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2장 때로는 질시에 눈이 멀기도 한다 (2)
운중천은 강렬한 열기와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군웅들은 충격을 받았고 모이는 자리마다 진무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무림이란 세상이 출범한 이래 이렇게 파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진무원은 강렬한 인상을 군웅들에게 남겼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희미해진 북천문의 전설이 다시금 부활했다· 동하평이 증언하면서 운중천은 더 이상 북천문에 관해서 물고 늘어질 수 없게 되었다·
진실이 모두 밝혀졌는데 이 이상 진무원을 압박했다간 어떤 역풍이 불지 몰랐다·
“정말 대단하지 않았냐? 설마 연 보주를 그렇게 쓰러뜨리다니·”
“난 아직도 소름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네· 그런 대결은 생전 처음 봤네·”
“나도 그렇다네·”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진무원과 북천문을 욕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척마대를 뽑는 행사는 관심의 뒷전으로 밀려난 상황이다·
“그나저나 북천문이 밀야와 내통한 것이 아니었다니·”
“그러게 말일세· 그렇다면 북천문은 억울하게 멸문을 당한 것이 아닌가?”
“역시 진 문주가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괜히 아까운 사람만 죽임을 당했구먼·”
“누가 아니라나·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사내대장부셨네· 그 어떤 변명도 없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으셨잖은가? 자신 때문에 중원의 전력이 약화되길 바라지 않으신 게지·”
사람들은 술잔을 나누면서 진관호와 북천문을 추억했다·
그 시간 진무원은 당문의 장원으로 돌아와 운공요상을 하고 있었다· 연천화와의 싸움은 그에게도 심각한 내 외상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치명적인 상처는 없다는 것이다· 진무원은 만영결을 운용하면서 상처를 치료했다·
“휴우!”
진무원이 한숨을 내쉬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운공을 모두 끝낸 그의 눈은 더 깊어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과 발을 몇 번 움직여 보았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진무원이 밀실을 나오자 하진월과 당기문 등이 반가이 그를 맞이했다·
“나왔느냐? 혈색이 좋아 보이는구나·”
“몸은 좀 괜찮으냐?”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아졌습니다·”
진무원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당기문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고생은 네가 다 했지· 수고했다·”
“아닙니다·”
“덕분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젠 누구도 네가 북천문 출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문제 삼지 못할 것이다·”
당기문의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때 하진월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정도에 만족하면 안 되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하려고 무원이가 그 고초를 겪고 제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닌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조만간 재밌는 일들이 벌어질 겁니다· 으흐흐!”
하진월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하진월을 보면서 당기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무지 못 당하겠군· 그냥 지금 자네 모습만 보면 무림 정복을 꿈꾸는 악당이나 다름없어 보여·”
“악당은 제가 아니라 이 녀석이지요· 흐흐흐!”
하진월이 진무원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당미려와 명류산이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하루 만에 진무원은 엄청난 거물이 되어 있었다· 어제의 진무원과 오늘의 진무원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이제 북검이라는 별호를 모르는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진무원을 단순한 후기지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최고의 후기지수로 각광받던 칠소천조차도 그에 비할 수 없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중인들은 진무원의 무위가 아홉 하늘에 육박할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만큼 연천화의 대결에서 진무원이 보여준 무위는 충격적이고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건 명류산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나이 차가 몇 살 나지도 않는데····’
자신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높은 곳에 진무원이 있었다· 괜한 자격지심이 들어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당미려의 뒤에서 진무원의 모습을 훔쳐봤다·
진무원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하진월이 입을 열었다·
“이제 네가 운중천에 들어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운중천도 이 이상 너를 걸고넘어지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지 시기가 아님을 깨닫고 은인자중하고 있을 뿐 분명 뒤에서는 공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겠지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언제 어느 때 놈들의 역공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딱히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알아서 다 해주실 테니까요·”
“흐흐흐!”
“이제 동 당주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죄의 대가를 치러야겠지· 본인도 각오하고 밝힌 거니까·”
“음!”
“왜 마음에 걸리느냐?”
“그건 아닙니다· 단지 신기해서 그럽니다·”
“뭐가?”
“어떻게 그를 설득한 겁니까?”
“흐흐! 비밀이다·”
하진월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진무원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머리를 쓰는 것은 하진월의 몫이다· 그가 진무원의 책사를 자처한 이상 전적으로 그를 믿어야 했다·
“고비는 넘겼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북천문의 무고를 밝혔지만 그렇다고 운중천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운중천은 얻은 것만 있을 뿐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 무엇보다 운중천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서문화는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결코 이번 사태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서문화뿐만이 아니다· 아홉 하늘 중 누구도 움직인 사람이 없다· 운중천 내부의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이렇듯 중요한 행사에 아홉 하늘 중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진월에게도 매우 뜻밖이었다·
‘움직이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인가? 어느 쪽인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
청인에게 자세한 사정을 파악하도록 주문했으니 조만간 정보가 들어올 것이다· 하진월은 그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생각이다·
‘물론 서문화와 별개로 서문혜령도 가만있진 않겠지?’
