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8장 검을 든 자, 검으로 운명을 결정한다 (3)
진무원의 예상 밖의 반응에 남선우의 눈빛이 시시각각 변했다· 조롱에서 놀람으로 놀람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감히!”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무원의 당돌한 대답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이를 뿌득 갈며 진무원을 노려봤다· 진무원은 그의 눈빛에 담긴 허영심과 과한 자의식을 읽었다·
‘이런 자들은 우월한 지위에서 남의 선망 어린 시선을 즐긴다고 진월 형님이 말했지·’
진무원은 피식 웃었다·
하진월은 진무원이 맞닥뜨리게 될 몇 가지 상황을 예견하면서 그럴 경우 누가 단상 위에 오를 것이고 어떻게 상황을 이끌어가게 될 것인지 말해주었다·
남선우의 반응은 하진월의 예측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남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나 자신이 받는 모욕은 절대 참지 못했다·
진무원의 웃음을 본 남선우의 눈빛이 더욱 포악하게 변했다·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선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대는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습니다·”
“밀야와 내통한 것을 부인할 셈인가?”
“그런 적이 없으니까요· 없는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인정할 수 없다? 그럼 본인이 북천문의 후인이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가?”
남선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진무원은 남선우에게서 시선을 돌려 연무장에 모여 있는 군웅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기이한 열기가 담긴 시선으로 그와 남선우를 주목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그들의 눈에 담긴 집단의 광기를 보았다·
어쩌면 그들에게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타인의 불행을 가장 편한 자리에서 지켜본다는 것 그것도 혼자가 아닌 집단에 속해 본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진무원은 군중 속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맨 앞줄의 하진월이 보였고 당미려와 명류산 남수련의 얼굴도 보였다· 뒤쪽에는 용무성과 철기당의 무인들도 있었다·
하진월은 실실 미소를 짓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굳은 표정으로 사태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무원의 시선이 단상으로 향했다·
십대장로를 비롯한 운중천의 수뇌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인사들이 보인다· 어떤 이는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고 또 어떤 이는 여흥거리를 보듯 흥미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의 얼굴에는 불편함과 노기가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진무원의 눈길을 끈 이들은 연천화와 조운경이었다· 연천화는 적의가 담긴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고 조운경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무원의 고개가 서문혜령과 심원의가 앉아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심원의는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서문혜령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이다· 그들 뒤로 그와 충돌을 일으킨 흑백쌍웅 형제와 현공휘 등의 모습도 보였다·
수많은 이가 오직 그 한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담긴 감정의 편린이 진무원의 가슴을 옥죄어 왔다·
‘아버지도 이런 시선을 받으셨던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평생을 중원을 지키기 위해 한 몸 바쳐온 분이 오히려 중원인들에게 적의가 담긴 시선을 받았을 때의 그 참담한 심정을 이젠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세상의 적의를 감당해야 했던 아비·
이제 십 년의 세월이 지나 아비가 처해 있던 상황을 다시 아들이 마주하게 됐다·
“왜 대답하지 못하는가? 북천문의 후인이라고 대답하지 못할 만큼 떳떳하지····”
“나는····”
순간 진무원의 음성이 폭풍이 되어 연무장을 휩쓸었다· 그에 남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진무원의 시선이 군웅을 향했다· 그는 그들을 향해 자신의 존재감을 아낌없이 표출했다·
“나는 북쪽을 지키던 거대한 벽 북벽 진관호의 아들입니다· 내가 북검 진무원입니다·”
그는 과거를 부인하지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펴고 당당히 세상의 적의에 맞섰다·
후웅!
당당한 그의 음성이 사람들의 가슴에 묘한 울림을 던졌다· 사람들의 눈에 아릿한 빛이 떠올랐다·
남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북천문의 후인이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군·”
“나는 단 한 번도 북천문의 후인이란 사실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호! 자신의 출신을 부정하지 않다니 그래도 그것 하나는 봐줄 만하구나·”
남선우의 이죽거림에도 진무원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이는 오히려 남선우였다·
‘이놈이 무엇을 믿고 이리 당당한 거지?’
수많은 군웅이 바라보고 있다· 적의가 담긴 그들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당당한 진무원의 모습에 약간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남선우가 아니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 아비가 밀야와 내통한 사실도 인정하는가?”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밀야와 내통한 적이 없습니다·”
“북천사주가 증명했고 운중천이 검증했다· 그런데도 부인한단 말인가? 그대의 광오함이 도를 넘는구나·”
“내 아버지는 세상에 당당했고 그 어떤 위협에도 물러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밀야와 평생을 싸워온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위장한 것이겠지·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면서 남몰래 밀야와 야합한 것이 아니던가?”
“설검수사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은 혀를 검처럼 사용하는 것 말고 진짜 남을 위해 검을 사용해 본 적이 있습니까?”
“뭣이라? 감히 지금 나를 비방하는 것인가?”
“그냥 물어보는 겁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검을 사용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을 겁니다· 누군가 말하길 당신은 나서길 좋아하고 참견하길 즐기지만 누굴 돕는 데는 인색하다고 하더군요· 할 줄 아는 건 오직 그 세 치 혀로 사람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뿐·”
“감히!”
