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 5장 그래도 괜찮다 (3)
은한설은 무서운 속도로 진무원을 추적해 왔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진무원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진무원의 등 뒤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향한 곳으로 마병 월광륜이 날아왔다· 진무원은 설화를 휘둘러 월광륜을 튕겨냈다·
그들의 질주가 멈춘 곳은 이백여 리 떨어진 커다란 협곡 위 만장단애였다· 운무에 가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만장단애 위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한설·”
진무원이 불렀지만 은한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기에 두뇌까지 완전히 침습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은한설의 눈에는 다른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 맺힌 것은 오직 진무원뿐이었다·
그녀를 보며 진무원은 웃었다·
“보고 싶었다 한설·”
“흐으!”
은한설은 대답 대신 광기를 흘렸다· 월광륜이 여전히 그녀와 진무원 주위를 위협적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름답군·”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문득 은한설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황량하기만 하던 북방의 무너진 장원 그리고 한없이 초라하던 자신의 모습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볼품없던 그 시절에 은한설을 만났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롭기만 하던 그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때는 늘 함께였으니까·
진무원은 은한설을 향해 걸었다·
스릉!
설화는 아예 검집에 집어넣었다· 월광륜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진무원이 다시 은한설을 불렀다·
“한설!”
스걱!
순간 월광륜이 그의 왼팔을 스치고 날아갔다· 살 거죽이 갈라지며 피가 치솟았지만 진무원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은한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넌 그대로구나· 변한 게 없어· 난 이렇게 변했는데·”
“으으!”
은한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무원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날아온 것은 월광륜이었다· 그의 팔목에서 피가 치솟아 올랐다·
진무원은 웃었다·
“난 괜찮아·”
그의 미소에 은한설의 떨림이 커졌다·
쿵!
심장을 큰 망치로 때리는 것 같았다·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은한설이 바닥에 엎어져 꺽꺽댔다· 그러자 월광륜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침내 진무원은 은한설의 앞에 섰다· 은한설이 고개를 들어 진무원을 올려다봤다· 붉게 물든 그녀의 눈 주위로 눈물자국이 남아 있다· 진무원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울려서 미안하다·”
“무··· 원·”
“그래 나 무원이다·”
진무원이 은한설의 조그만 몸을 힘주어 꼭 껴안았다·
“흐윽!”
은한설이 울음을 터뜨리자 눈동자 안에 존재하던 혈점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 순간 월광륜이 마치 발작이라도 하듯이 진무원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아 안 돼!”
은한설이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월광륜은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진무원의 목을 노렸다·
순간 진무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망막 가득 월광륜이 들어왔다· 진무원은 남아 있는 모든 공력을 설화에 집중했다·
“요망한!”
설화가 벼락이 되어 월광륜을 강타했다·
쿠와앙!
“크헉!”
진무원이 피를 토했다· 그가 토한 피가 자신의 가슴과 은한설의 얼굴을 적셨다· 능군휘 덕분에 애써 나아가던 내상이 다시 도졌다· 심맥이 흔들리고 내장이 파열되면서 진무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후두둑!
진무원과 은한설 주위로 부서진 금속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마병 월광륜의 잔해였다· 진무원의 혼신을 다한 일격에 월광륜이 견디지 못한 것이다·
마기의 공급이 끊기면서 은한설의 눈에 어려 있던 혈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광기가 사라지고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진무원의 시선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손에 들린 설화였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설화가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쩌적!
검첨이 먼저 떨어져 나가더니 검신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설화야·”
후웅!
설화가 마지막 검명을 흘렸다·
진무원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화에 한 여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다· 마치 자신은 괜찮다는 듯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그리고 환상처럼 사라져 갔다·
“설··· 화야·”
진무원은 한참이나 설화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이제 설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검의 잔해일 뿐 설화가 아니었다·
부서진 검편은 가루로 변하고 곧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갔다· 진무원은 그런 설화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은한설이 진무원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무원·”
“한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망연히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각자의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이 맺혀 있다·
“무원 나는····”
은한설이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비록 광기에 지배당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상황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진무원에게 상처를 입히고 핍박하던 당시의 기억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진무원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너는 그래도 괜찮아·”
진무원은 미소를 지으며 은한설을 꼭 껴안았다· 그 순간 은한설은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 깨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일순 수십 수백 가지의 감정이 밀려들어 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은한설은 진무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진무원은 하염없이 우는 그녀의 등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은한설이 마녀에서 사람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진무원은 말없이 그녀의 귀환을 반겼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은한설이 고개를 들어 진무원을 바라봤다·
“정말 무원 맞아?”
