 곳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 부현까지 전선이 확대됨을 의미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들이 이곳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결국 함 대협의 걱정이 사실이었구나·’
그 순간에도 척마대가 이끄는 병력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공진성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자는 척마대의 부대주인 좌문호구나·”
척마대의 대주는 심원의였다· 그 밑에는 다섯 명의 부대주가 있었는데 좌문호는 부대주 중 한 명이었다·
좌문호는 특히 잔혹하기로 유명했는데 일단 그의 손에 걸리면 온전한 시신을 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별호조차 혈하광협(血河狂俠)이었다·
피가 흐르는 하천을 만드는 미친 협객·
정도를 지향하는 운중천의 무인답지 않은 광기 어린 별호였지만 좌문호는 그 별호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백룡상단은 서둘러 길옆으로 비켜섰다· 좌문호가 이끄는 척마대는 그렇게 만들어진 길을 당연하다는 듯이 걸어갔다· 그들의 뒤로 천여 명의 무인이 따랐다·
문득 좌문호가 멈춰 섰다· 그러자 뒤를 따르던 모든 행렬이 멈춰 섰다· 좌문호는 살기 어린 눈으로 백룡상단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공진성을 비롯한 보표와 상인들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흉포한 맹수 앞에 선 사슴처럼 그들은 벌벌 떨었다· 좌문호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듯 미소 지었다· 백룡상단 사람들을 훑어보던 좌문호의 시선이 곽문정 앞에 멈춰 섰다·
이제까지 빤히 좌문호를 바라보던 곽문정이 고개를 슬쩍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굳이 이 상황에서 좌문호의 관심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저자 광기에 침습당한 것인가?’
잠깐이지만 곽문정은 좌문호의 눈에 어린 광기와 살기를 놓치지 않았다·
오랫동안 전장을 굴러다닌 자들은 필연적으로 광기에 함몰되게 마련이다· 특히 척마대처럼 무려 삼 년 동안이나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최전선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더욱 광기의 침습을 피하기 힘들었다·
좌문호가 이죽거렸다· 그의 시선은 곽문정의 뒤에 타고 있는 한선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이 좌문호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운이 좋군· 조금 더 남아 있었으면 제대로 된 전장을 경험했을 텐데· 흐흐!”
“아직 명령서가 전달되지 않았나 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저희가 이곳에 온 것이 적들에게 알려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다시 부현으로 집어넣을까요?”
척마대원의 말에 공진성 등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좌문호의 처분만 기다렸다·
“됐다· 그것도 저들의 운· 대신 앞으로는 그 누구도 부현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경계를 철저히 하라·”
“존명!”
좌문호의 명령 하나로 생과 사가 갈렸다·
공진성과 보표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멀어지는 좌문호와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현에 지옥도가 펼쳐지겠구나·”
척마대가 떠난 자리에 누군가의 탄식 어린 음성이 울려 퍼졌다·
부현을 떠난 백룡상단은 오십여 리 떨어진 조그만 야산에 도착했다· 그곳엔 먼저 부현을 빠져나온 함소령과 남명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