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 4장 어떤 만남은 폭풍을 몰고 오기도 한다 (2)
은마상단과 헤어진 후 그녀는 계속 혼자였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에 그녀는 홀로 걸었다·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늘 혼자였다· 사부 소금향이 잘해주긴 했지만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적었다· 소금향은 무공을 전수해 주고 성취를 확인할 때나 간혹 모습을 보였었다· 그 때문에 은한설은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문득 은한설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언제부턴가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변에 그들을 위협할 만한 존재가 있기에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은한설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불청객들인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숲 속에서 일단의 무리가 뛰어나왔다·
승도속(僧道俗) 복색만큼이나 각양각색의 무리였다· 하나같이 정련된 기도를 발산하는 무인들의 등장에 은한설이 살짝 인상을 썼다·
‘추적자들이구나·’
무리의 선두에 있는 자들은 그녀가 상대한 종남파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종남파의 무인이 소리쳤다·
“마녀야 이대로 도주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전 중원이 네년을 뒤쫓고 있다! 중원 어디에도 네년이 머물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와아! 마녀를 척살하라!”
무인들이 함성과 함께 은한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은한설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무한한 증오의 빛이 담겨 있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들은 이러는 것일까? 정말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단지 진무원을 만나기 위해 중원행을 택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자신을 마녀라 부르며 핍박하고 있다·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살심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됐다· 품속에 간직한 월광륜이 주인의 심령과 동조해 살기를 흘려냈다·
“마녀? 그래 나는 마녀다· 백야의 마녀· 어쩌면 그게 나의 본성일지도·”
은한설의 몸 주위로 은백색의 구체가 형성됐다· 은혼기가 발현된 것이다· 은혼기로 몸을 감싼 채 은한설이 군웅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콰우우!
은백색의 강기가 폭풍이 되어 군웅들을 덮쳤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비명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죽음이 난무했다· 어렵게 피워낸 생명들이 허무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적들은 더욱 악에 받쳐 은한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의미 없는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은한설의 입장에서 보면 그랬지만 군웅들의 입장에서는 영광스러운 죽음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얼굴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집단의 광기는 죽음마저 불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운 빛이 떠올랐다· 그들이 아무리 두드리고 검을 휘둘러도 저 은백색의 구체는 절대 깨어지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은한설의 몸을 휘감고 있는 은백색의 구체는 완벽한 공방 일체의 도구였다· 적들의 공세로부터 은한설을 지키는 방패가 되었다가 순식간에 저들의 목을 베는 칼로 돌변했다·
후두둑!
피비가 내리고 있다·
처음엔 기세 좋게 달려들던 군웅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으으으!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
“마녀의 기세가 실로 무섭구나·”
그제야 은한설이 몸을 둘러싸고 있던 은혼기를 거둬들였다· 그러자 그녀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렇게 많은 이에게 죽음을 내렸건만 그녀의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까지 보였다·
두렵고 무서워서 몸이 떨렸다· 하지만 누구 한 명 선뜻 도주하지 않았다· 집단의 광기에 취해 아직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은한설을 둥글게 포위한 채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우우!”
그때였다· 갑자기 창공에 누군가의 사자후(獅子吼)가 길게 울려 퍼졌다· 웅혼한 공력이 담긴 사자후는 군웅들의 가슴속에서 꺼져가던 전의를 다시 되살렸다·
군웅들이 갑자기 용기백배해 소리쳤다·
“지원군이 온다!”
“마녀를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에게 지원군이 온다!”
“와아아!”
그사이 사자후의 주인은 무서운 속도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저 멀리 한줄기 점처럼 보이던 인물이 급속도로 커져갔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군웅들이 열광했다·
“창천고성이다!”
“담 소협이 우리를 구원하러 왔다! 와아아!”
사자후를 터뜨리며 달려오는 무인은 담수천이 분명했다· 푸른 장삼을 흩날리며 달려오는 그의 모습은 천장(天仗)을 연상케 했다·
은한설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런 담수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칠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담수천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단축해 온 담수천이 마침내 은한설의 앞에 섰다· 그는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과 참혹한 현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늦었군·”
“잘 오셨소이다 담 소협· 저 마녀가 아무런 죄도 없는 군웅들을 주살하고 있소· 어서 마녀를 막아야 하오·”
담수천을 맞이한 이는 종남파의 무인이었다· 담수천은 그의 얼굴에 가득한 공포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저 마녀가 미쳐 날뛰고 있소이다· 이대로 놔두면 중원을 혈겁으로 물들일 것이오·”
종남파의 무인은 은한설의 악행을 횡설수설 떠들었다·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수십 수백 배 과장했지만 본인은 인식하지 못했다·
담수천의 시선이 은한설을 향한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은··· 소저군요·”
비록 칠 년이란 기억의 공백이 있었지만 그는 단숨에 은한설을 알아봤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백인비무행· 그 끝자락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은한설이었다· 그는 아직도 진무원의 곁에 있던 은한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칠 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은한설이 조그만 입을 열었다·
“담수천·”
“역시 맞군요· 강호에 출현한 마녀가 당신이라니·”
“난 마녀가 아니야·”
“그럼 이 잔혹한 손속은 뭡니까?”
