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 2장 소년이 어른이 되는 시간 동안 잠을 자는 이도 있다 (2)
‘허! 정말 군사의 능력은 대단하구나·’
소무상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장원을 빠져나오는 것이 힘들었지 그다음부터는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진월이 안내하는 대로만 움직이면 끝이었다·
곁에 무장을 한 무인들이 지나가고 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그들은 소무상 일행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게 진법의 위력이구나·’
하진월은 운중현과 외곽 곳곳에 미로진과 환영진을 준비해 놓았다· 미리 준비해 놓았기에 발동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간단하지만 무척이나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운중천에서 풀린 무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근처를 뒤졌지만 환영진 안에 숨어 있는 그들을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 하진월은 수색하던 무인들이 사라지면 숨어 있던 환영진을 풀고 다음 환영진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발동시켰다·
그런 식으로 십여 차례를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운중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외곽까지 도주할 수 있었다·
소무상이 말했다·
“이제 적들은 어느 정도 떨쳐낸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아직 안심하긴 이르네· 그들은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어쩌면 지금쯤 내가 진을 펼쳤다는 것을 깨닫고 진에 능통한 자들로 추적을 해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네·”
하진월은 결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그런 하진월의 모습에 당기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실로 오만하구나· 당문 정도는 안중에도 두지 않으니·”
“어디 당문만 그렇게 보겠습니까? 그나마 당금 무림에서 그들을 견제할 만한 가능성을 가진 세력은 오직 밀야뿐이니· 그 외엔 그 어떤 문파도 그들의 안중에 없을 겁니다·”
“견제할 존재가 없는 권력이란 실로 무서운 것이군·”
당기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당문이란 권력 집단 안에서만 살아온 그다· 당연히 다른 이들에게 당하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크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세상이 부조리한 곳이란 인식 자체를 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진월이 당기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생각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래 알겠네· 자네가 함께하니 든든하군·”
당기문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체력이 회복되었으면 다시 이동합시다·”
“무원을 기다리지 않고?”
“그는 알아서 빠져나올 겁니다·”
“하나····”
“그는 결코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음!”
“저는 그를 믿습니다·”
하진월은 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소무상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주군은 분명 살아서 저희를 찾아오실 겁니다· 저희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주군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알겠네· 자네들의 뜻이 그렇다면야····”
진무원을 가장 따르는 남자들이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도 진무원을 믿어야 했다·
“애써 북천문이 밀야와 내통했다는 오해를 풀었는데 이대로 도주해야 하다니 안타깝군·”
당기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진무원이 걸어온 길을 처음부터 지켜봤기에 아쉬움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대로 도주하면 그는 다시 오명을 뒤집어쓸 것이 분명했다· 운중천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그럼?”
하진월이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당기문이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때 소무상이 말했다·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제 움직이시죠·”
“그러세·”
하진월이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그러자 주변의 풍경이 일렁이더니 진이 해제됐다·
진이 해제되자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이미 적들이 한 번 훑고 지나갔기에 근처에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 그들은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남쪽으로 갑니다·”
“남쪽? 북쪽이 아니고? 남쪽은 운중천의 영역일세· 당연히 근처에 있는 문파들도 모두 운중천의 영향권에 있고·”
“저들도 그렇게 예상할 겁니다· 그러니까 남쪽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중간에서 다시 방향을 틀 겁니다· 그래야····”
“왜 그러시나요?”
하진월이 말을 하다 말고 굳어 있자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던 당미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진월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소무상과 당기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보아서는 안 될 무언가를 본 사람들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당미려의 시선이 세 사람이 보는 곳을 향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곳에 그가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일흔 초반의 노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외모였지만 단 하나 그의 눈만큼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담은 것처럼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노인은 순백색의 장포를 입고 마찬가지로 순백의 영웅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있어 탈속한 선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노인을 바라보는 소무상 등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짙게 떠올라 있었다·
노인의 정체도 이름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인지한 그 순간부터 피부 위로 올라온 소름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공포를 느끼고 반응한 것이다·
‘저 노인이 누구기에?’
노인이 움직이기만 해도 목숨이 끊어질 것 같은 강렬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감히 크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노인이 흘리는 기도와 존재감은 엄청났다·
특히 하진월이 느끼는 압박감은 타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노인의 진정한 정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귀제갈(鬼諸葛) 서문화!”
그의 음성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러자 노인 서문화가 빙긋 웃었다·
“역시 너는 노부를 알아보는구나· 그럴 줄 알았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내 손녀를 번번이 좌절케 한 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왔단다·”
“큭!”
하진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우를 피하려 했는데 오히려 호랑이를 끌어들인 셈인가?’
