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 8장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2)
무적(無敵)·
적이 없다·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 적이 없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강호의 은원에 얽매이게 마련이고 성장하는 만큼 적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강호인들은 무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단 한 곳만은 예외다·
무적세가라 불리는 곳·
수백 년 동안 불패의 전설을 남겼고 그로 인해 적들이 감히 상대할 마음조차 접게 만드는 위대한 가문이 바로 무적세가였다·
무적세가의 당대 가주는 바로 무적수사(無敵修士) 모용율천이었다·
당금 강호를 지배하는 아홉 하늘 중 한 명이고 강호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은둔자이기도 했다·
그가 가장 최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십 년 전 바로 북천문의 오랜 역사를 끝낼 때였다·
세상에 알려진 모용율천의 나이는 일흔이 훨씬 넘는다· 하지만 관대승의 눈앞에 앉아 있는 모용율천의 모습은 아무리 잘 봐줘도 서른을 넘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관옥을 깎아놓은 듯한 이십 대 후반의 절세미남 그가 바로 모용율천이었다·
모용율천은 오직 황제에게만 허락되는 용포를 입고 있었다· 검은 흑룡이 전신을 휘감는 용포를·
세간에는 황제가 오직 모용율천에게만 특별히 허락했단 믿기 힘든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일 거라고 믿었다·
그만큼 모용율천은 거인이었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위대한 무인이었다·
모용율천 앞에는 커다란 화선지가 펼쳐져 있었다· 모용율천은 들고 있던 붓을 그대로 화선지에 힘차게 내리꽂았다·
점 하나가 찍혔다· 모용율천은 붓을 내려놓고 자신이 찍은 점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관대승은 숨을 죽인 채 모용율천을 지켜보았다· 운중천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총관이라는 직함도 모용율천 앞에서는 그 어떤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모용율천은 자신이 찍은 점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단순한 점 하나에 무슨 의미가 있기에 저리 바라보시는 것인가?’
아무리 잘 봐줘도 둥그런 점 하나만 덩그러니 존재할 뿐이다· 그 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관대승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을 점을 바라보던 모용율천이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후! 어렵구나· 그렇지 않느냐 대승?”
“제 식견이 모자라 가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관대승이 송구한 표정을 짓자 모용율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네가 미안할 게 뭐 있겠느냐? 괜한 것을 물은 내 잘못이지·”
“무엇을 그리 보신 겁니까?”
“삼라만상(森羅萬象)·”
“예?”
“후후! 농담이다· 그냥 할 일도 없고 지루해서 잠시 미친 짓거리를 해봤어·”
모용율천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받아들이는 관대승은 그렇지 못했다·
‘주군께서는 단순한 점 하나에 삼라만상의 이치를 담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신 것인가?’
세상은 아홉 하늘이 강호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관대승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용율천은 하늘 위에 존재하는 하늘이었다·
그가 반노환동(反老換童)의 경지에 달한 것이 십 년 전의 일이다· 늙어서 거추장스럽던 육신을 벗어던지고 이십 대의 생생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노화를 억제한 것이 아닌 말 그대로 탈태환골(脫態換骨)을 한 것이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이 정도에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모용율천은 달랐다· 그는 오직 용맹정진하면서 무공을 갈고닦는 데만 집중했다·
그렇게 그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그리고 얼마 전 그는 다시 출관했다·
출관을 한 후 그가 한 일이라곤 그저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무적세가의 그 누구도 그런 모용율천의 기행을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무적세가 구성원들의 가주에 대한 믿음은 그야말로 맹목적이었다· 관대승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 관대승의 재능을 알아보고 운중천에 들여보낸 이가 바로 모용율천이었다· 그가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이도 바로 모용율천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관대승의 노력이 가장 컸지만 모용율천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렇게 빨리 지금의 위치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관대승을 바라보는 모용율천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어렸다·
“요즘 세가로 발걸음이 잦구나· 무슨 일이냐?”
“그게····”
관대승은 모용율천에게 장원에서 있던 일과 천살조가 몰살당한 일을 가감 없이 말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단 말이구나· 짐작되는 이는 있느냐?”
“짐작 가는 곳이 몇 곳 있긴 한데 아직까지 확신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흐음!”
“일단 그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시킬 생각입니다만 그래서 몇 가지 재가 받을 것이 있습니다·”
“말하거라·”
“천살조를 대신할 이들이 필요합니다·”
“묵혼대(墨魂隊) 정도면 되겠느냐? 그래도 그 아이들이 천살조보다는 야무지고 강한 축에 속하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혼마를 다시 깨울 수 있겠습니까?”
관대승의 청에 모욜율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적당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모양이구나?”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은 것 같습니다·”
“후후! 네 뜻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주군·”
관대승이 쿵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모용율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잘 꾸며진 가산과 연못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다·
“대승아·”
“예 주군·”
“그 아이는 어떻더냐?”
“그 아이라면?”
“북벽의 후예 말이다·”
“아! 진무원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북벽은 내가 유일하게 경각심을 가졌던 무인이다· 당연히 그의 후예에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구나·”
단순히 무공 수위로만 보자면 북벽 진관호의 무위는 모용율천의 아래였다· 하나 진관호에겐 지닌바 무력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특히 그가 가진 불굴의 의지와 투혼은 아직까지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강합니다·”
“호! 그 정도더냐?”
