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8장 착한 자는 오지 않고, 온 자는 결코 착하지 않다 (3)
“조장·”
엽월과 함께 북천문으로 돌아온 장패산을 제일 먼저 맞이한 이는 바로 소무상과 원적심이었다·
엽월과 함께 있는 장패산의 모습을 본 소무상의 눈에 언뜻 살기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지만 장패산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의기양양해서 떠들었다·
“부조장 오늘 할 말이 많으니까 이따가 다들 내 방으로 모이라고 해·”
장패산이 소무상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고는 북천문 안으로 들어가자 그 뒤를 원적심이 급히 따랐다·
소무상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등 뒤에서 엽월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외면할 텐가? 이젠 서로 아는 척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순간 소무상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그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엽월을 바라봤다·
“무상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이곳에 있었군·”
“엽월·”
“하하! 잘 지냈는가 나의 오랜 친구여?”
“친구? 아직도 내가 너의 친구인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던 소무상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반대로 엽월의 입가에는 한줄기 조소가 어렸다·
“십 년을 우정을 나눈 사이가 아닌가? 나는 아직도 우리가 친구라고 믿는다네·”
“그래서 친구라 믿는 사람의 여자를 빼앗았던가?”
“자네도 알다시피 그녀와 나는 집안이 맺어준 사일세·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선택의 여지가 없어? 지금 나를 기만하는 건가? 네가 그녀의 집안에 압력을 넣은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소무상의 화가 폭발했다·
일단 화가 폭발하자 이성은 저 멀리 날아갔다· 그가 섬전처럼 검을 뽑아 날렸다·
챙!
하지만 엽월은 너무나 여유롭게 소무상의 검을 받아냈다· 소무상은 폭풍처럼 엽월을 향해 검을 휘몰아쳤다·
“자네는 여전하군·”
엽월이 소무상의 검을 일일이 쳐내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소무상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그는 청운검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카카캉!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소무상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청운검법을 펼쳤지만 엽월의 옷자락 하나 스치지도 못했다·
“여전히 발전이 없어·”
“닥쳐랏! 엽월!”
엽월의 조롱기 어린 말에 소무상이 그나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았다· 그는 청운검법에서 가장 살기기 짙은 초식인 일검단운(一劍斷雲)을 펼쳤다·
쉬아악!
검기가 폭죽처럼 터져 나오며 엽월의 전신 요혈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엽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챠핫!”
그의 검에서 붉은 검기가 피어올랐다· 소무상의 검기보다 더욱 또렷하고 선명한 붉은 검기가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챙강!
“큭!”
소무상이 탁한 신음성을 내뱉었다· 십 년을 넘게 써온 애검은 두 동강이가 났고 왼쪽 어깨에는 엽월의 검이 꽂혀 있다· 한 치만 더 오른쪽으로 찔렀다면 생명이 위험할 뻔했다· 하지만 소무상은 그것이 행운이 아니라 엽월이 손속에 사정을 둔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아프고 괴로웠다·
“겨우 외당무사들이나 익히는 청운검법으로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다네· 그래도 옛정을 봐서 손속에 사정을 두었으니 며칠 치료하면 금방 나을 걸세·”
“크윽!”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 없네· 애당초 자네와 난 출발점이 다르니까·”
소무상을 위로하는 엽월의 어투에는 조롱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천애고아인 소무상에 반해 엽월의 집안은 꽤나 큰 상단을 소유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었고 인생의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렇게 판이하게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것도 어찌 보면 운명이었다· 우연히 만났지만 묘하게 마음이 맞아 몇 년을 함께 지냈다· 그런 그들이 갈라지게 된 것은 서유란이라는 여인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서유란은 강소서가(江蘇徐家)라는 몰락한 가문의 장녀였는데 굉장히 현명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소무상과 서유란은 처음 본 그 순간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미래를 약속했지만 그들 사이에 엽월이 끼어들면서 운명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소무상이 반한 것처럼 엽월 역시 서유란에게 반했다·
엽월은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어내는 성격이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몰락한 강소서가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고 엽월의 집안은 돈이 무척 많았다· 강소서가는 자금 지원의 대가로 엽월과 서유란의 혼인을 허락했다·
소무상이 분노했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평범한 외당무사에 불과했으니까· 결국 그는 쫓기듯 이곳으로 밀려났고 엽월은 서유란과 혼인했다·
그 후 엽월은 사사천의 소천주인 심원의의 눈에 들어 전호대에 발탁됐다· 그야말로 탄탄한 미래가 보장된 셈이다· 전호대에서 최고의 무공을 익힌 그와 소무상의 무위는 결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엽월이 검을 거두며 말했다·
“아 자네 상관이 이제부터 우리 주군을 따르기로 했네·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꽤 자주 보게 될 걸세· 그러니 조금만 성질을 죽이라구· 언제까지 이렇게 칼부림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 그게 정말이냐?”