남선우의 볼이 푸들거렸다· 하지만 그는 화를 애써 눌러 참았다·
“너의 궤변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나는····”
“나 역시 당신의 궤변을 들어줄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 내가 뇌옥에 갇힌 것은 무한에서 무고한 무인 수십 명을 죽였다는 이유 때문이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그 사건은 쏙 빼놓고 내 아버지와 북천문에 관한 이야기만 언급하는군요·”
“그게 더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십 년 전 내 아버지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그래서 중원과 운중천은 그 어떤 죄도 묻지 않기로 결의했습니다· 당신의 말은 그런 중원과 운중천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겁니다·”
그때 운중천의 인사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누군가 일어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십대장로 중 가장 성격이 급한 금강야차 대력심이었다·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벌게진 얼굴로 진무원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진무원의 시선이 대력심을 향했다·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대력심이 화를 폭발했다·
“죄인의 자식이면 너 역시 죄인! 어디서 그 빳빳이 고개를 드는 것이냐?”
“금강야차 대력심 대협이군요· 당신도 십 년 전 북천문에 왔었지요· 아직도 당신이 북천문의 전각들을 때려 부수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당신 때문에 북천문의 무사들이 수도 없이 다쳤지요·”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이냐? 당할 만하니까 당한 거지! 북천문의 종자들은 애초부터 싹수가 글러먹었다!”
“그 글러먹은 종자들이 중원을 지키기 위해 백 년이 넘는 세월을 피를 흘렸습니다· 대를 이어 중원을 지키고 북방의 거친 하늘 아래서 단 한시도 편하게 지내지 못하면서도 그 거지 같은 자부심 하나 때문에 그 저주받은 땅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당신들이 중원에서 편 가르기나 하고 힘 싸움을 하는 동안 그들은 피를 흘리며 싸워왔습니다·”
진무원의 음성은 폭풍이 되어 연무장을 휩쓸었다·
조용한 자의 분노에 연무장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무인이 움찔했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군웅들은 숨을 죽이고 진무원과 대력심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화산처럼 불길한 긴장감이 비무대와 단상을 지배했다·
“네놈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실로 대단하구나! 하나 아무리 교묘한 말로 꾸민들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네놈은 중원에 들어와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다! 오늘은 그 잔인무도함을 심판하기 위해 모인 자리다!”
쿠우웅!
대력심의 목소리에 실린 강력한 내공에 근처에 있던 북과 큰 징이 공명하며 울음을 토해냈다·
내공의 강맹함과 웅혼함으로 따지자면 운중천에서도 당할 자가 많지 않다는 대력심이다· 그의 외침에 많은 이가 귀를 틀어막았다·
그가 금주상에게 말했다·
“집법당주는 뭐 하는 겐가 어서 그의 검을 빼앗지 않고?”
“아직 그의 죄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뭣이라? 감히 죄인의 편을 드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놈의 공정타령! 그러니까 아직도 출세를 못하고 일개 당주나 하고 있지·”
대력심의 이죽거림에 금주상이 노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그가 십대장로의 일원이라지만 집법당주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비록 직위는 아래지만 법과 규율을 담당하는 집법당의 특성상 가진 바 권한이 더 크기 때문이다·
금주상이 부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이대로 경계하라! 아직 그가 죄인이라는 그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존명!”
집법당의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들의 모습에 십대장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문혜령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역시 진흙탕싸움이 시작되는구나·’
그녀의 시선이 군웅들 앞줄에 있는 하진월을 향했다· 하진월은 뭐가 그리 좋은지 히죽히죽 웃으며 비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진월이 문득 서문혜령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자 하진월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서문혜령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신 마음대로는 되지 않을 거예요· 나 역시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준비해 놨으니까·’
그녀의 시선이 군웅들을 향했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서문혜령은 잠시나마 굳은 표정을 풀 수 있었다·
그때 대력심의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감히 집법당이 장로의 권위에 불복하는 것인가?”
그가 몸을 날려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가 입은 옷이 폭풍이라도 만난 듯 펄럭였다·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그의 가공할 기세에도 금주상은 위축되지 않았다·
“공정을 기하겠다는 겁니다·”
대력심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공정을 논하다니 그렇다면 지금 운중천의 행사가 공정치 않단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명확한 사실에 의거해 일을 처리해야 한단 말입니다·”
“시끄럽다! 장로의 권위로 당장 자네의 직위를 해지하겠다! 금주상은 검을 풀고 비무대를 내려갈 것을 명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 권한과 직책은 십대장로가 아닌 아홉 하늘이 내려준 것· 그분들이 아닌 그 누구도 제 직책을 박탈할 수 없습니다· 고로 저는 이 자리를 끝까지 지킬 겁니다·”
“감히 일개 당주 따위가!”
결국 대력심은 화를 참지 못하고 금주상을 향해 장력을 발출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그의 공격에 금주상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가슴을 얻어맞고 말았다·
쾅!
“크헉!”
금주상이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당주님!”
이제까지 난감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집법당의 무인들이 금주상을 부축하며 대력심에게 검을 겨누었다·
“너희도 감히 장로원의 권위에 반항하겠다는 것이냐?”
대력심의 노성에 십대장로 중 몇 명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저 선불 맞은 멧돼지 같은 자가 결국 사고를 치는구나·’
대력심의 돌발 행동에 장내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같은 십대장로조차 대력심의 이 같은 행동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비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하진월은 히죽 웃었다·
“흐흐! 좋구나·”
고고한 척하는 자들일수록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참지 못하며 자신의 몸에 튀긴 오물 한 방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