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 7장 감당할 수 없기에 붙잡지 못한다 (1)
군웅들 사이에 숨어 있던 밀야의 무인들은 모두 척살되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평범한 무인으로 위장하고 있어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담수천은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그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내어 응징했다·
군웅들은 그런 담수천의 위용에 열화와 같은 성화와 환호를 보냈다· 그가 아니었으면 군웅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고 운중천과 척마대는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위신이 깎였을 것이다·
하지만 담수천의 극적인 등장으로 오히려 군웅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군웅들과 척마대의 무인들은 담수천의 이름을 연이어 외쳤다·
“담수천! 담수천!”
“창천의 고성이 밀야를 압도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끝이 날 줄 몰랐다· 방금 전까지 침체되어 있던 분위기가 거짓인 것처럼 그들의 환호성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졌다·
진무원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영웅의 등장인가? 극적이군·”
난세는 영웅을 원하는 법이고 군웅들의 기대에 부응한 자가 영웅으로 등극하는 법이다·
그렇게 본다면 담수천은 영웅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작품이던가·”
진무원의 시선이 단상 위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을 향했다· 그녀는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서문혜령은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는 담수천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무원의 시선을 느꼈는지 서문혜령이 그를 향했다·
서문혜령의 입가에는 한줄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직 승자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미소가·
이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곳은 담수천을 위한 자리였다· 남의 잔칫상에 앉아 박수나 치고 있을 생각은 진무원에게 없었다·
진무원은 운중천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등 뒤에서는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그들의 목소리에 진무원은 고개를 저었다·
진무원은 곧장 당문의 장원으로 돌아왔다·
당기문과 하진월 등이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너라·”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진무원은 그들에게 담수천의 존재를 알렸다· 그러자 하진월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역시 담수천이 나왔는가? 서문혜령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구나·”
“담수천이 그 정도인가?”
“백 년 내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자입니다· 보통 재능이 있으면 게으르게 마련인데 담수천은 오히려 광적일 정도로 집착합니다· 아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단어는 그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우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이야····”
당기문은 두말하지 않고 수긍했다·
진무원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류산은?”
“아까 밖으로 나갔다·”
“그렇습니까?”
“비무대에서 보지 못했느냐? 류산도 비무를 본다고 갔는데·”
“길이 어긋난 모양입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구나·”
당기문이 혀를 찼다·
혈견무랑이라는 별호를 얻은 후 명류산은 외출이 잦아졌다· 사람들은 그와 함께하길 원했고 명류산은 그런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고 있었다·
당기문은 그런 명류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독을 복용하는 시기만큼은 칼같이 맞췄기에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출신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당기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당기문의 마음을 읽었는지 하진월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녀석은 괜찮을 겁니다· 당장의 성공에 취해 있지만 본성이 악한 녀석은 아니니까요·”
“자네가 그리 말해주니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자넨 류산을 싫어하지 않던가?”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많아서 인정을 못하는 것뿐이지·”
“그게 그 말 아닌가?”
“다릅니다·”
“나는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당기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진월은 피식 웃으며 진무원에게 말했다·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부르러 가려 했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무상이 기다리고 있다·”
하진월이 진무원과 당기문을 이끌고 장원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는 소무상이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가 진무원을 발견했다·
“주군?”
“무얼 그리 심각하게 보십니까?”
“이것 좀 보십시오·”
소무상이 내민 종이에는 알 수 없는 기호와 숫자가 가득 적혀 있었다·
“뭡니까?”
“현재 운중천에 드나들고 있는 전서구의 수입니다·”
명색이 천하제일의 조직이니만큼 운중천은 수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중요한 정보는 사람이 직접 가지고 오지만 그 외 상당수는 전서구에 의지하고 있었다·
소무상은 추밀당의 당주로 누구보다 많은 전서구를 운용하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운중천의 정보 체계와 전서구의 운용에 대해서도 해박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부터 운중천에 드나드는 전서구의 수가 급증했습니다· 그 수가 평소의 세 배가 넘습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소무상 대신 하진월이 설명했다·
“무언가 급박한 일이 운중천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전서구의 급증은 곧 정보의 폭증을 뜻한다· 정보의 폭증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있거나 운중천 내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움직일 경우에나 일어나지·”
“그럼 운중천에 저희가 모르는 그 어떤 움직임이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 문제는 이 움직임의 끝에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쩌면 밀야의 움직임이 포착된 것일 수도 있겠지· 하나 그게 아니라면?”
