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8장 검을 든 자, 검으로 운명을 결정한다 (4)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실제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최소한 연무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수십 개의 검날이 허공을 난자하고 만장단애에 광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섬뜩한 느낌에 소름이 일어났다·
군웅들은 숨을 죽이고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진무원은 대력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력심의 얼굴은 노기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으며 두 눈에는 광기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가공할 기세가 진무원과 집법당 무인들을 압박했다·
그의 기세를 정면으로 맞받는 집법당 무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집법당주 금주상을 향한 그들의 믿음과 충성심은 그야말로 맹목적일 만큼 대단했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대력심을 노려봤다· 그러자 대력심의 화가 폭발했다·
“그래도 이놈들이···! 금마대(禁魔隊)는 무엇 하느냐? 어서 저 발칙한 것들을 끌어내리지 않고·”
그의 명령에 비무대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금빛 무복을 입은 수십 명의 무인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장로원 직속의 무력 조직인 금마대가 바로 그들이다·
집법당과 금마대 무인이 팽팽하게 대치했다·
그때였다·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화산파의 칠성 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장로 이 무슨 행패요? 당신이 아무리 십대장로 중 일인이라고 하나 집법당의 당주를 이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소!”
“그는 장로의 권위를 무너뜨렸소!”
“내가 보기엔 대장로가 집법당의 권위를 무너뜨린 것 같소만! 이렇게 규율을 무너뜨리면 누가 운중천의 결정에 신뢰를 갖겠소?”
“감히 나를 훈계하는 거요 칠성 진인?”
“훈계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요!”
칠성 진인의 개입에 대력심이 볼을 푸들푸들 떨었다· 그가 화를 폭발하려는 찰나 그의 어깨를 잡는 손길이 있었다·
“그만 자중하시오 대장로·”
같은 십대장로인 유청월이 나섰다· 이 이상 대력심이 제멋대로 날뛰었다가는 오히려 역풍이 일 것을 염려해 나선 것이다· 대력심도 그를 무시할 수 없기에 애써 화를 억눌렀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아무런 감흥이 담기지 않는 담담한 눈동자 수많은 군웅의 시선에도 위축되지 않는 그 당당함에 그만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진무원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시선으로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든 간에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십 년 전 북천문이 멸문하고 아비의 자결을 지켜봤다·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그의 가슴은 바윗돌만큼 단단해졌으며 그 어떤 외부의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굳건함을 갖게 됐다·
대력심 정도의 적의를 가진 시선은 이전에도 수없이 겪어봤다· 사선을 넘나든 경험으로 말하자면 대력심은 감히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격세천변(愅世千變)
아건심족(我健心足)·
세상이 천 번을 변하더라도 나는 굳건한 마음 하나면 족할지니·
왜일까 지금 이 순간 만영결의 구절이 생각난 것은?
‘그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마음 하나· 그거 하나면 족한 것을·’
진무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미소를 본 순간 연천화는 마치 송곳으로 귀를 후벼 파는 듯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저놈!’
비무대 위에 오롯이 서 있는 모습에서 그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북쪽의 벽으로 불리던 남자 그가 질시하던 유일한 무인의 모습이·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냥 이대로 두면 놈은 분명 진 문주처럼 클 것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지금 이 순간 진무원을 처리하지 못하면 영원히 후회할 것 같은 느낌 날카로운 비수가 턱밑에 대어진 듯한 숨 막히는 압박감이 그의 신경을 불길하게 자극했다·
그때 유청월의 시선이 연천화를 향했다·
‘지금이오·’
유청월의 전음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연천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순간 연무장에 모여 있던 군웅들은 시리게 빛나는 검극을 마주하는 공포를 느꼈다·
검신일체(劍身一體)를 뛰어넘는 검즉아(劍卽我) 아즉검(我卽劍)의 경지· 이 경지가 되면 검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게 된다·
그의 눈빛 몸짓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도 절초가 되고 극강의 검식(劍式)이 된다· 그야말로 그의 몸 전체가 훌륭한 명검이나 다름없이 되는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연천화에게 모아졌다· 그의 가공할 존재감이 절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톡!
가볍게 대지를 박찼을 뿐인데 그의 몸은 어느새 비무대 위에 서 있었다·
유청월이 미소를 지으며 연천화를 맞이했다·
“연 보주·”
“이제부터는 내가 하지·”
“그럼 연 보주께 맡기겠소이다·”
이미 사전에 약속된 대화였다· 대력심이 주목을 끌고 유청월이 나서서 다독인다· 그런 연후 연천화가 마무리한다·
연천화는 북천문 출신이기에 명분도 충분했다·
연천화가 진무원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가 불쑥 물었다·
“밀야와 내통했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 무공은 어떻게 된 것이냐? 내가 알기로 북천문에는 네가 익힐 만한 무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밀야와 내통해서 그 무공을 얻은 것이 아니더냐?”