“그들이 먼저 공격했으니까·”
“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먼저 공격했단 말입니까?”
은한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담수천은 그녀의 말을 믿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때 종남파의 무인이 담수천의 곁에서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그녀의 손에 죽은 자의 수가 벌써 백여 명이 넘습니다·”
“맞습니다· 그녀는 중원의 재앙이 될 겁니다·”
다른 무인들이 그에 동조하면서 다시 장내가 시끄러워졌다· 담수천은 그들이 잠시 조용해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은한설에게 물었다·
“은 소저가 속한 문파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왜?”
“최소한 은 소저의 신분을 정확히 알아야 저들을 설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담수천은 은한설의 몸 안에 갈무리된 막대한 기운을 꿰뚫어 보았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감히 감당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힘이 그녀의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문파에서나 평범한 과정을 통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이다· 그런 힘을 가진 존재가 평범할 리 없었고 평범한 문파의 소속일 리도 없었다·
“난 그들을 설득할 생각이 없어·”
“그럼 이렇게 계속 피를 보겠다는 겁니까?”
“그들이 날 막지 않으면 피를 볼 일도 없어·”
“은 소저는 무척이나 광오하시군요·”
“내가?”
“칠 년 전에도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지금 보니 제 예상보다 더 광오한 것 같습니다·”
“····”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대로 몸을 돌려 오신 곳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럼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나 담수천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그럴 수는 없어·”
“진 소협 때문입니까?”
은한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담수천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칠 년 전에도 은한설은 진무원의 곁에 꼭 붙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운중천에는 진무원이 있었다· 은한설이 진행하는 방향에는 바로 운중천이 있었다·
“왜 진 소협을 찾아갑니까?”
“그야 만나야 하니까·”
“그러니까 왜?”
“당신은 꼭 무슨 이유가 있어야 돼? 그냥 내 마음이 그렇게 시켜서 그래·”
“마음이 시켜서 그런다?”
담수천의 미간에 파인 골이 더 깊어졌다·
은한설의 말이 왠지 그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이제 비켜줬으면 좋겠어· 시간이 없거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강행하겠다면 이 많은 사람을 죽인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게 내 입장입니다·”
“무슨 자격으로?”
“난 담수천입니다· 내 이름 석 자만으로도 그럴 만한 자격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무섭도록 광오한 말이었지만 또한 담수천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최소한 이 자리에 있는 군웅 중 담수천의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었다·
“당신의 이름이 중원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나에겐 통하지 않아·”
“그거 아쉽군요· 하나 제 말을 믿는 게 좋을 겁니다·”
담수천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쭉 폈다· 그러자 은한설은 마치 거대한 철벽이 자신의 앞을 가로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담수천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은한설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무인들은 그런 담수천의 존재감에 용기를 얻었다·
자신의 적에게는 엄청난 위압감을 주지만 같은 편에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방패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담수천이었다·
잠시 담수천을 바라보던 은한설이 그 조그만 입을 열었다·
“나도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비켜줘· 난 무원을 만나야 해·”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그를 만나야겠다면 차라리 항복하십시오· 그럼 제가 진 소협을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결국····”
은한설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까지 주고받던 모든 대화는 의미 없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은한설이나 담수천 모두 결코 자신의 의견을 쉽게 접는 이가 아니었다·
가야 하는 자와 막으려는 자 모두 서서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가공할 패력이 외부로 발출되며 군웅들의 심령을 압박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니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군웅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감히 자신들이 끼어들 판이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은한설의 동체가 은백색의 기류에 휩싸이며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은백색으로 변해갔다· 그런 은한설의 모습에 담수천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았다·
‘분명 저런 무공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어두운 하늘에 푸른 바람이 부니 검은 그림자가 세상에 드리워진다[靑風魔影]·
검은 날개가 펼쳐지니 신창이 빛을 발하는구나[黑翼神槍]·
악마의 도끼가 산을 쪼개니[破山魔斧] 어두운 밤을 밝히며 마녀가 노래하도다[白夜魔女]·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전설의 한 자락 사대마장의 이야기였다·
밀야의 야주를 보좌하는 네 명의 마장· 중원엔 공포의 대상이었고 밀야에게는 든든한 철옹성과 같던 존재들·
어린 시절 그의 웅지를 자극하던 그 전설이 떠올랐다·
“백야마녀 은 소저가 당대의 백야마녀였군요·”
“헉! 백야마녀? 정말 백야마녀란 말인가?”
담수천의 발언에 군웅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녀라는 명목으로 은한설을 몰아붙이긴 했지만 설마 그녀가 밀야의 전설이라는 백야마녀일 줄은 정말 몰랐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담수천을 믿고 은한설을 핍박하던 군웅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만큼 중원의 무인들이 사대마장에게 느끼는 공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자신의 발언이 뜻하지 않은 반응을 불러왔지만 담수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오히려 강한 투지를 느끼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대마장의 전설에 공포를 느꼈지만 그는 언제고 그들을 넘어서겠다는 웅지를 키워왔다· 그리고 오늘 전설의 일각과 조우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전설의 일각을 깨부술 천재일우의 기회·
담수천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며 그의 몸이 서서히 하얀색 빛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