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 3장 죽일 수 있다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세상 이치다 (3)
진무원은 혈인을 방불케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적갈색이던 무복은 온통 피에 절어 있었다· 진무원이 충혈된 눈으로 전면을 바라봤다·
조운경 역시 혈인이 되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무원과 마찬가지로 곳곳에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그의 상태는 생각보다 양호했다· 그가 익힌 십자혈마공 때문이었다·
십자혈마공은 타인의 피를 갈취해 성취를 높인다· 그 과정에서 다른 무공과 비할 수 없는 강력한 회복력을 갖게 된다· 특히 타인의 피를 흡수할 수만 있다면 그 속도는 배가 된다·
주위에 널린 것이 시신이고 바닥에 흐르는 것이 피였다· 이곳은 조운경에게 굉장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당연히 그의 상처 또한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조운경뿐만이 아니었다· 한쪽에 널브러져 있던 태무강도 회복이 거의 끝났는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태무강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진무원을 발견하고는 광기를 발산했다·
진무원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폈다·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싸움이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강호에 그가 서 있을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짝짝짝!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박수를 치며 나타났다· 박수를 친 이는 바로 관대승이었다· 그의 뒤에는 생각에 잠긴 모습의 서문혜령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다시 수십 명의 무인이 호위하고 있었다·
진무원의 시선이 관대승을 향했다· 그러자 관대승의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정말 대단하네· 솔직히 놀랐네· 저 둘을 상대로 이 정도로 버틸 수 있을지는 정말 몰랐네·”
“····”
진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는 겨우 유지하고 있는 진기가 흩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불순해진 진기를 안정시키고 있었다·
관대승이 그런 진무원의 몸 상태를 짐작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도 진무원의 몸 상태가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연이어 격전을 치렀다· 묵혼대에 자객들의 습격 그리고 혼마와 조운경까지· 녹록한 상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라면 아홉 하늘에 그리 뒤지지 않는 무력일세· 자네는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하지만 이제 자네도 한계에 달한 것 같군·”
관대승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양옆으로 조운경과 태무강이 다가왔다· 조운경은 옅은 미소를 태무강은 불만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겨우 진기를 안정시킨 진무원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현실을 부인하는가? 자네가 이들을 쓰러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네· 이들은 이미 자네의 무공에 대한 분석을 마쳤으니까· 자네가 천신일지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네·”
관대승은 진무원의 죽음을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자네가 아끼는 모든 것이 오늘 모두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네· 자네와 연을 맺은 모든 인간이·”
“그러고도 운중천이 정의로운 집단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정의로운 집단? 세상에 그런 것이 존재할 것 같은가?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권력을 추구하는 게 인간의 속성일세· 그리고 권력을 추구하는 자는 결코 정의롭지 않다네· 비록 당장은 자네 때문에 시끄러울 수 있겠지만 세상은 곧 자네를 잊을 것이네· 왜인지 아는가?”
“····”
“우리가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일세·”
“이제 알 것 같군요· 그것이 당신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이군요·”
“무슨 방식 말인가?”
“밀야를 부추겨 세상을 공포에 빠지게 한 후 운중천이 수습하는 것· 세상의 관심과 분노는 모두 밀야의 몫으로 남겨두고 당신들은 안전한 곳에서 강호를 지배하는 것· 자신의 피는 흘리지 않고 타인의 피로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당신들이 강호를 지배하는 방식 아닙니까?”
관대승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무언의 수긍이었다·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한 진무원의 표정이 참담해졌다·
‘실로 치밀한 자들이구나· 백 수십 년이나 이런 방식으로 중원을 지배하다니· 강호와 밀야는 이들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와 다를 바가 없구나·’
드러난 진실은 치가 떨리도록 무서웠다·
관대승이 진무원을 향해 다가왔다·
“자네는 훌륭한 인재일세· 만일 북천문의 후인이 아니었다면 내 무리를 해서라도 그분에게 자네를 천거했을 게야·”
“그분?”
“후후! 강호를 지배하는 진정한 절대자시지· 그분에 비하면 자네들이 말하는 다른 아홉 하늘은 많은 손색이 있다네·”
관대승은 진무원의 죽음을 확신했는지 평상시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이야기까지 했다· 그 덕에 진무원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군· 이제 그만 죽어줘야겠네· 제발 그래주게· 그래야 내가 마음 편하게 다음 골칫거리인 마녀를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마녀?”
“일단 창천의 고성에게 맡겨두었지만 왠지 마음이 쓰이는군· 자네의 경우처럼 말이야· 그래서 더 확실히 처리할 생각이야·”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설·’
자신이 위기에 처했듯 그녀 역시 위기에 처한 것이 분명했다· 이젠 자신의 생존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무원이 서문혜령을 보았다· 하지만 서문혜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무원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한 심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진무원이 설화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부서질 것 같지 않던 설화의 표면에는 어느새 거미줄처럼 잔금이 가 있었다· 아울러 설화의 검명도 현저히 약해져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설화야·’
그의 간절한 마음에 부응이라도 하듯 설화가 다시 검명을 거세게 터뜨렸다· 동시에 설화의 검신에서 짙은 요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관대승이 흠칫했다·
“챠핫!”
