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 1장 위기와 악연은 연이어 찾아온다 (3)
간밤에 변고가 일어났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운중천에서 철저하게 정보를 차단한데다가 강호의 시선이 온통 밀야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이는 운중천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얼른 자료를 소각하고 부지런히 움직여·”
매월령은 휘하의 수하들을 채근했다· 흑월에 속한 기녀와 무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녀의 명령을 수행했다·
수많은 책자가 불에 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흑월의 사천지부가 그동안 힘들게 수집한 정보가 담긴 책자였다· 하지만 매월령은 하등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천지부에서 수집한 정보 대부분의 복사본이 흑월 본단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모두 소각했으면 다들 잠수해서 다음 명령을 기다려·”
“예!”
그녀들과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때 안쪽에 누워 있던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누님 무슨 일입니까?”
그는 청인이었다· 당기문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함받은 직후 사천지부로 들어와 요양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변고가 일어났다·”
“변고?”
“운중천이 움직였다·”
“그게 무슨···?”
“진 소협과 일행이 목표다· 운중천은 진 소협과 연관된 자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가 그에게 정보를 전해준 것을 파악할 것이다·”
청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매월령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럼?”
“사천지부를 포기한다·”
“그들을 포기하자는 거요?”
“당분간은 모든 것을 접고 납작 엎드린다·”
“누님!”
“폭풍이 불어오는데 맞설 필요는 없다· 괜히 불똥이 이쪽으로 튄다면 흑월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제까지의 관계를 끊고 모른 척하자는 것이 말이 되오?”
“그가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흑월 전체의 안위와 맞바꿀 정도는 아니다· 운중천이 독하게 마음먹었다· 그 어떤 비난을 뒤집어쓰더라도 진 소협을 말살할 작정이다· 이럴 때 그들과 연관되는 것은 섶을 이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럴 수는 없소· 이제까지의 정리가 있는데·”
“정신 차려라· 너는 흑월의 비월이다· 그간 정이 든 것은 알지만 흑월의 안위가 최우선이다·”
매월령은 냉정했다· 하지만 청인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더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것 아니오?”
“무슨 수로 말이냐? 운중천이 작심하고 하는 일이다·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냥 납작 엎드려서 비바람이 그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크윽!”
청인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이성적으로는 매월령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그렇지 않았다·
“누님은 애들 데리고 잠수하시오· 나는 그들을 돕겠소·”
“어떻게 말이냐? 몸이 멀쩡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지금 너는 정상도 아니잖느냐? 거동도 불편한 주제에 그들을 어떻게 돕겠다는 거냐?”
“어떻게든 되겠지·”
“청인아·”
“누님 어차피 그들이 아니었으면 죽을 목숨이었소· 흑월에는 나 말고도 비월이 많이 있지만 그들에겐 아무것도 없소·”
“너····”
“흐흐! 나도 이런 내가 낯설다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소· 내 가슴이 이렇게 뛰고 있으니까·”
청인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매월령은 청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바보 같은· 겨우 그런 이유로····”
하지만 그녀는 청인을 붙잡지 못했다· 뒤돌아서는 청인의 결의 어린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 ☆ ☆
진무원은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폈다· 수많은 족적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진무원은 그중에서 익숙한 발자국 몇 개를 찾아냈다·
“다행히 모두 무사하구나·”
소무상과 하진월 등의 발자국이었다· 당기문과 당미려 숙질의 발자국도 있었다·
명류산이 시간을 벌어준 덕에 그들은 무사히 장원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발자국 위로 낯선 발자국이 수없이 덮여 있었다· 추적자들의 발자국이다·
“스무 명 정도인가?”
물론 그 정도가 끝은 아닐 것이다· 운중천은 이곳에 천라지망을 펼쳐놓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들과 합류하는 시간이 지체될수록 불리했다· 소무상과 당미려만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불분명했다· 최대한 그들을 빨리 따라잡아야 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그동안 하진월이 놀고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원 근처에 미혼진과 환영진을 설치한 것도 그였다· 분명 많은 준비를 해놨을 것이다·
진무원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결국 명류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때 편한 곳에 모시겠습니다·’
가슴 한편에 커다란 돌덩이를 올려놓은 기분이다· 명류산은 그렇게 진무원의 가슴속에 빛나는 별이 되었다·
진무원은 명류산을 가슴속에 담은 채 경공을 펼쳤다· 마치 쏜살처럼 그의 몸은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갔다·
쐐애액!
그 순간 그를 향해 수많은 암기가 날아왔다·
거리 곳곳에 숨어 있던 자들이 암습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진무원은 당황하지 않고 설화를 휘둘렀다·
그림자 내공이 설화를 타고 휘돌면서 기이한 접인력(椄引力)을 발산했다· 접인력에 끌인 암기들이 설화를 한 바퀴 돌아 날아온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큭!”
“허윽!”
