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 2장 소년이 어른이 되는 시간 동안 잠을 자는 이도 있다 (3)
호형포천보 걷는 것만으로 진법을 펼칠 수 있는 천하의 괴공(怪功)이다· 오직 서문화를 비롯해 몇몇 서문세가의 직계만이 익힌 비전 중의 비전이었다· 하지만 서문세가의 수백 년 역사 속에서도 서문화처럼 완벽하게 익힌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두뇌를 자극해 인간의 지력을 극대화시켜 준다는 전뇌호천공(全腦護天功)과 더불어 서문세가를 지탱하는 양대 축이 바로 호형포천보였다·
서문혜령조차도 호형포천보를 펼치기 위해서는 정신을 한곳에 집중해야 했지만 서문화는 그저 숨 쉬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호형포천보를 펼쳤다·
하진월이 외쳤다·
“모두 눈을 감으십시오! 눈앞의 환상에 현혹되었다간 정혈이 고갈되어 죽을 겁니다!”
그의 외침에 모두가 분분히 눈을 감았다· 그에 서문화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소용없다· 내가 만들어낸 진법은 단순한 환영진이 아니란다· 겨우 눈을 감는다고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다 아이야·”
“크윽!”
서문화의 내공은 그야말로 바다처럼 넓고 깊었다· 그는 보보마다 내력을 심어두었고 심어둔 내력은 진법을 받치는 든든한 기둥이 되었다· 자연 위력 또한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진월의 눈앞에 거대한 바다가 나타났다· 하진월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그만 낙엽이었다·
바다에 폭풍이 몰아쳤다· 집채만 한 파도가 쉴 새 없이 그를 때리고 천둥 벼락을 동반한 바람이 그의 몸을 할퀴었다· 그때마다 하진월의 몸에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흘렀다· 환상은 실제와 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크윽! 진법을 깨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서문화이다· 하진월이 천재라고 하지만 아직 서문화에 비해선 많은 것이 부족했다· 특히 경험적인 면이나 응용적인 면에서는 서문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만났어도 그에겐 승산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례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의 손에 당기문과 당미려 등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소무상과 당기문 당미려도 각자 환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느끼는 환상은 각각 달랐다· 서문화의 진법은 인간이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하진월은 자신이 아직 가보지 않은 바다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당기문은 생전 처음 보는 독물에 포위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소무상은 수백 수천의 무인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당미려는 뜻밖에도 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무원?’
묵빛이 감도는 검을 들고 서 있는 남자는 분명 진무원이었다· 그는 당미려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왜?”
당미려의 물음에도 진무원은 대답이 없었다·
살기로 번뜩이는 눈 한없이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 당미려를 두렵게 했다· 그의 망막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하기만 했다·
당미려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당신은 왜?”
그녀의 목소리가 환상의 공간에 메아리쳤다· 그녀의 뺨을 따라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나를 봐주지 않나요? 내가 이렇게 곁에 있는데··· 당신은 왜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거죠?”
자신도 모르게 격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까지 그녀의 속에 꼭꼭 묻어두었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이다·
환상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진무원은 너무나 냉혹했다·
그가 휘두른 검에 당미려의 가슴에 상처가 났다· 벌어진 살점 사이로 피분수가 치솟아 올랐다· 너무나 아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꺽꺽댔다· 진무원은 그런 그녀를 향해 연신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 베인 상처보다 무감각한 눈빛이 그녀를 더 아프게 했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만 흘렸다·
그녀의 가슴이 그녀의 마음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너무나 서러워서 너무나 슬퍼서 그녀는 하염없이 울었다·
당미려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 필요가 없어 나 같은 존재는·’
“안 된다 미려야·”
그 순간 당기문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당미려는 미처 듣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닫고 귀를 닫고 마음을 닫았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죽게 될 것이다·
“미려야! 제발!”
독물에 둘러싸인 환상 속에서 겨우 버티던 당기문은 당미려가 태아처럼 잔뜩 웅크린 채 한없이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당기문은 그녀의 마음에 심마(心魔)가 찾아든 것을 눈치챘다·
마음속에서 자란 마귀는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심마에 완전히 잠식당한 당미려는 더 이상 당미려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미려는 그의 조카이자 하나뿐인 제자였다· 그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당기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소무상도 하진월도 환상에 파묻혀 스스로를 죽여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서문화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지옥 불을 피워놓은 자가 그 안에서 절규하는 자들을 보고 웃고 즐기는 모습을 본 순간 당기문의 머리 안에서 무언가 끊어졌다· 그를 그답게 만들어주던 이성은 사라지고 분노만이 남았다· 당기문 역시 진법의 영향이란 것을 알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서문화·’
이곳은 서문화가 만들어낸 세상이다· 연천화가 검으로 검계를 만들어냈듯이 서문화는 진법으로 자신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냈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서문화의 의지에 의해 움직였다·
서문화의 지배력이 오롯이 장악한 세상에서 그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난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다· 무공도 익히지 않았고 체력도 변변치 않지만 나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무기가 있다·’
시시각각 주변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무작위로 변하는 것 같지만 거기엔 일정한 법칙이 존재했다· 단지 당기문이 알아보지 못한 것일 뿐·
츠츠츠!
