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 8장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4)
후웅!
설화가 검명을 나직이 흘렸다· 근래 들어 설화가 검명을 흘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무원이 설화를 잡았다· 그래도 검명은 잦아들지 않았다·
진무원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소무상이 다급한 표정으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주군·”
“무슨 일입니까?”
“이것 좀 보십시오·”
소무상이 내민 것은 무언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 종이였다·
“뭡니까?”
“전에 데리고 있던 아이들이 운중천으로 오가는 정보를 빼왔습니다· 그중에 익숙한 것이 있어서····”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소무상에게 종이를 받아 읽어 내렸다·
“호북성 조양 인근에 마녀 출현· 종남파의 고수들 몰살?”
“그다음 줄을 읽어보십시오·”
“십오륙 세로 보이는 외모에 푸른색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그리고 은백색의 강기가 특징·”
순간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누군가와 특징이 일치했다·
갑자기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 울려 퍼질 지경이다·
단 몇 줄의 설명에 불과했지만 진무원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설·”
뜨겁게 달궈진 피가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겨우 십오륙 세 정도 되어 보인다는 외모만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그녀와 일치합니다·”
“언제 들어온 정보입니까?”
“운중천에는 어제 들어온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럼 하루가 지났군요·”
진무원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운중천은 결코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움직여야 될 때는 반드시 움직인다· 특히 마녀라고 규정했으면 그에 합당한 움직임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하루 전에 정보를 입수했다면 지금쯤 벌써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 그들이 말하는 마녀가 한설이라면····
진무원이 설화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군?”
“잠시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소무상이 따라 일어났다·
진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하진월과 당기문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하진월이 진무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발견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잠시 밖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밖에?”
“그게····”
쾅!
진무원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장원의 정문이 굉음과 함께 박살 났다· 뒤이어 검은 무복에 붉은 전포를 입은 무인들이 우르르 뛰어들어 왔다·
당기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노성을 질렀다·
“웬 놈들이냐?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잘 알고 있습니다· 당문이 관리하는 장원이지요·”
대답을 한 이는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을 뒤따라온 중년의 남자였다·
“당신은?”
당기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답을 한 이는 그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관대승 운중천의 총관인 그가 뒷짐을 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 총관?”
“당 대협·”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이곳은 당문이 관리하는 장원이오·”
“알고 있습니다·”
“알고서도 흙발로 짓밟았다?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오!”
“사안이 워낙 다급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과는 차후 하겠습니다·”
“급박한 사안?”
“그렇습니다· 운중천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다급한 사안입니다·”
관대승의 시선이 진무원을 향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 소협·”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하자면 진 소협이 운중천의 근간을 뒤흔들 짓을 저질렀단 뜻입니다·”
“내가 말입니까?”
진무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순간 관대승의 등 뒤에서 묘령의 여인이 모습을 보였다· 진무원도 익히 아는 사람이다·
‘서문혜령·’
그녀의 등장에 진무원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꼈다·
서문혜령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진 소협·”
“무슨 일입니까?”
“진 소협이 밀야와 내통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어요·”
“내가 말입니까? 그건 이미 전에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었을 텐데요·”
“다른 증인이 나왔어요·”
“증인?”
진무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제까지 진 소협의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사람이에요· 신빙성이 있지요·”
“그가 누굽니까?”
서문혜령이 대답 대신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누군가 쭈뼛거리며 걸어 나왔다·
당기문의 눈이 크게 터졌다·
“너는 류산? 네가 왜 거기에···?”
서문혜령 쪽에 서 있는 이는 명류산이 분명했다·
명류산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질겅질겅 깨물었다· 그러자 서문혜령이 그를 보고 말했다·
“어서 말하세요· 당신이 본 것을·”
“그건····”
“나한테 그가 밀야와 내통했다고 했잖아요·”
명류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당기문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깨달았다·
“류산 네가 어떻게···?”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모르지만 서문혜령은 명류산을 포섭한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요 근래 외출이 잦고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 술 마시러 다니는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서문혜령을 만난 모양이다·
당기문이 서문혜령을 노려보았다·
“대체 류산을 어떻게 홀린 것인가?”
“홀리다니요? 말이 심한 것 같군요 당 대협·”
“그럼 홀린 것이 아니라면 류산이 왜 저러는가?”