“그래 나다·”
은한설이 진무원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자신이 월광륜으로 낸 상처이다·
“미안해·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 그래서····”
“알아· 네 탓이 아니야· 너에게 월광륜을 준 자의 잘못이지·”
“아니야· 사부님은····”
“월광륜에 심어진 마기는 애초부터 통제가 가능한 게 아니었어· 당장은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마기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월광륜을 준 자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어·”
직접 월광륜의 마기를 경험해 본 진무원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주인이 통제할 수 없는 무기는 결국 주인을 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죽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실제로 은한설도 그랬다·
은한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사부님은 나를 사랑하셔· 사부님이 설마····”
“그쪽이 말해보시죠·”
진무원의 시선이 반대편 수풀로 향했다·
“무원?”
은한설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수풀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일색의 존재였다·
“사령?”
“소주·”
은한설에게 아는 척을 하는 인물은 바로 사령이었다· 그의 등장에 은한설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녀가 진무원과 사령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죄송합니다 소주·”
“사령?”
“주군의 명이었습니다·”
“무슨?”
“월광륜이 소주를 잠식하게 내버려 두는 것 그래서 광기에 휩쓸리게 하라는 것이 주군의 명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은한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죄송합니다 소주·”
“그래서 한설을 공격한 것인가? 그녀의 광기를 폭발시키기 위해·”
진무원의 나직한 목소리에 사령이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진무원과 처음 만났을 때 은한설은 제정신을 차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사령이 은밀히 암기를 날렸다· 그의 공격이 은한설의 광기를 폭발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은한설이 소리쳤다·
“대체 왜?”
“죄송합니다 소주·”
“사령? 제발!”
은한설의 절규에 사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 온 사령이다· 아주 어린 꼬마 시절부터 숙녀로 변해가는 모습을 봐왔고 무공을 익히면서 힘들어하는 모습 즐거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옆에서 지켜봤다· 그래서 누구보다 그녀에게 정이 깊은 사령이었다·
그런 그에게 주군은 은한설의 광기를 폭발시키라고 했다· 그녀를 이용해 중원에 혼란을 불러오라고 했다·
지금도 주군의 명령이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소금향의 명은 곧 천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진무원이 은한설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한설의 사부도 모용율천과 관련이 있던가?”
“····”
“역시 그렇군· 한설은 희생양이었군· 밀야의 공포를 조장하는 희생양· 그녀를 이용해 중원의 공포를 증폭시키고 내부 단합을 유도하려 했군·”
진무원의 말에 사령이 살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령의 모습에 은한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말이야?”
“죄송합니다 소주·”
“정··· 말이구나·”
은한설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세상이 부서지고 있었다· 진실이라 믿고 있던 것은 모두 거짓이었고 부모 대신이라고 생각하던 사부는 그녀를 희생양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사령의 살기가 진무원을 향했다·
“역시 당신이 문제였군요·”
모든 것이 진무원 때문이다· 진무원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은한설이야 악명을 얻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무원으로 인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은한설의 눈에 불신의 빛이 어렸다· 그 빛은 사령이 뭐라 말하든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령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사령이 진무원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현재 진무원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지금이라면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진무원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사령의 예상처럼 진무원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사령의 살기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 순간 은한설이 진무원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서십시오 소주·”
“안 돼 사령·”
“소주!”
“칠 년 만이야· 그 긴 시간을 돌아 겨우 만났어·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
그가 은한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십시오 소주· 그럼 그를 살려주겠습니다·”
“정말이야?”
“저를 믿으십시오·”
“그럼····”
은한설의 동공이 흔들릴 때 갑자기 진무원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무원?”
“나를 위해서 그럴 필요 없어· 그는 절대 나를 살려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젠 헤어지지 않겠다· 절대로!”
진무원의 말이 천둥처럼 크게 은한설의 귀에 울렸다· 은한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무원의 목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사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크으으!”
그가 살기를 피워 올릴 때 진무원이 갑자기 발을 들어 바닥을 쿵 찍었다· 그러자 그들이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금이 쩍 가기 시작했다·
“무슨?”
사령이 의문을 표하는 그 순간 진무원이 다시 혼신의 힘을 다해 진각을 굴렀다·
쾅!
순간 절벽의 일각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설화와 월광륜이 격돌한 충격으로 약해져 있던 지반이 더 이상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는 것이다·
사령이 은한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소주!”
“미안해 사령·”
은한설이 그의 손을 거절했다·
그녀는 오히려 진무원의 목을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생사를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사령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에도 진무원과 은한설이 서 있는 절벽의 붕괴는 가속되고 있었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사령의 목숨마저 위험했다·
사령은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진무원과 은한설이 서 있던 만장단애가 붕괴를 일으켰다· 진무원과 은한설의 모습이 거대한 바위더미와 함께 운무 밑으로 사라졌다·
“소주·”
사령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