서문화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그런 하진월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자들의 가문이 바로 서문세가이다· 그리고 서문혜령은 그런 세가의 후기지수 중에서도 가장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는 이다· 그래서 서문화도 그녀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그녀가 번번이 좌절을 겪었다· 그녀를 좌절케 한 주인공은 바로 하진월이었고 서문화는 그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가 아는 서문혜령은 흔치 않은 천재였다·
그런 천재에 필적하는 또 다른 천재가 나타났단 사실이 그의 흥미를 끈 것이다· 물론 그런 천재가 자신의 가문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왔단 사실은 그리 달갑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진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최악이군·’
서문화는 아홉 하늘 중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일반적인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수준의 무인이 아니다· 그와 같은 무위를 가진 자 앞에서는 그 어떤 수법이나 계략은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서문화는 머리조차 좋다는 것이다· 천재라는 단어로 뭉뚱그리는 것 자체가 그에 대한 모욕이었다· 하진월이 알고 있는 가장 완벽한 문무겸전의 존재가 바로 서문화였다·
하진월은 서문화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서문화에겐 단순한 유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무공을 알지 못하는 하진월에겐 뜻하지 않은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진월의 미소가 짙어졌다·
“제법이더구나· 미혼진에 환영진까지 적절히 섞어 사용하다니· 거기다 요소요소에 진을 펼칠 준비를 해놓았고· 확실히 혜령보다 임기응변 부분에선 한 수 위구나·”
“그렇게 칭찬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너는 전혀 감사해할 필요 없다· 왜인지 아느냐?”
“저의 얕은 지식으로는 감히 짐작도 못하겠군요·”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너는 왜 서문세가의 인물들이 천하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평을 듣고 있는지 아느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군요·”
“그럴 줄 알았다· 누구도 의심을 갖지 않지· 왜 천하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사람은 서문세가에서만 배출될까? 그들에게는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 왜 한 번도 그런 의구심을 갖지 않을까?”
“그럼 제가 묻겠습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하진월의 대답에 서문화가 활짝 웃었다·
일흔이 넘는 노인이 해맑게 웃자 하진월은 전신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꾹 참았다· 지금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할 때였다·
“서문세가의 인물이 천하제일을 다툴 수 있을 정도의 두뇌를 타고 태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수백 년 동안 쌓아온 각종 경험과 대법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지· 하나 세상에는 가끔 천재라는 족속들이 태어나게 마련이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하늘의 이치를 꿰뚫어 보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 존재 즉 진정한 의미의 천재가·”
서문화의 시선은 하진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 이들을 문일지십(聞一知十) 혹은 문일지백(聞一知百)의 기재라고 하지· 그리고 우리 서문세가에서는 누구보다 그런 자들을 경계해 왔다·”
“그럼?”
하진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라면 네가 구축한 아성을 뒤흔드는 자들이 나오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대대로 서문세가의 아성에 위협이 될 만한 천재가 나타나면 제거하는 것이 가주의 의무 중 하나이다·”
“으음!”
“이제 내가 왜 여기 온 것인지 알겠지?”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서문화는 그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하진월을 바라봤다· 하지만 하진월은 그처럼 웃을 수 없었다·
서문화의 의도는 명백했다·
하진월이 이 이상 서문세가를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손녀분께서는 당신이 나서는 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그녀는 천하를 놓고 저와 정면으로 승부를 겨루는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손녀의 기대를 배신할 작정이십니까?”
“세상을 살다 보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이지· 혜령이도 이젠 그 사실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서문화는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하진월을 서문세가의 아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판단했고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손녀인 서문혜령의 승부욕 따윈 그에게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서문화의 몸에서 기파가 흘러나와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미줄 같은 기파는 하진월 등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옥죄어왔다·
보다 못한 당기문이 소리쳤다·
“천하의 서문세가가 이런 치졸한 수를 쓰다니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후안무치야말로 천하를 경영하는 자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이지· 도덕을 따지고 선후를 따져서 어찌 천하를 경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선배는····”
“서문세가만 그런 줄 아는가? 당문도 그렇게 커왔어· 당문이 사천에 자리를 잡는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숱한 문파가 현판을 내렸는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하나의 거대 세가가 한 지방의 패주로 자리를 잡기 위해선 최소 천 명 이상의 목숨이 희생되어야 하지· 그게 현실이야·”
서문화의 말은 비수가 되어 당기문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래서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서문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팔짱을 풀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 어서 자네들을 끝내고 진무원 그 아이의 최후를 지켜봐야겠어·”
그가 걸음을 옮기는 순간 주위의 풍경이 일변했다·
분명 그들은 숲 속에 있었는데 주위가 온통 암흑의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호··· 형포천보(虎形包天步)?”
하진월이 비명에 가까운 음성을 내뱉었다·
걸음만으로 진법을 펼친다는 서문세가의 비전 공부가 운중현 외곽 이름 모를 숲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