“명 소협은 고심 끝에 저를 찾아왔어요· 바로 대의를 위해서죠·”
서문혜령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평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날카로워진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관대승이 나섰다·
“꼭 그만이 아니더라도 진 소협이 밀야와 내통했다는 증거는 많이 있네·”
“그 증거란 것들을 보고 싶군요·”
“우리를 따라가면 자연 보게 될 것일세· 좋은 말로 할 때 함께 가세· 내 이름을 걸고 자네의 안위를 책임지겠네·”
진무원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관대승 때문이 아니었다· 일대를 포위하고 있는 검은 무복에 붉은 전포를 걸친 무인들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그들이 진무원의 신경을 거슬리고 있었다·
진무원은 그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무인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청인을 추적해 온 자들도 이들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이들에게서는 천살조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사람을 숱하게 죽여 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죽음의 냄새가· 차이가 있다면 천살조보다 훨씬 더 농밀하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관 총관이 운경 형님의 배후에 있는 자이거나 아니면 연결 통로이겠군·’
처음 관대승을 봤을 때부터 의아함을 느끼던 진무원이다· 강호에 알려진 소문으로는 관대승은 그다지 무공이 강한 편이 아니란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첫 대면 때 그의 몸속 깊은 곳에 은닉된 강력한 내공을 느꼈다· 만일 전방위 감각이 아니었다면 진무원도 놓치고 지나갔을 만큼 그의 내공은 은밀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그 역시 암류의 일부였단 말이군·’
진무원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 때 하진월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명류산을 바라보았다·
“류산·”
“젠장! 왜 그러시오?”
“네가 마음고생이 많았겠구나·”
하진월은 명류산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측은한 표정으로 서문혜령을 바라볼 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였는가 당신이 생각해 낸 최후의 한 수가?”
“무슨 말인가요?”
“류산이 뻔질나게 밖으로 나돌아 다닐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 누군가 그에게 바람을 넣은 존재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당신이 아니길 바랐지· 당신이 동원하기엔 너무나 치졸한 수법이었으니까·”
서문혜령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진월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다·
진무원이란 존재가 부각되면서 그녀는 명류산과 접촉했다· 그의 허황된 욕망을 꿰뚫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적절한 반대급부를 약속하고 그래도 망설이는 그에게 약간의 협박을 가했다· 그렇게 명류산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본래 그녀는 명류산이라는 패를 최후에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조부인 서문화가 그녀를 은밀히 불러들였고 관대승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란 명을 내리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일단 서문화의 명이 떨어진 이상 그녀에겐 어떤 선택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유독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괜히 말 돌리지 말아요· 모든 진실은 나중에 밝혀질 테니까·”
“그렇겠지· 하나 그때쯤이면 무원이나 나는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안 그런가?”
하진월의 입매가 뒤틀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관대승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차가워졌다·
“좋은 말로는 더 이상 안 될 것 같군· 여기 있는 모두를 운중천으로 압송해 가겠네·”
“관 총관 말을 가려 하시오· 여긴 당문의 장원이오· 여기서 억지를 부리는 것은 곧 당문을 무시하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보다 못한 당기문이 앞으로 나섰다·
“언제부터 당문이 운중천 위에 군림했는지 모르겠군요· 이 이상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당 대협에게도 그다지 좋을 것 없을 겁니다·”
관대승의 말에는 은은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문이라는 이름에 압도당했겠지만 그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 당문은 꺼림칙한 존재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관대승과 서문혜령이 진무원을 비롯한 그와 관계된 모든 이를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위협적인 존재는 그 어떤 부담을 무릅쓰고서라도 제거해야 한다· 강호의 시선이 척마대와 밀야에 쏠린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하진월은 그런 분위기를 읽고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진무원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신호이다·
붉은 전포를 걸친 무인들이 진무원과 하진월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그물 같은 예기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진무원이 관대승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관대승의 몸이 움찔했다·
단 한 걸음을 좁혔을 뿐이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이 생사를 좌우할 만큼 치명적이었다· 관대승을 진무원의 간격에 가둔 것이다· 붉은 전포를 입은 무인들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잠시 주춤거렸다·
진무원이 소무상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다른 분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그러면 군사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을 겁니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대화를 할 시간은 진즉에 지났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던 운중천은 듣지 않을 것이고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말이다·
쉬가악!
순간 진무원의 검이 섬전처럼 뻗어 나왔다· 목표는 관대승의 인후혈이었다· 일반적인 무인은 감히 반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섬격(閃擊)이었다· 하지만 관대승은 일반적인 무인이 아니었다·
“크윽!”
당혹한 신음성을 흘리면서도 그는 소매를 휘둘렀다· 내공이 주입된 소매가 철판보다 단단하게 변했다·
카앙!
설화와 소매가 격돌하며 관대승의 몸이 크게 흔들리며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설화에 담긴 가공할 역도가 그의 심맥을 크게 흔들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붉은 전포를 걸친 무인들이 움직였다· 십여 명이 관대승을 에워싸 보호했고 나머지 무인들이 진무원을 일제히 공격했다·
쉬가악!
설화가 허공을 갈랐다·
훗날 북검지로(北劍之路)라고 불릴 북검과 운중천의 전쟁은 이렇게 서막을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