“주군 앞에 오체투지를 하더군· 꽤 인상적이었어·”
“으득!”
소무상이 배신감에 이를 뿌득 갈았다· 설마 장패산이 직접 심원의를 찾아가 충성을 맹세할지는 몰랐다· 심원의와 엮이게 되면 엽월과도 계속 얽히게 된다· 그것은 결코 소무상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더 이상 비참해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소무상이 힘없이 돌아섰다· 그런 그의 뒤에 대고 엽월이 말했다·
“그거 아는가? 먼저 혼인을 원한 것은 내가 아니었네· 바로 그녀였네·”
소무상의 걸음이 딱 멈췄다·
“거짓말하지 마라 엽월·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이제 와서 내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녀는 자네의 생각처럼 그렇게 청순하거나 순진한 여인이 아닐세· 그녀는 무척이나 야망이 컸지· 그녀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 줄 발판으로 나를 원했네· 내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곰곰이 잘 생각해 보면 금방 사실이란 것을 알 수 있을 게야·”
그 말을 끝으로 엽월이 뒤돌아서 멀어져 갔지만 소무상은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메아리처럼 엽월의 마지막 말이 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이다· 그녀가 어찌····”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녀가 보이고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몸은 이역만리 도망쳐 와 있는데 마음은 아직까지 그녀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다·
엽월의 말처럼 장패산은 삼조를 모두 모은 후 자신이 심원의를 따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향이 그립던 이들은 장패산의 말에 환호했다·
☆ ☆ ☆
심원의 일행이 들어온 이후 진무원은 될 수 있으면 외출을 자제하고 만영탑 안에서 하루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만영탑 정상에서 새벽에 동이 터 오르는 것을 보며 만영결을 익혔고 지하에서 녹초가 될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진도가 막힐 때면 공방에서 하루 종일 망치질을 하며 검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두문불출하던 진무원이 오랜만에 외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만경각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만영결이 막힐 때면 만경각에서 해답을 찾곤 했다· 오늘도 그는 해답을 찾기 위해 만경각을 찾았다·
“휴!”
만경각 문을 연 진무원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찾은 만경각은 엉망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작심을 하고 뒤진 듯 서가에 꽂혀 있던 책이 바닥에 모조리 떨어져 있었다·
“또 시작이군·”
진무원은 자조 섞인 미소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서책을 주워 일일이 서가에 꽂기 시작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원의의 짓이겠지·’
이곳에 처음 온 자들은 하나같이 그랬다· 진무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가 혹시라도 몰래 다른 무공을 익힌 것인지 알아내려 했다·
진무원이 만영탑 밖으로 나온 그 순간부터 감시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마치 장패산이 처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런 과도한 관심은 곧 시들해질 것이고 진무원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정리가 끝난 후 진무원은 서책을 몇 개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서책에 집중했다· 일단 한번 집중하면 세상이 뒤집어져도 모르는 진무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서책을 읽었다· 그렇게 얼마나 읽었을까· 진무원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사위가 컴컴했다· 어느새 해가 진 것이다·
“집중력이 대단하시네요·”
갑자기 만경각 입구에서 낯선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의외의 목소리에 놀란 진무원이 고개를 돌리니 늘씬한 교구의 여인이 문가에 기대서 있다·
“당신은?”