“제가 목표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 물론 가정일 뿐이고 확실치는 않다· 하나 너도 만반의 준비는 하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마녀····”
유장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비록 상단의 소상주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근본은 무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무를 익히고 지닌바 힘을 바탕으로 이제까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상단과 함께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볼 것 못 볼 것 다 봤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처럼 목불인견의 참상은 본 적이 없었다·
죽음이 난무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자들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육체는 부서지고 잘라져 바닥에 흩어져 있고 대지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우웨엑!”
그 광경을 본 몇몇 보표가 욕지기를 하기 시작했고 곧 상단 전체로 번져갔다· 그것은 이등명도 마찬가지였다·
호상단주로 수많은 이의 죽음을 봐온 그였지만 이렇게 참혹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은빛의 기류가 은한설을 휘어 감는 순간 장내엔 죽음만이 난무했다· 종남파의 무인들과 곤륜파의 도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은한설을 공격했지만 소용없었다·
은한설은 조그만 태풍이었다· 그녀가 몰고 온 은빛 칼바람은 걸리는 모든 것을 조각내고 분쇄했다·
종남파의 무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했지만 은한설이라는 태풍 앞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했다·
청산 진인은 종남파의 최고 검공 중 하나인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을 모두 풀어냈다· 그의 검은 날카롭고 신묘했다· 하지만 은한설의 은혼기 앞에선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
은한설은 청산 진인이 천하삼십육검을 모두 펼치길 기다려 단숨에 격살했다· 은혼기의 가공할 위력 앞에 청산 진인은 제대로 된 신체 하나 남기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은한설을 공격한 자들 중 숨을 쉬고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끈질기게 공격하던 곤륜파의 도사마저도 은한설의 손에 절명하고 말았다·
그제야 은한설은 공격을 멈췄고 은백색으로 물든 광기 어린 눈동자가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그토록 엄청난 살육을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여전히 깨끗하고 여전히 선녀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장환의 눈에는 더 이상 그녀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마녀 그녀는 마녀가 분명하구나·’
은한설을 바라보는 그의 동공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은마상단의 보표들 그리고 이등명의 얼굴에도 짙은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으으!”
은한설이 바라보자 은마상단의 보표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은한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그들의 얼굴에 어린 공포를 읽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자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길 두려워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녀에게 은근히 애정을 표시하던 유장환마저도 말이다·
‘내가 잘못한 것인가? 나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웠을 뿐인데·’
은한설이 유장환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유장환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 어린 소녀가 두려웠다· 망설임 없이 죽음을 내리는 그녀에게 공포를 느꼈다·
은한설이 물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요?”
“그 그건····”
유장환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그 모습을 본 보표들과 상인들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만일 은한설이 화를 낸다면 자신들 역시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은한설의 시선이 이등명을 향했다· 그러자 이등명도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도 철석간담을 지녔다고 자부했지만 은한설을 보는 그의 눈동자엔 짙은 공포의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등명은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한설이 무시 받았다고 느끼면 또 광기가 폭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으 은 소저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하 하지만 종남파와 곤륜파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왜죠?”
“그들은 절대 원한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먼저 건드린 것은 그들이에요· 난 결코 그들을 먼저 건드리지 않았어요·”
“알··· 고 있습니다· 하나 운중천과 구대문파 같은 거대 문파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모든 것을 자신들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남에게 입힌 상처는 금방 잊어버리지만 자신들이 입은 상처는 결코 잊는 법이 없습니다·”
“난 그들이 두렵지 않아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희는 두렵습니다·”
“····”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입니다· 진정으로 강한 자들은 돈을 가진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구대문파가 저희에게서 등을 돌리는 순간 은마상단은 망합니다·”
이등명은 에둘러 말했지만 은한설은 그의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죄송합니다· 하나 소저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겠습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않아요·”
은한설의 시선이 유장환을 향했다· 여전히 그는 은한설을 보길 꺼려했다·
은한설이 중얼거렸다·
“어제 좋았다고 오늘도 좋은 것은 아닌 법· 인간의 마음이란 갈대와 같아서 조그만 비바람에도 요동을 치는구나· 어제와 오늘이 같고 또 내일도 변함이 없는 자가 진정한 대장부인 법·”
노래 같기도 하고 읊조림 같기도 한 그녀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으 은 소저?”
유장환이 퍼득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은한설은 몸을 뒤로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유장환은 손을 뻗었지만 은한설은 이미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 어떤 미련도 없다는 듯이 걸어가는 은한설의 뒷모습에 유장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 소저·”
“보내줘야 합니다·”
“이 단주님·”
“그녀는 감히 저희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이상 그녀와 엮였다가는 은마상단 전체가 멸문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크윽!”
유장환의 어깨에 잔 경련이 일었다·
머리로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은한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