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 8장 검을 든 자, 검으로 운명을 결정한다 (1)
운중천의 정문에 서서 벽보를 우두커니 바라보는 십여 명의 무인이 있다· 다른 무인들은 이미 운중천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들의 얼굴엔 피곤한 빛이 가득했다· 실제로 그들은 무척이나 먼 길을 왔고 그동안 제대로 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붉은 전포를 입고 있는 칠 척 거구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등 뒤에는 거대한 용린도가 걸려 있고 허리에는 어른 팔뚝만 한 굵은 육각 단봉을 차고 있다·
천하에 수많은 무인이 존재하지만 이렇게 명확한 특징을 가진 남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용무성· 그가 철기당을 이끌고 운중천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벽보를 보며 혀를 찼다·
“쯧! 결국 이렇게 되었군·”
“이게 운중천의 방식이지요·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아요·”
곁에 있던 종리무환의 표정 역시 그리 밝지 않았다·
벽보에는 기존의 내용에 새로이 추가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바로 진무원의 처분에 관한 것이었다·
감숙성을 떠난 후 그들은 거의 쉬지 않고 이곳을 향해 달려왔다· 그 결과 척마대의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채약란이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운중천에 정체가 밝혀진 걸까? 그렇게 주의가 부족한 사람이 아닌데· 운중천에서 북천문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정말 몰랐나?”
“방심했나 보지·”
“그동안 무명을 쌓다 보니 좀 오만해졌을 수도 있지· 사람이 갑자기 명성을 얻으면 조심성이 없어지거든·”
철기당의 무인들이 다들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종리무환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정체가 드러났다면 그건 분명 의도적일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종리무환에게 모아졌다·
“그는 결코 방심하지도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가 정체를 드러냈다면 분명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말하거라 무환·”
“그에게는 그가 있습니다· 삼뇌수사 하진월·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은 그가 유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흐음!”
용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운남에서 그가 보여준 능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중에서 가장 대단한 능력을 뽑으라면 바로 통찰력이다·
보통 사람에겐 단순한 사건의 나열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상황에게 불과하지만 그가 개입하면 달라졌다· 수많은 상황의 인과관계를 한눈에 파악하고 상황의 흐름을 읽어내는 그의 통찰력은 종리무환도 감히 따를 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진 소협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방관했다? 전 쉬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럼 이 모든 상황이 그가 의도한 것이라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용무성이 갑자기 머리를 박박 긁었다·
“아 제기랄!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그의 동향을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저희도 그가 깔아놓은 판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용무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봤다·
“그간 먼 길을 오느라 모두 고생했다· 보다시피 이제부터는 운중천이다· 행동 하나도 각별히 조심하고 책잡힐 행동은 절대 하지 말거라· 괜히 초장부터 그들의 주목을 끌게 되면 불편해지니까·”
“당주만 조심하면 되오· 사고란 사고는 본인이 다 치면서·”
“그런가? 우하하! 그럼 내가 제일 조심해야겠군· 자 안으로 들어가자·”
용무성이 앞장서 운중천 안으로 들어가고 철기당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종리무환은 마지막까지도 벽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진월은 누구보다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그에게 처음으로 절망감을 안겨준 사람이다· 자신이 서너 수 앞을 생각한다면 그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앞을 내다보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무슨 일인가 벌이고 있었다·
‘조만간 그를 만나야겠군·’
자신의 계산을 벗어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그의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그래야만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높다란 전각과 화려한 풍경으로 대변되는 무한에도 빈민가는 존재했다· 동죽로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성도 무한의 경쟁에서 밀린 자들은 점차 외곽으로 밀려났고 그런 이들이 모여 자연 발생한 곳이 바로 동죽로의 빈민가였다·
거리에는 오물이 가득했고 한쪽으로 흘러가는 조그만 하천에서는 악취가 진동했다· 제대로 씻지 못한 사람들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고 초점 없는 눈동자엔 삶의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빈민가에서도 빈민들 사이의 서열이 존재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끼리도 서열을 나누고 갈취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동죽로에는 밑바닥 세계의 흔한 암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곳에 사는 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쯧!”
하진월은 동죽로의 입구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그의 곁에는 이십 대 초중반의 푸근한 인상의 청년이 함께하고 있었다·
“정말 이런 곳에 그가 있단 말이지?”
“흑월의 힘으로 간신히 알아낸 정보요·”
청년의 말에 하진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결코 누구도 쉽게 믿지 않았지만 청년의 말이라면 달랐다· 청년의 진정한 정체가 바로 청인이기 때문이다·
하진월은 청인에게 한 사람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고 불과 하루가 지나기 전에 청인은 그가 원하는 정보를 건네줬다·
“안으로 들어가야겠군·”
“먼저 들어가시오·”
“왜? 자네는 안 들어가려고?”
“미행하는 놈들이 있소· 그들을 따돌리고 따라가겠소·”
“미행?”
“장원을 나온 직후부터 두 놈이 따라붙었소·”
“수준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놈들이오· 기척은 물론이고 시선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요· 물론 그래 봤자 내가 보기엔 어린아이 수준이지만·”
하진월이 빙그레 웃었다·
“나에게 미행을 붙일 만한 자라면 역시 그녀밖에 없겠군·”
“그녀?”
