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7장 봄이 와도 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4)
소무상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제는 소무상의 연무장이 된 후원 바닥은 밟히고 짓이겨져서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엽월 설마 이곳에서 다시 만나다니·”
소무상의 입술을 비집고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어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다· 설마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문득 소무상이 검을 꺼내 들더니 한바탕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청운검법(靑雲劍法)이라 불리는 검무를·
흐르는 구름처럼 불어오는 바람처럼 자유로워야 할 청운검법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펼치는 청운검법은 폭풍처럼 사나우면서도 광폭하게 주변을 휩쓸고 있었다·
본래의 청운검법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또 다른 청운검법이었다· 지금 모습이 지난 이 년 동안의 그의 심득이었다·
이제는 청운검법이라 부를 수 없는 검법을 소무상은 끊임없이 풀어냈다· 격렬한 몸놀림에 땀방울이 쉼 없이 흐르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소무상은 청운검법을 멈추지 않았다·
“하아! 하아!”
그렇게 탈진할 때까지 펼치고 난 후에야 소무상은 바닥에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란 놈의 한계가 여기까진가 보구나·”
자신이 천재나 수재가 아니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죽어라 노력한다면 벽을 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맞닥뜨린 현실은 참혹했다·
지난 이 년 동안 죽어라 검을 휘둘렀지만 겨우 이 정도 수준이다· 청운검법이 가지는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겨우 변초만 더했을 뿐이다·
수백 년을 이어온 문파가 괜히 명문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심득을 더해온 그들의 무공은 소무상과 같은 평범한 무사에겐 감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었다·
특히 문파의 비전이 담긴 심법 같은 경우는 절대로 외부에 유출되지 않기에 더더욱 벽이 높았다·
소무상은 상승의 심법을 얻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결코 자파의 제자가 아닌 자들에게 문호를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청운검법의 한계가 소무상의 한계였다· 그리고 소무상은 또 한 번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엽월·”
자신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 남자였는데 지금은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높은 하늘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자괴감에 소무상이 눈을 감았다·
☆ ☆ ☆
은한설은 의자에 앉아 두 발을 까닥거리며 진무원이 음식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제 심원의를 비롯한 외인들이 들어왔음에도 진무원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하루를 보냈다·
아침 산책 후 만경각에 들러 책을 읽고 다시 공방에 들러 검을 만드는 일련의 작업을 한다· 그리고 오후 대부분의 시간은 탑의 지하에서 보냈다·
은한설도 지하에 내려가 본 적이 없어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공을 익히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신기한 것은 그러면서도 전혀 내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는 거지·’
아예 내공을 익히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내공을 익힌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은한설도 만경각의 무서를 확인해서 그것이 얼마나 형편없는 수준인지 잘 알고 있다· 무공의 기초는 닦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상승지경에는 오를 수 없는 잡다한 무서만이 가득했다· 그곳을 만경각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때문에 은한설은 진무원이 설령 무공을 익혔더라도 그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외인들이 북천문에 들어왔다· 자신의 집 마당에 허락 없이 들어와 짐을 푸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진무원의 심정이 어떠할지 가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비가 자결하고 문파가 몰락한 것도 모자라 저들은 진무원의 안방마저 철저히 유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무원은 자신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하여간 음흉하다니까·’
은한설은 피식 웃으며 진무원에게서 신경을 끄고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이제 내공이 육 할 정도 회복된 것인가?’
사령의 도움으로 몸 안에 잠복하고 있던 극독을 몰아낸 후 그녀의 내공은 무척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여름이 되기 전에 내공을 모두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곳에 몸을 의탁할 생각이다· 이곳은 그녀에게 최적의 은신처였으니까·
그때였다·
“다 됐다·”
진무원이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 앞에 밥과 음식을 내왔다·
“오늘은 소고기로 만든 화과네?”
은한설이 반색을 하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 황숙이 가져왔거든· 상하기 전에 먹어치워야지·”
“겨우내 양고기만 먹어서 지겨웠는데 잘됐네·”
“잠깐만 누릴 수 있는 사····”
“사치라고? 나도 알아·”
은한설이 진무원의 말을 끊고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무원도 마주 앉아 젓가락질을 했다·
문득 진무원이 고개를 들어 은한설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자신의 정지되어 있던 삶에 불쑥 끼어든 낯선 소녀· 늘 혼자이던 그의 식사 시간에 수저 하나를 더 놓게 되었고 이제 그녀가 없는 저녁 시간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진무원이 물었다·
“맛있니?”
“먹을 만해·”
“야박하기는· 이 정도면 정말 끝내주는 거라니까·”
“그러니까 먹을 만하다고·”
“쳇!”
진무원이 맥 빠진 표정으로 은한설을 바라봤다· 대답과 달리 은한설은 너무나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다· 그 모습에 진무원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오늘은 화과가 좀 짠 거 같은데?”
“오랜만에 소고기를 먹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겠지?”
“그런가?”
그래도 은한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무원이 그녀의 앞에 물잔을 내밀었다·
“마셔·”
“응·”
은한설이 물잔을 받을 때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무원과 은한설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십시오·”
진무원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검은 무복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에 턱에 수염이 까칠하게 난 강인한 인상의 남자는 바로 전호대주 목운평이었다·
목운평이 은한설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진무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북천문의 소문주인 진무원 공자 맞소?”
그러자 진무원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소문주가 아니란 말이오?”
“소문주가 아니라 문줍니다· 비록 문도는 단 한 명도 없지만·”
진무원의 당당한 대답에 목운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포권을 취하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본인은 사사천의 전호대주 목운평이라 하오· 소주의 전언을 가지고 왔소·”
“전언?”
“당분간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인사도 할 겸 내일 저녁 화천각에서 함께 식사나 하시자 초대하셨소·”
진무원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아무리 몰락했다고 하지만 북천문의 주인은 자신이다· 자신이 주인인 이곳에서 객으로 온 자가 초대를 한다고 하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그 말 진심입니까?”
“소주께서는 결코 허언을 하지 않소·”
“손님이 주인을 초대한다? 재밌군요· 좋습니다· 그 초대 기꺼이 받아들이죠·”
“그럼 내일 저녁 화천각으로 오시오· 혼자 오기 불안하다면 같이 와도 좋소·”
목운평이 진무원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은한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눈빛이 은한설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에 은한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묵묵히 목운평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나 혼자 가겠····”
“나도 가겠어·”
은한설이 불쑥 끼어들어 진무원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목운평이 말없이 포권을 취한 후 물러났다·
진무원이 은한설을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썼다·
“가서 좋을 일 하나 없을 거야·”
“초대라는 말을 꺼낼 정도면 제대로 된 음식도 있겠지?”
“휴!”
진무원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왠지 차게 느껴졌다· 겨울과 봄의 길목에서 시간이 멈춘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