그 순간 진무원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조운경과 태무강이 관대승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각자 십자혈마공과 혼원염마공으로 진무원을 합공해 왔다·
하나도 상대하기 힘든 마공이 두 개나 그를 향해 펼쳐지고 있었다· 세상 전체가 붕괴라도 하듯이 굉음이 울려 퍼지고 가공할 기파와 강기가 밀려왔다·
진무원의 모습은 태풍 앞의 가랑잎처럼 위태해 보였다· 관대승과 서문혜령은 진무원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진무원이 들고 있는 설화에서 묵빛이 터져 나왔다· 검은빛은 소리도 없이 세상 전체를 자신과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조운경과 태무강 관대승의 몸이 어둠에 잡아먹혔다·
멸천마영검 제육식 무영계(無影界)·
그 최후의 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어둠에 잡아먹힌 영역이 마치 칼로 베어낸 듯 세상에서 사라졌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가장 뒤쪽에 있어 간신히 어둠의 영역에서 빗겨나 있던 서문혜령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크게 치떴다·
“크아악!”
“컥!”
잠시 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세 사람이 어둠 속에서 튕겨 나왔다· 밖으로 튕겨 나온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조운경과 태무강은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 짓이겨진 고깃덩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이는 바로 관대승이었다·
“끄으으!”
관대승의 입에서 기괴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왼쪽 어깨가 허전했다· 방금 전까지 어깨에 붙어 있던 팔이 매끈하게 잘린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고통에 관대승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타인을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분노가 그의 머리를 하얗게 비워갔다·
그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으아아! 진무원!”
서문혜령의 눈이 급히 진무원을 찾았다·
마지막 초식을 펼친 진무원이 모든 기력을 잃은 듯 바닥을 향해 추락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의 몸이 바닥에 닿기 전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그를 낚아채 사라졌다·
☆ ☆ ☆
강호에 갑자기 한 가지 소문이 은밀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북천문이 멸문한 것은 운중천의 권력욕 때문이다· 그들이 이번에는 북천문의 마지막 후예인 북검마저 제거하려 한다·
누구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련의 소문은 날개를 단 듯 빠르게 퍼져 나갔다·
운중천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다음이었다· 오지랖이 넓은 몇몇 사람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고 밤새 운중천에서 대규모의 작전이 펼쳐졌음을 알아냈다·
천라지망(天羅之網)·
강호의 공적이 출현했을 때나 펼쳐지는 대규모의 포위망이 운중현과 호북성 일대에 펼쳐져 있었다· 그 때문에 호북성 일대 사람들의 움직임이 모두 운중천의 통제하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그들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갔다·
소문은 무섭도록 빠르게 퍼져 나갔고 불과 하루가 지나기 전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무인들은 두 사람 이상 모이면 이 사건을 가지고 떠들었다·
운중천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해했다·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그들이라 할지라도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할 수는 없었다·
밀야와의 전면전을 앞두고 운중천을 향한 여론이 악화되고 있었다· 척마대 행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호의적이던 여론이 돌변한 것이다·
강호의 전 무인의 힘을 모아도 모자랄 때에 여론이 분열되자 운중천은 급히 수습에 나섰다· 그들은 진실이 아니라고 잘못 안 것이라고 말했지만 강호인 전체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운중현에서 시작된 소문은 금세 호북성 전체로 퍼져 나갔고 강호 전체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련의 사건을 두고 운중천에서는 급히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운중천은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일벌백계한다고 엄포를 놨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몇몇 무인은 운중천이 북천문을 멸문에 이르도록 강호의 여론을 조작한 증거를 찾아냈다· 그렇지 않아도 북천문에 호의적이었던 무인들은 운중천의 치밀한 여론전에 치를 떨었다·
소문은 더 은밀하고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고 이 과정에서 운중천의 통제는 먹혀들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매월령은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일련의 사건이나 소문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세상 일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소문도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어· 누군가 의도적으로 마음먹고 퍼뜨리지 않고서는 말이지·”
매월령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삼뇌수사 분명 그의 작품이야·”
강렬한 열기가 지배하는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매월령은 강한 한기를 느꼈다·
운중천에서 진무원과 일행을 제거하기 위해 그렇게 빠르게 움직인 것은 매월령과 흑월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하진월의 대응이었다·
지금도 하진월은 일행과 함께 도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사이 벌써 조력자들을 만든 것인가?”
매월령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흑월의 정보로도 알아내지 못한 사실이다· 그만큼 하진월이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일련의 사건이 어느 정도 여파를 미칠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지만 매월령은 달랐다·
그녀는 전신에 소름이 다 끼치는 것을 느꼈다·
“연이은 사건으로 인해 운중천은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전까지 누구도 건들지 못했던 성역이 침범당한 셈· 이제 강호인들은 운중천이 그들의 생각처럼 고고하거나 정의로운 단체가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직까지 운중천의 지배력은 공고하기만 하다· 그 어떤 단체도 감히 그들의 아성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운중천이 완전무결할 때의 이야기였다·
도덕성과 명예에 흠집이 난 운중천은 더 이상 완전무결한 곳이 아니었다· 이제껏 숨을 죽이고 있던 이들은 운중천의 흠집에 더욱 상처를 내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비록 당장은 그 효과가 미미하겠지만 먼 훗날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하진월은 먼 훗날의 일까지 생각해 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운중천이 생각하지 못할 리 없었다· 결국 운중천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어떤 오물을 뒤집어쓰더라도 진무원과 그 일행을 말살하는 것· 그래서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것뿐·”
매월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진월은 먼 훗날까지 염두에 두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더 큰 위험을 자초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무원과 하진월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그들에게 호감이 있다고 하지만 사적으로는 완전한 남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간 청인은 달랐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청인을 봐왔다· 그녀에게 청인은 돌봐줘야 할 철부지 남동생이었다· 하지만 청인은 이제 자신만의 길을 찾아 그녀의 품을 떠났다· 그의 선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부디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너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거라 동생아·”
매월령의 간절한 음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