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 4장 어떤 만남은 폭풍을 몰고 오기도 한다 (1)–>
“허!”
추레한 노인이 진무원의 모습을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걸레를 연상시키는 옷 쪼가리를 걸친 노인은 바로 능군휘였다· 그가 진무원을 구한 것이다·
그의 앞에 있는 진무원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일단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외상이 스무 곳이 넘었고 치명적이라고 짐작할 만한 곳이 여섯 곳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런 외상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바로 내상이었다·
진무원의 내부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심맥은 엉망으로 꼬이고 기혈은 들끓고 있었다· 전신의 진기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이 당장에라도 운기요상을 해도 완치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을 몇 번 잃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도 진무원은 눈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도 진무원은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안 된다· 당장 운기요상을 하면서 내상을 다스려야 한다·”
“가면서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죽는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그녀가 위험합니다·”
“지금은 네 몸 상태가 더 위험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절대 괜찮지 않다·”
능군휘가 일어서려는 진무원의 어깨를 짓눌러 앉혔다· 중상을 입은 진무원은 반항하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능군휘가 품에서 황금색 박에 싸인 단환을 꺼내 진무원의 입에 물렸다·
“이건?”
“그냥 복용하거라·”
그는 진무원이 반항할 틈도 주지 않고 명문혈에 장심을 붙였다·
진무원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장심이 맞닿은 명문혈을 통해 막대한 공력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 왔기 때문이다·
“어서 운공하거라· 시간이 없다·”
능군휘의 다급한 목소리에 진무원이 눈을 감았다· 이 이상 반항하면 자신과 능군휘의 목숨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눈을 감고 만영결을 운용했다· 그러자 복용한 단환이 순식간에 녹아 그의 몸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능군휘가 복용시킨 것은 소림의 명약인 대환단(大還丹)이었다· 단번에 삼십 년 이상의 내공을 증진시키며 그 어떤 상처라도 순식간에 낫게 한다는 소림의 비전 명약이었다·
대환단의 효능이 흡수되며 꼬여 있던 심맥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들끓던 기혈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창백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의 귀로 능군휘의 음성이 흘러들어 왔다·
“운공하면서 듣거라· 너도 이젠 진실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작금의 천하를 지배하는 곳은 운중천이 아니다· 운중천의 배후에는 그가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운중천의 많은 이가 그의 영향을 받는다·”
‘그가 누굽니까?’
입을 열 수 없기에 진무원은 마음으로 물었다· 능군휘는 그의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이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모용율천· 나와 같은 아홉 하늘에 속해 있지만 그보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자다·”
무적수사(無敵修士) 모용율천·
무적세가라 불리는 모용세가의 가주이자 아홉 하늘의 일좌를 차지한 남자· 세상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은둔자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진무원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자 능군휘가 공력을 더 주입하며 진무원을 안정시켰다·
“모용율천은 실로 무서운 자다· 세상은 그의 무위를 다른 아홉 하늘과 똑같은 정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나를 비롯해 다른 아홉 하늘은 모두 그에게 패한 전적이 있다·”
“····”
진무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쉽게 믿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 내 말은 사실이다· 나 역시 그에게 도전했다가 오십여 초 만에 패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단지 어떤 이들은 더 오래 버티고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
‘풍운번주 능군휘가 겨우 오십 초밖에 버티지 못했단 말인가?’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에 진무원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믿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사자인 능군휘가 하는 말이다·
“모용율천에게 패한 자 중 몇몇은 자존심 때문에 세상사에 무관심한 척 겉돌기 시작했지· 나 역시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반대로 몇몇 이는 모용율천의 이상에 적극 동조했다· 무당파의 적엽 진인이나 서문세가의 서문화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지· 모용율천은 겉도는 인물들에 대한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한번 꺾인 이가 다시 도전할 마음을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몸과 마음이 완전히 굴복한 다음에는 말이다· 모용율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용율천은 아니 모용세가는 오래전에 깨달았다· 강호를 지배하기 위해선 군웅들의 관심 어린 시선에서 한발 빗겨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운중천을 만드는 것을 주도했고 다른 아홉 하늘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집중될 시선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군웅들의 불만이 고조될 때쯤 밀야를 등장시켜 모든 분노를 그쪽으로 쏟아내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음지에서 강호를 교묘하게 지배해 왔지· 모든 비난에서 한발 빗겨난 채 말이다·”
진무원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자 능군휘가 더욱 공력을 강하게 밀어 넣었다·
“모용율천은 네 아비 진관호를 미래의 위협이라고 판단했다· 모용세가와 그의 아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위험 요소라고 생각한 것이지· 그래서 운중천을 이용해 북천문을 멸문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네가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른 것이다·”
“····”
“너는 너무 일찍 네 자신을 드러냈다· 너에게 다음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 그런 기회를 얻는다면 부디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거라·”
“····”
“미안하다· 더 이상 도와주지 못해서·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능군휘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진무원은 평생을 당당하게 살아온 노강호에게 단 하나 남은 미련이었다·
마침내 대환단의 약력이 진무원의 몸에 모두 녹아들었을 때 능군휘는 명문혈에서 장심을 뗐다· 그 직후 진무원이 눈을 떴다·
아직 외상은 그대로였지만 엉망으로 망가졌던 내부는 어느 정도 치유가 된 상태였다· 전력을 다하기엔 아직 무리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진무원이 몸을 일으켰다·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상관없다· 그 말을 들으려고 도운 것이 아니니까·”
“제가 어떻게 하길 바랍니까?”