“진 공자님·”
약간은 수줍은 듯 미소를 짓는 여인은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진무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엔 어쩐 일로?”
“저희가 갑자기 와서 많이 놀라셨지요? 예가 아니라 생각되어 사과하려고 찾아왔어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이젠 제법 익숙하니까요·”
“그런가요?”
서문혜령이 진무원을 향해 다가왔다· 진무원은 사뿐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이 꼭 나비 같다고 생각했다· 서문혜령의 걸음걸이 하나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기품이 담겨 있었다·
서문혜령이 진무원이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서책을 집어 들었다·
“황정담록(黃政談錄)? 설마 이 책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요·”
“황정담록을 압니까?”
진무원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서문혜령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이백 년 전의 대석학인 황허 선생과 정명 선생의 논담이 적힌 서책 아닌가요?”
서문혜령의 말처럼 황허와 정명은 이백 년 전의 대석학이다· 그들은 도교와 불교 유교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자랑했는데 무척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논쟁을 벌이곤 했는데 그 살벌함이 무인들 간의 비무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들의 논쟁을 기록한 서책이 황정담록이었는데 이백 년이 흐른 지금에는 그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꼭 한번 보고 싶은 서책이었는데 서문세가의 힘으로도 구할 수가 없더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이 책을 빌려가도 될는지요? 고이 보고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어차피 저는 다 읽었으니까요·”
진무원의 대답에 서문혜령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고마워요· 솔직히 뜻밖이네요·”
“뭐가 말입니까?”
“저는 진 공자님이 저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희 조부님이 운중천의 아홉 하늘 중 하나니까요· 귀제갈 서문화 그분이 제 조부님이세요· 혹시 모르셨나요?”
“알고 있습니다·”
진무원이 담담히 대답하자 서문혜령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무원의 입장에서 보면 서문화는 북천문을 몰락케 하고 아비를 자결하게 만든 불공대천지 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렇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서문혜령에겐 꽤나 신기하게 보였다·
“설마 모든 은원을 잊었다고 말할 건가요?”
“설마요· 어떻게 그 일을 잊을까요·”
“그럼?”
“그냥 체념했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군요· 제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힘이 없어서 참는다 이 말인가요?”
“그게 정답에 가깝겠군요· 보다시피 재물도 제대로 된 무공서 하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몰락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그냥 앞으로도 서책이나 보고 살아가려 합니다·”
“만일 힘이 생기면요?”
“그럴 리도 없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네요·”
너무나 솔직한 진무원의 대답에 서문혜령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잊었다고 극구 부인하였다면 오히려 속내를 읽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대놓고 솔직히 말하니 마음을 읽기 힘들었다·
본질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이 뛰어나 누구보다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서문혜령이다· 오죽하면 그녀의 조부인 서문화조차도 사람 보는 눈은 서문혜령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말했을까·
‘정말 솔직한 것인가 아니면 솔직함 속에 자신의 속내를 철저히 감춘 것일까?’
마치 진무원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이 서문혜령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이 났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도 진무원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서문혜령이 물었다·
“진 공자께서는 무공을 익히셨나요?”
“여기에 제대로 된 무공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진무원의 물음에 서문혜령의 말문이 막혔다·
진무원이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은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운중천에서는 이곳에 제대로 된 무공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였고 파견한 외당 삼조의 무인들을 통해서도 진무원이 변변한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미안해요·”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사과했다· 그러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여기에 온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물어보니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제가 아직도 대단한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의심하죠· 뭐 실상은 빈털터리나 다름없는데 말이죠·”
“미안해요·”
서문혜령이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사과를 하며 진무원을 바라봤다·
‘이상한 사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진무원과 대화를 하다 보면 미안해졌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말이다·
“뭐 서책은 얼마 없지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가요· 잘 보고 제자리에 꽂아놓기만 하면 상관없으니까·”
“고마워요 진 공자·”
“그럼····”
진무원이 포권을 취한 후 서문혜령의 곁을 지나쳐 갔다· 서문혜령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