당기문의 양쪽 소매에서 잘게 부서진 가루가 흘러내렸다· 검은 모래처럼 흘러내린 가루는 곧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서문화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하진월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진월은 눈을 감고 환상에 대항하고 있었다· 아니 그 와중에도 서문화가 펼친 진을 풀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서문화는 그런 하진월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놈 단순히 머리만 좋은 골방쟁이 서생이 아니구나· 강단이 있어· 머리가 좋은 놈들 중에 그런 자는 결코 흔치 않지·’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족속들의 문제는 머리로만 모든 것을 계산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몇 가지의 정황만 가지고도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뻔한 결과가 나오는 일에는 절대로 육신을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진월은 달랐다· 그는 서문세가의 천재들을 능가하는 머리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을 지녔다·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자 중에서는 보기 드문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 판단이 옳았다· 이자를 살려두면 본가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서문화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이제까지는 진법만 펼친 채 지켜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확실히 숨통을 끊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절대 후환을 남겨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가 요대에 꽂아두었던 섭선을 꺼내 들었다·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용의 문양이 그려진 섭선의 이름은 등룡선(登龍扇)이었다· 등룡선은 가주의 신물이자 무기이다·
촤르륵!
등룡선이 활짝 펼쳐지자 눈을 시리게 하는 예기가 발산됐다· 서문화는 하진월을 향해 등룡선을 겨눴다·
특별한 절초를 쓸 필요도 없었다· 이대로 기운을 발출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하진월의 목엔 커다란 구멍이 뚫릴 것이다·
하진월은 눈을 감고 있어 서문화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알았어도 그에겐 대항할 그 어떤 수단도 없었다·
서문화가 하진월을 향해 섭선을 뻗으려다 말고 주춤했다· 그의 안색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이건?”
이질적이면서도 거북한 기운이 몸 안에서 느껴졌다· 마치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가 혈관 안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흥! 독인가?”
서문화의 시선이 당기문을 향했다·
이곳에서 하독을 할 수 있는 자는 당기문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절대지경에 도달한 그였다· 자연스럽게 천독불침(千毒不侵)의 신체가 되었고 어지간한 독은 내공을 한번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태워 버릴 수 있었다·
서문화는 가벼운 마음으로 내공을 운용했다· 하지만 내공을 운용하는 순간 그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내력을 담아놓은 단전이 돌덩이같이 굳었다· 그가 내력을 움직이려 할수록 단전은 더 급속도로 굳어갔다·
서문화가 당기문을 노려봤다·
“이게 무슨 독이냐?”
“혈은잠(血隱蠶)·”
“혈은잠?”
“당신 같은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놈이오· 살상력은 그리 크지 않지만 내공을 갉아먹어서 종국에는 고갈되게 만들지· 아무리 당신이라 할지라도 혈은잠을 몰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거요·”
“장담하느냐?”
“내 목숨을 걸고·”
처음으로 서문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한마디만 더 하자면 내력을 운용하려 할수록 단전이 더욱 단단하게 굳을 거요· 그리고 당신의 몸을 공격하겠지·”
내력을 잡아먹는 괴물 특히 공력이 강한 자일수록 더욱 강력하게 공격하는 것이 바로 혈은잠이었다·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가 기어 다니면서 무는 듯한 간질거림과 고통은 제아무리 절대고수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힘들다·
실제로 서문화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개미가 온몸을 잘근잘근 깨무는 듯한 고통은 그도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노기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자네를 잘못 판단했군·”
“어떻게 판단하셨소?”
“독이라는 훌륭한 힘을 가지고도 쓰지 못하는 머저리라고 말이야· 그래서 방심했지· 자네가 결코 독을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선배의 생각이 맞을 거요· 이제까지의 나는 머저리였소· 하나 이제부턴 바뀔 것이오· 선배가 날 그렇게 만들었소· 이제부터 내가 가진 모든 독을 사용할 것이오·”
“환영한다· 괴물의 세계로 들어온 것을· 자네도 이제 그 경계선을 한 번 넘어섰으니 두 번은 어렵지 않을 거야· 그렇게 모두가 인간에서 괴물이 되어가는 거지·”
서문화의 조소 섞인 말에 당기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난 서문화다·”
서문화가 내공을 운용했다· 혈은잠 때문에 단전이 돌덩이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가고 전신의 고통이 배가되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챠핫!”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서문화를 향해 달려들었다·
쉬각!
은색의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서문화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남자는 바로 소무상이었다· 그가 환상을 극복하고 서문화를 공격한 것이다·
“버러지 같은 것이·”
서문화의 안색이 싹 변했다·
소무상 때문에 혈은잠을 몰아내는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문화는 소무상이 펼치는 검법이 외당의 하급무사들이 사용하는 삼류검법임을 알아차렸다·
“겨우 청운검법 따위로····”
평상시의 서문화라면 손가락 하나 까닥이는 것으로 소무상을 죽일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혈은잠에 금제당한 상태라 그를 상대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때 이제까지 눈을 감고 있던 하진월이 눈을 떴다·
“이제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