연천화의 음성은 또렷하게 군웅들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의 말은 대력심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다·
“북천문에 남겨진 무공이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연천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진무원의 질문에 마땅히 답할 만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군웅이 모여 있는 앞에서 어떻게 자신이 북천문의 모든 검보를 쓸어갔다고 이야기할까·
“너의 혀가 제법 날카롭구나·”
연천화의 눈빛이 차가워지자 대력심과 남선우가 흠칫 몸을 떨었다· 주위의 기운이 급속도로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으음! 이자의 무공이 이 정도였나? 외기가 내기에 공명하는 수준이라니·’
특히 대력심의 놀람은 남선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역시 십대장로의 일원으로 누구보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하지만 감히 연천화의 기세를 정면으로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그만큼 연천화의 기세와 눈빛은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떤 말을 하든 간에 나는 분명히 네가 밀야의 무공을 익혔다고 확신한다· 네 스스로 무죄를 증명하고 싶다면 당장 그 검을 내려놓고 나와 운중천의 검증을 받아라·”
“어떤 식의 검증을 말씀하십니까?”
“네 스스로 무공을 폐지하면 된다·”
“····”
말도 되지 않는 연천화의 억지에 진무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연천화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나 역시 한때 북천문의 일부이던 사람· 누구보다 진 문주를 존경했다· 하지만 그가 밀야와 내통했단 사실에 절망을 금치 못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연천화의 음성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었다·
“몇 날 며칠을 설득했다· 하지만 진 문주 네 아비는 결국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북천문의 백년 역사를 문 닫게 한 것은 결국 네 아비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이었다·”
“····”
“그런데 십 년이 지난 지금 아비의 잘못된 역사를 네가 번복하는구나· 너의 혈관에는 배덕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스스로 무공을 폐지해서 중원에 그 죄를 사하거라·”
“정말 아버지가 밀야와 내통했습니까?”
“내 눈으로 똑바로 확인했다·”
“확실합니까?”
“그렇다! 감히 내 말을 의심하는 것이냐?”
쩌엉!
연천화의 노성에 군웅들이 양귀를 막으며 비틀거렸다· 순간적으로 진문원도 안색이 핼쑥하게 변할 정도였다· 그만큼 연천화의 내공은 가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연천화가 군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 말에는 추호의 거짓도 없다· 내 명예와 내 모든 것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누가 있어 감히 내 말에 토를 달겠는가? 누가 나 연천화의 말을 의심하겠는가? 그런 자가 있다면 당장 이 비무대 위로 올라오라!”
그 기세와 위압감이 장내를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누가 감히 연천화의 말에 토를 달 것인가? 누가 있어 감히 그의 앞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중인들은 숨을 죽이고 연천화를 바라보았다·
진무원은 입을 다물었다· 중인들은 그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연천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기세가 자신 쪽으로 넘어온 이상 상대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중인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강자의 포효 앞에 약자의 진실 따윈 묻히게 마련이었다· 진무원의 무력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소용없었다·
이곳은 운중천· 이곳에서는 강한 자의 말이 곧 법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그가 강자였다· 이곳에서 진무원이 가진 무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였다· 진무원이 이제까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진즉 알고 있었습니다·”
“무얼 말이냐?”
“숙부가 진실을 조작했다는 것을· 운중천에 조작된 증거를 넘긴 것이 숙부라는 사실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숙부 언제까지 진실을 숨길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너의 혓바닥이 제법 날카롭구나!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너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감히 이 연천화를 모함하다니! 어쩌면 네 아비와 그리 똑같으냐? 나는····”
그때 군웅들 사이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내가 증명할 수 있소이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군웅들 한가운데에 볼품없어 보이는 노인이 서 있다·
노인은 잎이 모두 떨어진 늙고 병든 나무처럼 삐쩍 마른 몸으로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노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연천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연천화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비원당주 동하평?’
오래전 그와 손을 잡았던 자 그리고 그에게 배신당한 자가 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살아··· 있었나?’
그를 제거하기 위해 수십 명의 자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비록 폭삭 늙은 모습이지만 동하평이 분명했다·
동하평이 비무대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군웅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내줬다·
“흐흐! 오랜만이오 검주(劍主)· 십 년 만에 보는구려·”
“으음!”
“나 동하평이외다· 당신의 유혹에 넘어가····”
팟!
순간 비무대 위에서 연천화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동하평의 면전이었다·
동하평이 말하던 모습 그대로 굳었다· 그의 망막에 얼음같이 차가운 연천화의 얼굴이 맺혔다·
“감히!”
쉬악!
보이지 않는 예기가 동하평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연천화의 검이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것이다·
동하평은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의 영역을 벗어난 공격이었다· 몸이 정상이었어도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동하평은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쩌엉!
순간 청명한 쇳소리와 함께 엄청난 풍압이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슬며시 눈을 뜨자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검풍에 흩날리는 적갈색의 피풍의를 보는 순간 그의 망막에 눈물이 가득 찼다·
“아!”
남자의 뒷모습에서 그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남자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북벽이라 불리던 위대한 무인의 뒷모습이·
“너?”
“숙부·”
“네놈이 내 앞길을 막으려는 것이냐?”
어려서부터 검의 길을 걸어온 자 북천문의 모든 검보를 가져가 대성한 자가 진무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진무원은 설화를 빼어 들었다·
치잉! 치이잉!
설화의 요요로운 묵빛 검신이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집법당과 금마대 무인들이 들고 있던 무기가 일제히 검명(劍鳴)을 토해냈다·
“크윽!”
갑작스러운 검의 울음소리에 무인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검은 진무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수많은 검의 포효 속에 북검의 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