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 8장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1)
진무원은 청인을 업고 장원으로 돌아왔다· 당기문이 급히 달려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선 그를 살려주십시오·”
“알겠네·”
당기문은 급히 청인을 눕히고 진맥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미려야 어서 옥황단(玉皇丹)을 내오거라·”
“예 숙부님·”
옥황단은 당문의 비전 구명환으로 효능이 소림사의 대환단에 필적한다는 명약 중의 명약이다·
당미려가 옥황단을 가지러 간 사이 당기문은 급히 청인에게 침술을 펼쳤다· 청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기식이 엄엄하고 혼자의 힘으로는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진무원은 당기문이 청인을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자책감이 가득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진월이 물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진무원은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하진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청인이 종적을 들킬 정도라니 그들의 이목이 실로 대단한 모양이구나· 그가 침투했던 장원은 가봤느냐?”
“오는 길에 들러봤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종이 쪼가리는커녕 사람이 머문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무섭도록 주도면밀한 자들이구나· 단지 한 번 들켰다고 어렵게 구축했을 거점을 포기하다니·”
“그렇습니다·”
진무원이 하진월의 의견에 동의했다·
청인이 추적한 자들은 무서울 정도로 단호했다· 일단 꼬리가 밟혔다고 판단하자 하등의 망설임 없이 잘라냈다·
“실로 무서운 자들이구나·”
하진월의 시선이 청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청인의 전신에는 고슴도치처럼 은침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사이 당미려가 옥황단을 가져왔다· 당기문은 옥황단을 물에 개어 청인의 입에 흘려 넣었다· 그러자 창백하기만 하던 청인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아왔다·
“휴! 고비는 넘긴 것 같구나·”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수고는···· 앞으로 한 이틀 정양하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게야·”
당기문이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뜻밖의 사태에 그도 엄청나게 긴장했던 것이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니 모두 나가시게· 나와 미려가 그를 지켜보겠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너도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은데 조금 쉬거라·”
“예·”
진무원은 당기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밖으로 나왔다· 하진월이 그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온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어떤 자들일까요?”
“글쎄다· 나도 가진 정보가 없으니 확답은 못하겠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우리의 짐작보다 더 오래된 단체라는 것이다·”
“운경 형님을 끌어들이는 대가로 십자혈마공을 주었을 겁니다·”
“현실에 불만이 있는 자들에게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것은 확실히 효율적인 방법이지·”
“화산파에도 그들의 사람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강호 곳곳에 그들의 사람들이 심어져 있는 느낌입니다·”
“일단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옳을 게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모든 계획을 세워야 하니까·”
진무원이 걸음을 멈춰 서고 동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동녘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밤이 끝나고 새벽이 밝아오는 것이다·
진무원은 한참 동안이나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하진월은 그 곁에 서서 붉게 물든 진무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북천문 다시 재건해야겠습니다·”
“드디어 결심을 굳힌 것이냐?”
하진월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그토록 고대하던 말이다· 하지만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그저 진무원이 결심하기만을 기다려 왔다·
누구나 문파는 세울 수 있다· 두 사람 이상만 모여 현판만 걸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급조된 문파가 오래갈 수 있을까?
강호엔 하루에도 수많은 문파가 생겨난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난 후에도 존속하는 문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나의 문파가 만들어져 수백 년의 세월을 존속하기 위해선 수장의 무공과 의지가 절대적이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무공과 힘을 갖춰야 했고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하진월이 본 진무원은 누구보다 강하면서도 불안했다· 강력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힘을 사용함에 있어 항상 부담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북천문이라는 문파가 재건되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유롭게 살라는 아비의 유언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스스로가 문파에 얽매이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하나 오롯이 빛나는 커다란 별 주위엔 다른 별이 모여들게 마련·’
진무원의 주위에도 알아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자신이 그랬고 청인 소무상도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그에겐 북천문의 마지막 후인이라는 극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지지를 이끌어낼 이야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법·’
거기다가 백룡상단의 전폭적인 지원 약속이 있었다· 금전적인 기반도 어느 정도 만들어진 셈이다·
하진월은 전신의 피가 뜨겁게 달궈지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문파의 힘이 필요합니다·”
“잘 생각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탁할 필요 없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그저 명령만 내리면 된다·”
진무원의 시선이 하진월을 향했다· 그러자 하진월이 진무원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취했다·
“군사 하진월이 북천문의 진정한 문주 진무원 대협을 뵙습니다·”
“····”
“이 하진월 당신의 의지와 뜻에 따라 행동하는 이가 될 것을 맹세합니다· 이 머리와 의지는 오직 당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존재할 것입니다·”
하진월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경건했다·
이제까지의 진무원과 지금의 진무원은 달랐다·
힘을 가진 자가 의지를 확정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정했고 그 길은 하진월이 걷고자 하는 길과 일치했다·
자신의 앞에서 파고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무력을 가진 자가 뜻을 정했으니 그가 바로 진정한 자신의 주군이었다·
하진월의 달라진 태도에 진무원은 당황했다· 그러나 하진월의 눈에 담긴 굳은 의지를 보고는 자신 역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함을 깨달았다·
이제까지의 어정쩡한 관계로는 안 된다·
북천문을 다시 세우고 문주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그에 걸맞은 변화가 있어야 했다· 하진월은 그 사실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하진월의 곁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의 결심에 이 소무상도 한 팔을 보태겠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굳은 의지가 불타는 눈으로 진무원을 바라보는 이는 소무상이었다·
잠시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진무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어나십시오· 두 분은 새로이 시작하는 북천문의 첫 번째 두뇌와 검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주군!”
