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5장 잔칫상을 뒤엎는 자가 나오게 마련이다 (1)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명류산은 서럽게 울었다· 상처가 아파서 우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도전이 허무하게 끝난 것이 서러워서 우는 것이었다·
당기문이 위로했지만 그의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진무원은 명류산에게 어떤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조그만 위로 따위가 아니라 혼자 조용히 있을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류산의 패배와 상관없이 비무대회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육백 명이 넘던 인원은 어느새 백여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번 대회에 뽑는 척마대의 인원은 모두 쉰여섯 명· 한 번만 더 이기면 일단은 척마대에 뽑힐 수 있기에 젊은 무인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백여 명 중에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젊은 무인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또한 심원의와 현공휘 같은 창룡회의 무인들과 운외사기도 백여 명에 속해 있었다·
쭉정이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알짜배기만 남은 셈이다·
그들의 목표는 단순히 척마대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최소 부대주 최종적으로는 대주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가장 강한 자들만이 남아서 벌이는 대결이다· 이제까지의 비무와는 차원이 다른 흉험한 싸움이 될 터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최종 본선에 남은 무인들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십대장로를 비롯한 운중천의 수뇌부들이 모두 나올 정도로 마지막 본선 대결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마지막 본선에 오른 자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자는 역시 심원의였다· 심원의는 칠소천의 일원답게 압도적인 실력으로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군웅들은 심원의가 척마대의 대주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 정도로 심원의의 무력은 단연 발군이었고 독보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심원의는 비무대 아래 있는 사람들을 오연히 내려다보았다· 거칠 것이 없었고 눈치 볼 일도 없었다· 그는 이 무대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무대 아래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군웅들을 훑어보던 심원의의 인상이 갑자기 찌푸려졌다·
‘진무원·’
그가 가장 껄끄럽게 생각하는 존재가 군웅들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최대한 평범하게 보이려 하고 있었지만 이미 근처에 있던 군웅들은 그를 알아보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비록 척마대를 뽑는 행사 때문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진무원의 존재감은 아직도 군웅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심원의가 진무원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처럼 운중천의 수뇌부들 역시 그의 등장을 알아차리고 자신들끼리 수군거렸다· 운중천 수뇌부들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무원은 그들의 잔치에 초대된 불청객이었다·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기분을 더욱 나쁘게 하는 것은 그런 진무원을 제재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척마대를 뽑는 행사를 치러야 했다· 진무원에 대한 복수는 그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위안하며 진무원을 노려봤다·
자신을 노려보는 적의 어린 시선에도 진무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외부의 동요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완성한 상태였다· 이 정도로는 그의 내면을 흔들 수가 없었다·
비무대회를 지켜보면서 진무원은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비무대회의 마지막 본선에 오른 자들은 대부분 강호 명문의 제자들이었다· 평소에는 쉽게 펼치지 않는 자파의 비전 절기들을 아낌없이 펼쳤고 진무원은 그들이 펼치는 초식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수많은 갈래로 뻗어 나왔지만 결국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무공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나를 보호하면서 남을 살상하는 것·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무공은 수백 수천 년 동안 발전해 왔고 지금에 이르렀다· 때문에 겉모습은 다를지 모르지만 그 근본을 파고들면 원리는 대동소이했다·
진무원에게 비무대회는 단순한 관람의 장이 아니라 자신의 무공 수위를 높일 수 있는 공부의 장이었다· 무엇보다 젊은 무인들의 대결을 통해 각 문파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소득이었다·
그때였다·
후웅!
갑자기 설화가 나직한 검명을 흘렸다· 뒤이어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떻게 재미는 있느냐?”
조곤조곤한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조운경이었다· 어느새 그가 군웅들을 헤치고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그의 등장에 설화가 검명을 흘리며 경계하고 있었다·
그가 씨익 웃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오늘은 나도 구경 나온 것뿐이니까·”
“그렇게 돌아다녀도 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패권회와 중검보를 추슬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수습될 일이다·”
조운경은 무심코 내뱉은 말이지만 진무원은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수습된다? 누군가 그 대신 수습하고 있다는 것인가? 결국 혼자가 아니란 이야기군·’
진무원은 문득 살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에라도 설화를 뽑아 조운경의 목을 베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의지라기보다는 설화의 의지였다·
그 순간 조운경이 갑자기 근처에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한 걸음 옮겼다· 여차하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방패막이로 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지금 이대로 조운경을 공격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죽는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공격할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조운경을 지켜볼 것인가?
진무원의 결정은 후자였다·
그는 억지로 설화의 살기를 가라앉혔다· 그러자 조운경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는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재미는 있느냐?”
“재미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여전히 고지식하구나·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하긴 그것도 네 매력이겠지·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 변하지 않는 그 완고함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후후! 내 손을 잡지 않겠느냐 무원?”
갑자기 조운경이 손을 내밀었다· 운남에서 수많은 사람을 처참하게 죽이고 십자혈마공을 익힌 그 손이다·
“나는 형님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입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와 손을 잡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따지면 내 아버지도 너의 아버지를 죽였으니까 공과가 상쇄된 셈이 아니냐?”