그녀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하진월이다· 그가 아는 서문혜령은 결코 쉽게 포기하지도 방관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집요하기로 따지면 오히려 그보다 더 지독하다고 할 수 있는 여자가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하진월의 일격에 자존심이 상했겠지만 곧 반격이 들어올 것이다·
‘차라리 어제 그 순간 비장의 한 수를 던졌으면 좋았으련만·’
그랬으면 곤란을 겪었을지언정 속이 후련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문혜령은 인내심을 발휘했고 비장의 한 수를 감출 수 있었다· 그녀의 감춰진 비수는 하진월이 허점을 보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노릴 것이다·
그래도 하진월은 웃었다·
“앞으로 상당히 재밌어질 것이다·”
무려 천하를 놓고 벌이는 머리싸움이다· 그 정도의 팽팽한 긴장감도 없으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하진월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문득 당미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뭐가 말이냐?”
“연 보주가 죽었는데 중검보는 어떻게 될까요?”
“분열을 일으키겠지·”
“그렇게 쉽게요?”
“이미 한번 배신을 한 자들이다· 연천화의 결정이었다고 하지만 야망이 없으면 그리 쉽게 북천문을 배신하지 않았겠지· 물론 그중에는 어쩔 수 없이 연천화를 따른 자들도 있을 것이다· 연천화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없어진 이상 그들끼리 내분이 일어나는 것은 필수다·”
“그러면 진 소협이 중검보를 흡수하면 안 되나요? 그들도 어차피 북천문에서 뻗어 나온 가지잖아요· 이제 북천문이 밀야와 내통했다는 것이 거짓으로 밝혀졌으니 명분은 충분하지 않을까요?”
당미려의 말에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을 위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그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에는 그렇게 되어야겠지· 하나 지금은 아니다· 굳이 무원이 그들끼리의 진흙탕 싸움에 발을 디딜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정리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다·”
하진월은 당미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로님·”
“무슨 일인가?”
“밖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총관부에서 왔다고 전하시랍니다·”
“총관부?”
“안으로 모시게·”
“예!”
당기문 대신 하진월이 대답했다· 그는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낯선 인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진월처럼 만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당기문이 입을 열었다·
“관 총관?”
“하하! 당 대협·”
“총관께서 여긴 어떻게?”
방 안으로 들어온 중년의 남자는 바로 운중천의 총관인 관대승이었다· 관대승의 등장에 당기문은 당혹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관대승은 운중천의 실세 중 한 명이다· 쉽게 움직이지 않는 거물이기도 했다· 진무원의 무고가 밝혀진 이상 운중천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그와 같은 거물이 직접 찾아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곳에 귀한 손님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관대승의 시선이 방 안을 훑다가 진무원에게 고정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잠시 동안 정적이 이어지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이는 관대승이었다· 그가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그쪽이 진 소협이시군요? 전 운중천의 총관인 관대승이라고 합니다·”
“진무원이라고 합니다 관 대협·”
진무원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관대승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역시 듣던 대로 훤칠하시군요· 그날은 제가 일이 있어 연무장에 가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반갑군요·”
그는 깊고 유현한 눈으로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이자?’
순간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되었다·
관대승의 눈빛에는 어떤 적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호의가 가득한 눈빛이다· 그런데도 진무원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바늘로 신경을 쿡쿡 찌르는 것처럼 쩌릿한 그 느낌에 진무원은 관대승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오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얼굴엔 깊은 주름살이 파여 있고 머리에는 희끗희끗 서리가 내려앉았다· 유난히 깊고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긴 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었다·
특별히 강한 내력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전형적인 문사의 얼굴이다· 그런데도 진무원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위화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진무원의 집요한 시선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승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사이 하진월이 명류산과 당미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아쉽긴 하지만 자신들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명류산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하진월의 결정을 군말없이 따랐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하진월은 자리에 앉는 대신 진무원의 뒤편에 조용히 섰다·
먼저 입을 연 이는 관대승이었다·
“밤늦게 찾아와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운중천의 입장을 전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놀라셨다면 사과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이렇게 관 총관이 직접 오시다니 그게 더 대단한 일입니다·”
관대승과 안면이 있는 당기문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가장 당황한 이가 있다면 바로 당기문일 것이다· 그가 아는 관대승은 운중천 밖으로 거의 걸음을 하지 않는 남자였다·
운중천 밖으로 나온 것은 거의 손에 꼽을 지경이고 마지막에 외출한 것도 거의 칠팔 년 전으로 기억했다· 그만큼 관대승은 운중천의 거대한 살림을 이끌어가는 데만 집중했다·
그런 그가 진무원을 보기 위해 운중천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당기문에겐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관대승이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긴말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운중천에서는 어제 있던 사건을 면밀히 검토하고 조사한 결과 진 소협에게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오!”
“단 십 년 전 북천문이 멸문한 사건과는 별개로 처리될 겁니다· 아무래도 일개 당주의 증언만으로 십 년 전 무림의 일대 사건을 재판단하기엔 무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을 두고 착실히 재조사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음!”
환희에 물들었던 당기문의 표정이 금세 실망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진무원과 하진월의 표정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관대승의 얼굴에 살짝 이채가 떠올랐다·
‘역시····’
그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 ☆ ☆
관대승이 장원을 나온 것은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
밖으로 나온 그를 기다리는 것은 평범한 마차 한 대였다· 마부석에는 연녹색 유삼에 죽립을 쓰고 있는 마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대승이 다가오자 마부가 급히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음!”
“성과는 좀 있으셨습니까?”
“있었지·”
관대승이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당문의 장원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까·”
“····”
“잠시 세가로 들어가겠다· 그곳으로 추월을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잠시 후 관대승을 실은 마차가 장원을 떠났다·
관대승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북검 껄끄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