“부디 은인자중하거라· 지금까지처럼 좌충우돌하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모용율천의 아성을 깰 수 없다· 참고 또 참아라· 그리고 단 한 번의 기회가 왔을 때 놈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
능군휘가 미소를 지었지만 진무원은 그러지 못했다·
상상도 못한 진실이 거대한 바위가 되어 그의 양쪽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제 가거라· 구해야 할 사람이 있지 않느냐? 네가 지체하는 만큼 위험은 더 커질 것이다·”
진무원은 능군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능군휘는 멀어지는 진무원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나오게·”
“····”
“다 구경했지 않은가? 어서 나오시게·”
그러자 수풀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도사 복장을 한 사십 대 중후반의 남자였다·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 아래 위치한 자줏빛 안광이 마치 사람의 심혼을 꿰뚫을 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적엽·”
“어리석은 선택을 했군 군휘·”
중년 도사의 도명은 적엽 진인이었다· 능군휘와 함께 아홉 하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검의 하늘이 바로 그였다·
“어리석은 선택이라····”
“자네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고 있는가?”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을까·”
“어리석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네·”
“그게 무엇인가?”
“오늘의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하는가?”
“그동안 너무나 오래 나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네· 지금까지 나의 삶은 진실된 것이 아니었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싶지는 않네· 그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일세·”
능군휘는 미소를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그의 미소에 적엽 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군휘·”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다네 적엽·”
능군휘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그는 누더기처럼 해진 겉옷을 뒤집어 지팡이에 매달았다· 그러자 그의 기도가 일변했다·
순간 적엽 진인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풍운번(風雲幡)·”
저 낡은 지팡이에 누더기 같은 겉옷이 더해지면 풍운번이 된다· 능군휘에게 풍운번주라는 별호를 얻게 해준 신물이자 절대의 무기였다·
풍운번을 든 능군휘의 모습은 더 이상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꾸부정하던 허리는 꼿꼿이 펴지고 전신에서는 절대자의 기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막아야겠다는 것인가?”
“자네한텐 미안하네· 하지만 이것이 나의 결심이고 나는 더 이상 결심을 번복할 생각이 없네·”
“그 결정 후회하게 해주지·”
스릉!
적엽 진인이 허리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검의 손잡이엔 선명한 두 글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무도(無道)·
도(道)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름의 신검·
언뜻 보면 도가를 부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이상의 가르침을 담고 있었다·
적엽 진인이 검으로 능군휘를 겨눴다· 그러자 능군휘는 날카로운 검이 자신의 몸을 산산이 해체하는 듯한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검과 몸의 구별이 없고 적엽 진인의 의지가 곧 검의 의지였다·
능군휘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놀고 있지만은 않았군·”
“흥!”
적엽 진인이 코웃음을 치며 능군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치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처럼 그는 순식간에 공간을 단축해 왔다·
순간 적엽 진인의 몸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 팔구 세 정도로 되어 보이는 소동이었다·
적엽 진인처럼 검을 들고 있는 소동의 몸은 반투명했다·
“양신(陽神)인가?”
능군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흔히 신선의 경지에 달한 자들은 몸 안에 또 하나의 자신을 키운다· 정기신(精氣神)이 응축된 순수한 내력의 집합체이자 의지가 지배하는 또 하나의 육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를 버리고 양신으로 갈아탈 때 비로소 신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었다·
소동은 적엽 진인이 키운 양신이었다· 하지만 신선들이 일반적으로 갈아타는 양신과는 달랐다·
일반적으로 양신을 이루는 순간 신선들은 세속에 대한 욕망을 끊고 순수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적엽 진인은 세상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끊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양신에는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었다·
신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 이른바 반양신(半陽神)이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결코 양신에 뒤지지 않았다·
하나의 의지가 지배하는 두 개의 육체 적엽 진인과 반양신이 능군휘를 합공해 왔다·
순간 능군휘가 풍운번에 공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깃발이 철판처럼 딱딱하게 변하며 적엽 진인의 검로를 차단했다·
쩌엉!
검과 번(幡)이 격돌했는데 쇳소리가 울려 퍼지며 방원 십 장이 초토화되었다·
적엽 진인과 능군휘는 서로를 향해 살초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주위를 반양신이 맴돌았다·
아홉 하늘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신검과 풍운번은 그렇게 이름 모를 숲 속에서 격돌했다·
☆ ☆ ☆
걸음을 옮기는 진무원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운중천 밀야 아홉 하늘 그리고 모용율천의 이름이 연이어 떠올랐다·
“무적세가 모용율천····”
머릿속에 뇌성벽력이 울려 퍼지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수많은 생각이 한데 뒤섞여 냉철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진무원은 억지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놔뒀다·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에서 명멸했다· 상념이 가지를 뻗치고 또 다른 가지를 만들어냈다·
이제까지 모호하게만 보이던 부분들이 이해가 되었다· 마치 개안을 새로 한 듯한 기분이다·
“모용세가와 모용율천은 그렇게 강호를 지배하고 있었구나·”
그 치밀함과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대계에 온몸에 전율이 다 일었다·
“모용율천 다른 아홉 하늘조차 굽어보는 하늘 위의 하늘· 나는 더 강해져야겠구나·”
진무원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