조운경의 궤변에 진무원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형님의 의지입니까 아니면 형님 뒤에 있는 자들이 그렇게 시킨 겁니까?”
“내 뒤에 누가 있다는 것이냐?”
“쌍면의 수라·”
예상치 못한 진무원의 말에 조운경의 얼굴이 급속히 굳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진무원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알아차렸다·
“너는 번번이 내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역시 그렇군요·”
“그거 아느냐?”
“뭘 말입니까?”
“이로써 확실하게 지옥 불에 발을 디뎠다는 것을· 너는 그 단어를 영원히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됐다·”
“그거 아십니까?”
“····”
“십 년 전 그날 이후 전 단 한 번도 지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진무원의 말에 조운경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봤다·
“으으!”
“왜 이렇게 춥지?”
두 사람의 주위에 있던 이들이 양어깨를 비비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본능이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누굽니까 쌍면의 수라를 사용하는 단체가?”
“그것까지 알게 되면 너는 죽는다· 바로 이 자리에서·”
“상관없습니다·”
“아니 상관있어· 너뿐만 아니라 너와 연관 있는 모든 자들이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하진월 당기문 남수련 백룡상단까지도· 너 하나 때문에 그 모든 이들이 세상에서 말살되는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것이냐?”
“그들이 대체 누구기에····”
“세상은 넓고 네가 아는 지식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너의 알량한 지식으로 세상을 가늠하지 말거라· 멸망의 지름길일지니·”
“····”
“이제 사신의 칼날이 너를 찾을 것이다· 조심하거라· 그래도 한때나마 동생이라고 생각했기에 하는 충고니까·”
조운경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그는 여전히 인근에 있는 사람들을 볼모로 잡고 있었다·
진무원은 조운경이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조운경의 입꼬리에 달려 있는 미소였다·
마침내 조운경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들었죠?”
“들었다·”
대답은 근처에 있던 남자에게서 나왔다· 유난히도 뚱뚱한 몸에 땀을 뻘뻘 흘리는 이십 대 초반의 남자였다·
청인이었다·
언제고 이런 순간이 올 것을 대비해 진무원이 근처에 배치해 둔 것이다·
“그를 추적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물러나십시오·”
“흐흐! 걱정하지 말거라·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기니까·”
청인이 잇몸이 드러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추적을 시작한 것이다·
진무원의 시선이 다시 비무대 위로 향했다· 비무대 위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흑무객 조월과 현공휘의 싸움이었다·
칠소천 중 일인인 현공휘다· 비록 진무원에게 패퇴한 치욕스러운 경험을 했지만 중원의 후기지수 중 그를 당할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현공휘가 가장 신경을 쓰고 경계하는 자는 바로 심원의였다· 같은 창룡회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 척마대의 대주가 된 후 진무원 그자에게 복수하리라·’
그가 이를 뿌득 갈았다·
단순히 척마대의 대원이 되는 거라면 이번만 이기면 됐다· 하지만 대주가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최소 세 번을 더 이겨야 했다· 체력을 안배하면서 이기는 게 중요했다·
현공휘가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조월에게 말했다·
“네놈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거라· 하필 이 순간에 나를 만난 것이 네놈의 가장 큰 패착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네놈이 하는군· 흐흐!”
조월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에 현공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현공휘가 등에 차고 있던 커다란 봉을 뽑으며 조월에게 달려들었다· 극성의 공력이 주입된 봉이 웅웅 봉명(棒鳴)을 토해내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다양한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자 현공휘가 뻗은 봉이 유성처럼 조월을 향해 날아갔다·
현공휘의 봉에는 집채만 한 바위도 단숨에 분쇄할 힘이 담겨 있었다· 조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월이 움직인 것은 현공휘의 봉이 코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의 손이 가볍게 허공을 휘젓는다 싶었는데 현공휘의 봉이 성둥 잘려 나갔다·
그러나 현공휘는 당황하지 않고 곤을 꺼내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곤 역시 조월의 몸에 닿기 직전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이럴 수가!”
현공휘의 경호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는 급히 허리에 차고 있던 낭아도와 월곡도를 동시에 꺼내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 황야에서 맞닥뜨린 늑대가 떠올랐다·
오직 먹이를 향한 집념과 광기로만 가득 차 있던 늑대의 붉은 눈동자가 눈앞의 조월에게 투영되었다·
‘하지만 살아남는 것은 나다· 그때도 그랬듯이·’
쉬아악!
낭아도와 월곡도가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조월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조월이 검은 피풍의를 흩날리며 현공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때문에 현공휘의 낭아도와 월곡도는 헛되이 공기만 가르고 말았다·
“이런!”
현공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조월이 가슴팍까지 파고든 뒤였다·
피풍의에 가려져 있던 손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새까만 손바닥이 현공휘의 가슴에 작렬했다·
퍼엉!
마치 벽력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현공휘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려가던 현공휘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비무대 아래 바닥에 처박혔다·
잠시 꿈틀거리던 현공휘가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
질식할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 비무대회를 치르면서 처음으로 사망자가 나온 것이다·
사망자는 현공휘 그리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는 조월·
흑무객 조월이 비무대 위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문득 조월과 진무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순간 조월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