“최소한 십대장로를 상회하는 무력을 지닌 것이 분명합니다·”
관대승의 대답에 모용율천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만큼 관대승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대단하구나·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그 정도의 무력이라니· 나도 그 아이 나이 때 그 정도는 아니었다·”
“····”
“역시 북천문의 저력은 대단하구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단시간 내에 그와 같은 무인을 키워 내다니 마치 밟고 또 짓밟아도 되살아나는 잡초 같아·”
모용율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관대승은 숨을 죽이고 그런 모용율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잡초를 방치하면 결국엔 가산과 정원을 모두 망치게 되지· 내가 긴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가산과 정원이 망가지는 모습은 보기 싫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관대승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의 어깨엔 잔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게 모용율천은 하늘이었고 그의 말은 곧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늘이 하는 말을 인간에 불과한 그가 거역할 수는 없었다·
“두 번 다시 내 귀에 북천문이라는 단어가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필요하다면 서문화나 심무외에게 도움을 청하거라· 내 말이라고 하면 거절하지 못할 게야·”
“알겠습니다·”
모용율천이 창문 밖으로 펼쳐진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활짝 펴진 손바닥을 오므리면서 하늘을 잡는 시늉을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은 인간의 손바닥에 잡히지 않는다· 모용율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불가능에 도전하는 게 인간의 욕망이다· 그리고 모용율천은 누구보다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자였다·
척마대주를 뽑는 비무대회의 결승에 오른 자가 밀야의 무인이었단 사실이 군웅들에게 던져준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중원의 심장에서 밀야에게 유린당한 치욕은 군웅들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척마대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군웅들은 당장에라도 밀야를 척결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고 많은 이가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운중천은 당장 전운에 휩싸였고 평범한 이들은 전쟁을 예감하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두려움과 광기가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 속에서 유독 빛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창천고성 담수천·
그는 심원의를 위기로 몰아넣은 조월을 단숨에 격살하고 중원의 자존심을 되찾은 영웅이었다·
이미 칠 년 전 백인비무행으로 위명을 드높였던 그가 화려하게 세상의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담수천의 이름을 연호했고 그가 중원의 구성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까지 강호의 최정상 기재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칠소천이었다· 일곱 개의 작은 하늘·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북검고성(北劍孤星)·
진무원과 담수천을 묶어 하나로 표현한 말이다·
사람들은 칠소천 위에 북검고성이 존재한다고 떠들었다· 그리고 북검과 고성이 싸우면 어떻게 될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게 나뉘었다·
어떤 이들은 북검이 이긴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고성이 이긴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조만간 두 사람이 우열을 가리기 위해 격돌할 거라고 예상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북검고성을 비교하는 것이 사람들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비록 시차가 있었지만 운중천에서 있던 일은 천하 각지에 전해졌다·
운중천 북천지부(北天支部)도 마찬가지였다·
북천지부는 칠 년 전 잿더미가 된 북천문의 터전에 세워졌다· 중원의 북부에서 밀야의 준동을 감시하고 초기 준동을 억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장천우는 북천지부의 지부장이었다·
그에겐 북천문을 대신해 밀야의 준동을 초기 억제할 막대한 책임이 주어졌다·
장천우는 운중천에서 전해진 소식에 누구보다 놀랐다·
“그러니까 북천문의 후인이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이구나·”
북천문의 터전 위에 세워진 북천지부다· 북천문이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졌고 그들이 걸었던 형극의 길을 대신 걸어야 하는 자리였다· 당연히 그가 느끼는 감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의 뜻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이제 와서 다시 북천문의 후인을 세상에 내보내다니·”
그때였다·
“으아악!”
밖에서 갑자기 커다란 비명성이 들려왔다·
장천우는 본능적으로 변고가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무기를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높다란 담장을 넘어 일단의 무리가 난입했다· 그들은 북천지부 곳곳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불의의 급습에 북천지부의 무인들은 변변히 대응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웬 놈들이냐?”
장천우가 노성과 함께 커다란 청룡언월도를 휘둘렀다· 일진광풍과 함께 강렬한 도기가 침입자들을 향해 몰아쳤다·
“컥!”
비명과 함께 세 명의 침입자가 허리 아래로 두 동강이 나서 쓰러졌다· 하지만 장천우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곳을 습격해 올 만한 존재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 밀야인가?”
사방에서 밀야의 무인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의 악령처럼 숫자를 불리는 그들의 모습에 장천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들은 악마처럼 북천지부의 무인들을 도살했다· 장천우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혼자만으로는 그 모두를 감당할 수 없었다·
갑자기 밀야의 무인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났다·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난 북천지부의 무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것은 장천우도 마찬가지였다·
‘기세를 올리던 저들이 갑자기 물러나다니· 무슨····’
뚜다다당!
갑자기 장내에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하던 무인들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으 음공이다·”
“크아악!”
그들의 고막이 터져 피가 흘렀다· 내공이 고강한 자들은 서둘러 심맥과 고막을 보호했지만 소용없었다· 거문고의 음률은 고막을 건너뛰어 그들의 두뇌를 직접 공격하고 있었다·
가공할 음공에 북천지부의 무인들이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그것은 장천우도 마찬가지였다·
심맥이 끊어지고 고막이 터져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힘차게 고동치던 심장이 파열되어 더 이상 혈액이 공급되지 않았다·
‘크윽! 북천문만 건재했어도····’
죽음 직전에 든 마지막 생각이다·
거문고 음률이 울려 퍼지고 일각이 지났을 때 장내에는 살아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제야 늙은 악공이 무인들의 호위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공음마(天空音魔) 윤천학·
제자 금단엽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가 나선 것이다·
중원을 향한 밀야의 총공세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 선봉에 윤천학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