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 2장 때로는 질시에 눈이 멀기도 한다 (3)
비록 진무원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지만 운중천에서는 척마대를 뽑는 행사를 예정대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 이면에는 진무원에게 쏠린 세간의 관심을 다시 운중천으로 돌리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운중천에서는 이제까지 비밀에 가려져 있던 척마대를 뽑는 방식과 인원 등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발표된 바에 따르면 척마대의 구성원은 모두 쉰여섯 명에 달했다·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척마대주 휘하에 다섯 명의 부대주를 두고 각 부대주 밑에 다시 십여 명의 척마대원을 두게 된다·
척마대 개개인은 임무를 수행하는 각 지역에서 인근 문파들의 전력을 차출할 수 있는 권한과 감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척마대의 차출 요청을 받은 문파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뚜렷한 명분 없이 거부할 경우 운중천의 강력한 제재를 받거나 최악의 경우 운중천에서 퇴출되고 만다·
운중천에서 퇴출된다는 것은 곧 중원의 여타 문파와 관계가 끊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구대문파와 같은 대문파엔 별다른 타격이 없겠지만 중소 문파에게 관계의 단절은 밀야와의 전투에서 보호를 받지 못함을 의미했다·
운중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문파에게 미래란 존재하지 않았다· 최소한 작금의 무림에선 그랬다· 반대로 자파의 무인이 척마대에 뽑힌다면 문파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었다· 때문에 중소 문파에서는 자파의 무인이 척마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해 지원했다·
중원의 미래와 안위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때문에 강력한 무공은 필수 조건이었다· 결국 운중천에서는 비무대회를 통해 척마대의 무인을 뽑기로 했다·
원래 척마대는 무림명숙 세 명 이상의 추천을 받은 자만 지원이 가능했다· 하지만 진무원의 일을 처리하면서 척마대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가 수천 명이나 더 늘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방식을 바꿔야 했다·
무림명숙의 추천을 받지 못한 자들은 삼백여 명으로 줄어들 때까지 따로 예선을 치러야 했다· 물경 십 대 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무력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 후 본격적인 비무대회가 치러진다· 무림명숙의 추천을 받아 예선을 건너뛴 무인들이 합류하는 것이다·
불공평한 기회와 싸움이었지만 그나마도 간신히 척마대를 뽑는 자격을 획득한 이들은 감히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괜히 불만을 털어놨다가 그나마 간신히 얻은 예선에 참가할 기회마저 박탈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척마대를 뽑는 비무대회가 시작되었다·
수천 명의 인원이 참여하는 대회이니만큼 원래의 비무대 외에도 십여 개의 비무대가 주변에 더 세워졌다· 비무대 하나당 세 명의 참관인이 배정되었고 십여 개의 비무대에서 동시에 비무가 진행되었다·
운중천은 금세 비무의 열기로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진무원으로 인해 운중천이 떠들썩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척마대를 뽑는 행사로 옮겨갔다·
비무대 위에서는 태영문(太嶺門) 소속의 젊은 무인과 난화방(亂花房) 소속의 젊은 여제자가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생사대적을 만난 것처럼 서로에게 흉험한 살초를 쏟아냈다·
서문혜령은 채화영과 함께 비무대 한쪽에 서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비무대 주위의 관중들은 젊은 무인들의 쟁투에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두 사람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 생겨날수록 그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져갔다·
그런 군중들의 광기에 채화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들은 벌써 엊그제 일을 다 잊은 모양이네요·”
“사람들은 충격적인 기억을 애써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날의 기억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에요·”
서문혜령이 서늘한 눈빛으로 비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저들이 진무원의 충격적인 등장을 잊은 채 현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계기가 주어진다면 다시금 그에게 열광할 거란 사실을·
서문혜령이 사람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군중들의 광기와 열기를 피부로 느꼈다·
‘살아 있는 강호· 어쩌면 저들이 그토록 원하는 시대가 이런 모습일지도·’
그녀는 문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척마대를 뽑는 행사는 운중천의 아홉 하늘이 계획한 것이다· 서문혜령과 창룡회는 그들이 그린 큰 그림에 편승했을 뿐이다· 어쩌면 아홉 하늘은 그런 결과조차 꿰뚫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라고 자부하고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데 능숙한 서문혜령이지만 조부인 서문화의 마음만큼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서문화는 그녀에게조차도 운중천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을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서문화를 비롯한 아홉 하늘은 이제껏 강호를 통제하는 데 주력해 왔다· 엄격한 질서와 규율을 통해 운중천이 이끄는 대로 강력하게 이끌어온 것이다· 그 때문에 강호의 분위기가 적잖게 침체되어 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와 다시금 강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도대체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시대를 지탱하고 있는 거인들· 그들이 있어 작금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은 분명했지만 새로운 시대를 원하는 자들에겐 거대한 벽이고 절망의 늪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서문혜령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서문화는 그녀에게 조부가 되지만 정상에 서고자 하는 그녀에겐 커다란 벽으로 존재했다·
분명한 것은 서문화를 넘어서야 비로소 그녀가 원하는 시대가 올 것이란 사실이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서문혜령은 결의를 다지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비무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는 연무장 뒤쪽의 조그만 전각이었다·
전각 안에는 창룡회의 무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심원의 좌문호 현공휘 등의 주축 인사들이 모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문 소저·”
“모두 모이셨군요·”
서문혜령이 그들에게 포권을 취해 보인 후 자리에 앉았다·
심원의가 물었다·
“밖의 분위기는 여전하던가?”