암습했던 자들이 오히려 되돌아온 암기에 당해 쓰러졌다· 하지만 암습자들은 끝없이 나타났다· 뒷골목에서 지붕 위에서 그리고 오물이 흐르는 도랑에서도 나타나 진무원을 괴롭혔다·
한눈에 봐도 묵혼대 같은 강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미굴에서 빠져나오는 개미처럼 끝도 없이 밀려오는 그들의 모습은 진무원의 기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마치 초개처럼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위험 속에 내던졌다·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듯했다· 먼저 달려든 동료들이 진무원의 손에 목숨을 잃는데도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인형을 보는 듯 공허함만이 가득한 눈동자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윈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진무원의 발걸음을 늦추고 체력을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한목숨 따윈 아깝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런 목적으로 선택되고 키워진 인물들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진무원의 눈에 분노의 빛이 어렸다· 암습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키워낸 자들을 향한 분노였다·
‘도대체 당신들은 인간의 목숨을 무어라 생각하는 건가? 이렇게 소모품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간 분노를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진무원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들을 보낸 자들의 행태가 진무원을 분노케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들을 보낸 자들은 멀찍이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는 수만큼 다른 이들을 더 투입할 것이다·
설화의 검신을 타고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진무원의 손에도 선혈이 타고 흘렀다· 손에 묻은 피가 몸에 흘러내리는 피가 무거운 쇳덩이가 되어 그의 몸을 짓눌렀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해친다는 것은 심적으로 막대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진무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손에 묻히는 피만큼 그의 가슴에도 피멍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결코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도 주저하지도 않았다· 분노도 살아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일단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가야 분노를 풀 수 있고 복수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서걱!
설화에 걸리는 모든 것이 잘라졌다·
검(劍)도 도(刀)도 인간의 육신도·
시체로 만든 길 그 길을 가득 적신 붉은 피 그 길을 만든 이는 진무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전진했을까?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인(人)의 해일이 마침내 끝이 났다· 진무원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웠지만 그에겐 한가히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가 지체할수록 일행이 더욱 큰 위협에 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서문혜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많은 이를 죽이고 헤쳐 나온 그의 모습은 혈인을 방불케 했다· 그의 손에 죽은 자의 수는 어느덧 세 자리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강호 역사상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이를 죽이고 상처를 입힌 자는 진무원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와 관대승은 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의 탑 정상에 서 있었다· 만등탑이라는 이름의 탑 위에서는 운중현의 거리 곳곳이 막힘없이 보였다·
“전신(戰神)이 따로 없구나·”
수많은 이가 달려들었지만 그 누구도 진무원의 몸에 제대로 된 상처 하나 만들지 못했다·
서문혜령이 문득 곁에 있는 관대승을 바라보았다·
시산혈해를 보면서도 그는 옅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짙어져 갔다·
문득 그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대승의 손가락이 까닥일 때마다 수많은 이가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진무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물량 공세였다·
묵혼대로 발길을 묶은 후에는 수많은 자객 집단을 동원했다· 돈에 팔려온 자들과 묵혼대를 적절히 섞어 진무원의 체력과 내력을 소모시키는 그의 전법은 보통 사람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파격적이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저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원을 동원한 것일까?’
보통 사람의 신경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을 그는 너무나 태연하게 하고 있었다·
진무원을 습격한 자들의 비명이 운중천의 거리 곳곳에 울려 퍼지고 있는데도 누구 한 명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서문혜령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에겐 누구나 호기심이 있고 지척에서 일어나는 일엔 궁금증을 내보이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겁을 집어먹더라도 그래도 간담이 큰 몇 명쯤은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운중현엔 완벽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운중천에서 운중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천하의 그 어떤 단체도 하지 못하는 일을 운중천은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해요·”
이 정도의 물량 공세라면 아무리 고수라고 할지라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무원에겐 많이 부족해 보였다· 이 정도로는 진무원의 발걸음을 잠시 늦추는 결과밖에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관대승이 서문혜령의 질문에 답을 했다·
“천하의 북검을 상대하는 일입니다·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지요·”
“알면서도 계속 저들을 동원하겠다는 건가요?”
“그래도 북검의 체력을 소모시킬 정도는 되니까요· 백 명이 죽어도 상관없고 천 명이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 이상의 인원을 동원할 자신이 있으니까요·”
“으음!”
“하나 무척이나 비효율적인 방법이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준비했습니다· 아마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서문 소저·”
“무슨?”
관대승이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등골이 서늘하도록 차가운 미소에 서문혜령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서문 소저·”
“예?”
“지금부터 보는 것은 영원히 가슴에 담아둬야 할 겁니다·”
“무슨?”
“서문 소저가 야망이 크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담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창룡회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야망이 큰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건····”
“한 가지 충고를 드린다면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상엔 젊은이들의 치기만으로 헤쳐 나가기엔 너무나 힘든 난관이 수없이 존재합니다· 그 길을 독자적으로 가려면 수년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서문혜령의 표정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옷이 모두 벗겨져 알몸으로 설원 한복판에 버려진 듯 전신에 냉기가 엄습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요?”
“조부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그분은 훌륭한 분이니까요·”
“그러니까 무슨····”
서문혜령의 언성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아 드디어 시작되는군요· 부디 제 말 명심하십시오·”
관대승의 미소가 짙어졌고 서문혜령이 느끼는 오한은 더욱 커졌다· 비단 관대승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주위의 기온이 급속도록 내려가고 있었다·
“무슨?”
서문혜령의 시선이 한파의 근원을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 누군가 있었다·
그곳에 회색의 거한이 있었다·
광기를 태풍처럼 발산하는 붉은 눈동자의 주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