그제야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진무원의 시선이 하진월을 향했다·
“군사께서는 북천문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전반적인 계획을 수립해 주십시오·”
“흐흐! 이미 준비해 놨습니다·”
책사는 준비하고 대비하는 자 그리고 하진월은 누구보다 책사라는 본분에 어울리는 자였다·
그는 이제껏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진무원의 의지뿐이었다·
진무원의 시선이 소무상을 향했다·
“무상 형님은 이제부터 북천문의 새로운 기둥이 되실 겁니다· 검주(劍柱)직을 맡아주십시오·”
“삼생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이 소무상 북천문의 검주가 되어 당신의 적을 상대할 것입니다·”
소무상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세 사람만의 조촐한 출범식이었다·
그들은 믿고 있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초라한 출발이지만 그들의 하나 된 의지가 세상을 바꿀 것이란 사실을·
세 사람의 출발을 멀리서 홀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북천문이라니····”
그는 바로 명류산이었다·
그의 몸에는 아직도 진한 주향과 함께 긴 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취기도 잊고 진무원과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명류산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 ☆
관대승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초토화가 된 공터에 수많은 사체가 나뒹굴고 있다· 산산이 부서지고 찢어져 목불인견의 참상을 연출하는 시신의 모습에도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몰살당한 것인가? 천살조가?”
천살조는 그가 가용할 수 있는 수많은 말 중 하나였다·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허무하게 당할 만큼 힘이 없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관대승이 그들을 그렇게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항상 관대승을 수행하는 마부가 시신들 사이를 거닐면서 살피고 있었다· 그는 끔찍하게 해체된 시신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실로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입니다·”
“종류는?”
“강기를 사용한 무공이라 짐작하기 힘듭니다·”
“강기?”
“예 그것도 고도로 집약된 강기입니다· 이 정도라면 초절정을 넘어선 것이 분명합니다·”
관대승의 얼굴에 처음으로 짜증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초절정을 넘어선 무공을 지닌 자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단 말이군· 추적할 수 있겠는가?”
“힘듭니다· 모든 흔적을 철저히 지웠습니다·”
“흐음!”
“어떻게 할까요?”
“이곳에서 싸움이 있던 흔적을 모두 지우도록· 괜히 다른 아홉 하늘의 시선을 끌어서 좋을 게 없으니·”
“알겠습니다·”
마부의 대답에도 관대승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존재가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관찰을 당한다는 생소한 느낌은 그를 기분 나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관대승이 마차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가주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구나· 세가로 돌아가겠다·”
“알겠습니다·”
마부가 대답과 함께 마차를 몰았다·
그들이 떠난 직후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 사방에 흩어진 사체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공터를 떠난 마차가 도착한 곳은 선도(仙桃)였다· 운중천이 있는 한내에서 불과 수십여 리 밖에 있는 조그만 현으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소외된 곳이다·
마차는 선도 시내를 지나 외곽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에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커다란 장원 한 채가 존재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한 낡은 기왓장과 담장 그리고 웅장하기 그지없는 전각들의 위용이 사람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장원의 현판에는 웅혼한 필체의 네 글자가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무적세가(無敵世家)·
일반적인 장원들이 나무로 된 문을 사용하는 데 반해 무적세가의 문은 쇠로 되어 있었다·
세 치 두께의 강철로 만든 문이 열리고 마차가 무적세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직후 무적세가의 정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굳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