“뜨겁더군요·”
“역시 그렇군·”
“아마도 모든 행사가 끝날 때까지 이런 분위기가 계속될 거예요·”
“그래야지· 그래야 엊그제의 기억을 지워 버릴 수 있을 테니까·”
심원의가 이빨을 뿌득 갈았다·
진무원이란 존재가 부각되면서 가장 자존심이 상한 이를 뽑으라면 바로 심원의일 것이다· 그는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른 이가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곤욕스러우면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없었다·
“일단 진 소협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세요·”
“어떻게?”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세요· 지금은 그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크윽!”
“기회는 반드시 찾아와요· 머지않은 시간에요· 내가 약속하죠·”
“알겠다·”
“좋아요·”
심원의의 어쩔 수 없다는 대답에 서문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억지로 불만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의 불만이나 한가하게 들어줄 때가 아니었다·
“비록 진 소협 때문에 시선이 분산된 바가 없지는 않지만 척마대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행사예요· 척마대의 대주와 부대주는 반드시 우리 창룡회에서 나와야 해요· 그래야 그 강력한 권한을 온전히 우리 것으로 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말도록· 창룡회의 대주는 반드시 내가 차지할 테니까·”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현공휘가 큰소리를 쳤다· 말은 안 했지만 다른 이들 역시 그와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단순히 척마대의 일개 대원이 아니라 부대주 이상이었다· 요행이라도 대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단숨에 강호의 핵심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비록 창룡회라는 큰 틀 안에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경쟁자였다· 강호의 명성은 현공휘에게 밀린다고 하지만 그들은 쉽게 대주직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서문혜령이 우려 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척마대의 대주를 노리고 있는 이는 우리뿐만이 아니에요· 아직까지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유수의 명문세가에서도 이제까지 강호에 드러내지 않던 정예 무인들을 내보낼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상대가 될 수는 없던 터· 걱정이 과한 것 아닐까?”
“진 소협의 사례에서도 보다시피 세상에는 종종 예상외의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에요· 방심은 금물이에요·”
“으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행사에는 심 공자님도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보고 저들과 같은 대회에 나가란 말인가?”
심원의는 자존심이 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같은 칠소천에 속해 있는 현공휘도 발아래로 보는 심원의다· 그런 그에게 다른 이들과 함께 비무대회에 참석하라는 말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어요· 이미 변수가 발생했어요· 더 이상 어떤 변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 그러자면 우리 쪽에서도 강력한 패를 동원해야 해요· 이렇게 부탁드리겠어요 심 공자님·”
“끄응! 어쩔 수 없군·”
결국 심원의는 서문혜령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예상외의 많은 인원이 참석했어요· 그 수가 무려 삼천 명이 넘어요· 거기서 어떤 인물이 또 진 소협처럼 툭 튀어나올지 몰라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비무대로 가서 경쟁자가 될 만한 인물을 미리 확인하세요·”
“지금 비무를 벌이고 있는 자들은 강호 명숙들의 추천장조차 받지 못한 미미한 존재들이다· 그들 중에서 우리의 걸림돌이 될 만한 존재가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건가?”
“말했잖아요·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한다고· 가능성이 만분의 일이라 할지라도 미리 예상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해요·”
서문혜령은 강경했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창룡회의 무인들이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서문혜령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분명 선택받은 자들이다· 최소한 또래의 젊은 무인들 사이에선 당할 자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위기감이 없어·’
창룡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명문세가의 자손들이다· 조상 때부터 닦아놓은 탄탄한 기반 아래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무공을 익혀 지금의 실력을 갖췄다·
하지만 탄탄대로를 걷다 보니 이들에겐 명문세가 특유의 자만심과 오만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들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외부의 현상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부족했다·
그녀가 두고두고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특히 진무원이란 존재가 부각된 시점부터 이들의 단점이 너무나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금 창룡회를 구성하기에는 늦었다· 어떻게든 이 구성원으로 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 밖으로 나가보세요·”
“음!”
창룡회의 무인들이 비무장으로 나가고 방 안에는 서문혜령과 채화영만 남았다·
“언니?”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오자·”
서문혜령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채화영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채화영의 경험상 이럴 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 상책임을 알고 있었다·
서문혜령과 채화영은 전각을 나섰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서문혜령이 문득 멈춰 섰다·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 때문이다·
허리에 평범해 보이는 검을 차고 있는 낯익은 무인이었다· 남자도 서문혜령을 발견했는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문 소저?”
“소 부조장 아니 소 당주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녀의 적의 어린 목소리에 남자가 살짝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알아내셨나 보군요?”
“흥! 그렇게 떠들썩하게 했는데도 알아보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가요?”
“으음!”
침음성을 흘리는 남자는 바로 소무상이었다·
서문혜령과의 대화에서 소무상은 그녀가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알아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언제까지 추밀당주라는 신분을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 자체가 무리지·’
그는 어깨를 쫙 폈다·
이제까지는 그녀에게 진무원에 대한 정보를 숨겨야 했기에 저자세로 나갔지만 모든 것이 밝혀진 지금은 홀가분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역시 서문 소저군요· 맞습니다· 제가 추밀당의 당주입니다·”
“대단하군요· 그 오랜 시간 그렇게 철저하게 모든 이를 속여 왔다니·”
“과찬입니다·”
“나를 기만한 사실 절대 잊지 않겠어요 소 당주님·”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엔 오직 냉기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