“서문세가의 독화(毒花)·”
“아 서문혜령!”
“그럼 알아서 따돌리고 좇아오게나·”
“알겠소·”
청인이 자연스럽게 하진월에게서 멀어져 갔다·
“역시 신경을 쓰기 시작했나?”
하진월은 빙그레 웃었다·
책사들의 싸움은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상대의 의도를 알아내 미리 봉쇄하고 역습을 가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보의 수집이 기본이었다· 서문혜령은 책사의 기본에 충실했다·
따라붙은 미행은 청인에게 맡기고 하진월은 동죽로로 걸음을 옮겼다· 낯선 이의 등장에도 빈민가의 사람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경계의 눈빛조차 보내지 않았다·
수없이 빈민가를 드나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그만큼 희망이 없다는 뜻이겠지· 지켜야 할 것이 없으니 경계할 것도 없다는 뜻이고·”
하진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는 이곳이 지옥으로 보였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는 자들이 의미 없이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 곳· 그래서인지 그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진월은 청인이 알려준 대로 동죽로 가장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몇 번이나 빈민들과 마주쳤지만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빈민들이 풍기는 우울한 분위기가 그의 기분마저 씁쓸하게 만들었다· 하진월은 애써 고개를 흔들어 우울한 기분을 털어버렸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동죽로 북쪽의 조그만 집이었다· 집이라고 해봤자 버려진 나무와 거적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움막에 불과했다·
움막 앞에는 추레해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햇볕이 잘 드는 움막 앞에서 웃옷을 벗은 채 이를 잡고 있었다·
“킬킬! 이놈들 보게· 얼마나 많이 처먹었는지 배가 통통하구나·”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톡 하는 소리와 함께 이가 터져 나갔다·
노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면서도 볼품없는 몸에 머리에도 흰 머리카락이 가득해서 늙고 병든 나무를 연상시켰다·
노인은 하진월이 다가서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이를 잡는 일에만 집중했다· 하진월은 잠시 노인을 바라보다 그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럼에도 노인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쭈그리고 앉아 햇볕을 쬐고 있자니 졸음이 밀려왔다· 하진월은 병든 닭처럼 꾸벅이며 졸기 시작했다· 그제야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이를 잡는 것을 멈추고 하진월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하진월이 잠든 척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하진월은 정말 졸고 있었다· 입가에 흘리는 침과 고른 숨소리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노인이 문득 깔고 있는 거적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의 손에는 조그만 비수가 들려 있었다· 길이는 겨우 어린아이 손바닥만 했지만 얼마나 날카롭게 벼려졌는지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비수를 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하진월을 바라보았다· 갈등 어린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노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만 일어나게·”
노인의 말에도 하진월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노인이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야 부스스 눈을 떴다·
“아 깜빡 졸았네· 스읍!”
하진월은 소매로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냈다·
“자넨 누군가?”
“하진월이라고 합니다만·”
“하진월?”
“아마 들어본 적 없을 겁니다· 아직은 무명소졸에 불과하니까요·”
“그렇군· 그런데 내 집엔 어쩐 일인가? 혹시 나를 아는가?”
하진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제까지의 흐리멍덩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손에 들고 있는 비수만큼이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진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살의는 무척이나 강렬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촌각도 버티지 못할 그의 눈빛을 보며 하진월은 생글생글 웃었다·
노인이 다시 물었다·
“내가 누군가?”
“동하평· 당신의 이름은 동하평입니다·”
“그 이름··· 오랜만에 듣는군·”
노인이 눈을 감았다·
애써 냉정함을 가정하고 있지만 그의 어깨엔 끊임없이 잔 경련이 일고 있었다· 마음속에 이는 격동이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다·
“나를 어떻게 찾았는가? 아무도 찾지 못할 거라 자신했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가 당신 입장이라면 어디에 숨어 지냈을까 생각하니 금방 답이 나오더군요· 몇 군데 추려서 알아보게 했더니 역시나 금방 찾더군요·”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으음!”
“그래도 은신처로 동죽로를 선택한 것은 무척 잘한 일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찾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만큼 자신이 뛰어나단 말인가?”
“에···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하진월이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하지만 부인하지는 않았다·
“자네는 내 짐작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군· 그렇다면 정중히 부탁하겠네· 무슨 목적으로 나를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이만 돌아가 주게· 나는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네·”
“정말입니까?”
“무슨 말인가?”
“정말 세상사에 관심이 없냔 말입니다·”
“분명 말했다시피····”
“이곳은 운중천의 지척에 있으면서도 관심에서 벗어난 곳 즉 운중천의 동향을 파악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지역입니다· 그런 곳에서 살아가는 게 정말 우연이라는 겁니까?”
“자네는····”
“북천문 비원당주(秘元黨主) 동하평·”
오랫동안 애써 잊으려 노력한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동하평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북천문을 멸문에 이르게 한 자여 왜 대답을 하지 못합니까?”
동하평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