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7장 봄이 와도 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3)
십여 명의 무인이 호위하는 두 대의 마차가 북천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북방의 거친 바람을 막기 위해 검은 피풍의를 입고 있었는데 깊이 눌러쓴 방립 아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이 무척이나 살벌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뒤에는 짐이 잔뜩 실린 마차와 일꾼들로 보이는 마차가 따라오고 있고 그 앞으로 십여 명의 무인이 호위하는 사두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사두마차 안에는 이제 십칠팔 세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과 그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이는 소녀가 같이 앉아 있고 맞은편에는 여인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가 마주 보고 있다·
여인은 마치 수련처럼 청초한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촉촉하게 젖은 듯한 눈동자가 보는 이의 심혼을 끌어들일 듯 매력적이다· 그녀 곁에 앉아 있는 한두 살 어려 보이는 소녀는 그녀와 반대로 무척이나 생기가 넘치면서 귀여운 상이었는데 마치 야생마를 보는 것처럼 얼굴 가득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녀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도 무척이나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한 가지 흠이라면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것이 사뭇 오만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귀염상의 소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혹시 저기 보이는 게 북천문 아니야?”
소녀의 말에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고루전각으로 가득 차 있는 커다란 장원이 보였다·
“그런 것 같구나·”
“와아! 그럼 이 지겨운 마차에서 해방이구나!”
남자의 대답에 소녀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에 옆에 앉은 여자가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좋으니?”
“그럼 서문 언니는 안 좋아요? 벌써 사흘이나 마차에만 앉아 있었는데·”
“그러게 집에 있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고생길이 될 거라고 분명히 말했거늘·”
“베!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를 차버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소녀의 대답에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소녀는 바로 남자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한 번도 말싸움으로 동생을 이겨본 적이 없었다·
남자의 이름은 심원의· 운중천의 큰 기둥 중 하나인 사사천(邪死天)의 소천주이자 강호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기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귀염상의 소녀는 심원의의 동생 심수아로 사사천의 늙은 괴물들의 총애와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녀가 설혹 울기라도 하면 그날이 사사천이 뒤집어지는 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사사천의 천주인 심무외는 물론이고 늙은 장로들까지 나서서 그 이유를 알아내려 했으니까·
오죽하면 사사천의 소천주는 심원의지만 사사천의 실세는 동생인 심수아라고 할까? 그래서 사사천에서 잔뼈가 굵은 자들은 혹시라도 심무외의 심기가 좋지 않은 날에 보고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 심수아를 앞세우곤 했다·
심원의와 심수아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의 이름은 서문혜령 귀제갈 서문화의 손녀로 문무겸전의 재녀로 강호에 이름이 드높았다· 그녀 특유의 청초한 분위기와 고혹적인 눈빛에 빠진 많은 젊은 무인이 애를 태운다는 소문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었다·
세 사람이 탄 마차를 호위하는 무사들은 사사천의 정예 조직 중 하나인 전호대(戰護隊)의 무인들로 하나같이 일당백의 무위를 자랑하는 절정의 무인들이었다·
전호대를 이끄는 대주 목운평은 혈우검(血雨劍)이라는 별호로 불릴 만큼 살기 어린 검공으로 위명이 자자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짐마차에는 하인들과 한동안 일용할 양식이 가득 실려 있었다· 심수아를 걱정한 심무외가 딸려 보낸 하인들이었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춰 서고 전호대주 목운평이 문을 열었다·
“소주 도착했습니다·”
“음!”
심원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 뒤를 심수아와 서문혜령이 따라 내렸다·
처참하게 몰락한 북천문의 모습에 심원의가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보다 자신이 왔는데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단 사실이 그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
그때 안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급히 뛰어나왔다· 장패산과 그의 부하들이었다·
“헉헉!”
어찌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장패산 등의 입에서는 단내가 풀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전호대주 목운평이 앞으로 나섰다·
“그대가 이곳의 책임잔가?”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살기가 뚝뚝 흐르는 그 모습에 장패산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운중천 외당 삼조장 장패산이라고 합니다·”
“운중천에서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나?”
“서 서신을 받긴 했지만 언제 도착한다는 정확한 언급이 없어서····”
장패산이 급히 변명을 했지만 목운평의 얼굴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그 냉막한 모습에 장패산과 수하들이 진저리를 쳤다·
그때 심원의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됐어 목 대주· 우리가 정확히 언제 올 줄 저자가 어떻게 알겠어? 여기가 무슨 성도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 그보다 우리가 머물 곳은 준비해 두었겠지?”
“예? 옙!”
장패산이 자신도 모르게 부동자세를 취하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기가 뚝뚝 흘러내리는 목운평의 모습도 무서웠지만 이상하게 생글생글 웃고 있는 심원의의 얼굴이 더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다·
‘저 눈 전혀 웃고 있지 않아·’
다른 부분은 모두 웃고 있는데 심원의의 두 눈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완벽하게 정지되어 있는 듯한 그 모습에서 장패산은 어릴 적 본 독사의 눈을 떠올렸다·
“먼 길을 왔더니 이제 좀 쉬고 싶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장패산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전호대와 심원의 등이 따랐다·
서문혜령과 심수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북천문을 둘러보았다· 그녀들도 알고 있었다· 북천문이 얼마나 대단한 문파였는지 말이다·
밀야와의 백년전쟁도 북천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북천문의 한 지류라고 할 수 있는 북천사주조차 중원에서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자리 잡지 않았는가?
이제는 전설이 된 북천문· 지금 그들은 북천문의 옛 영화가 남긴 흔적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전설의 몰락은 언제나 그렇듯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대부분의 전각이 기왓장이 무너지고 벽이 허물어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서문혜령이 안타깝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봤다·
“안타깝네요· 천하의 북천문이 이리 초라한 모습이라니· 한때는 천하제일을 넘나들었는데 이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니·”
서문혜령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북천문의 몰락에 자신의 조부인 서문화가 일조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운중천과 천하가 북천문의 존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이리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지· 강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사냥이 끝난 후의 사냥개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법· 북천문도 그런 세상의 이치에 의해 몰락했으니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게야·”
“하여간 내 오라버니지만 밥맛없는 말만 골라서 한단 말야·”
심수아가 끼어들어 초를 지자 심원의의 얼굴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너?”
“베! 좀 경외심을 가지라구· 북천문이잖아 북천문·”
심수아는 심원의의 반응에 상관없이 북천문을 둘러보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북천문에 온 것이 설레는 듯했다· 그런 심수아의 모습이 못마땅했지만 심원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싸움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고 괜히 울리기라도 했다가는 그 후환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심원의가 심수아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서문혜령이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장패산은 심원의 등을 화천각으로 안내했다·
지난겨울 동안 장패산과 삼조원들은 화천각의 보수에 매달렸고 그 결과 지금은 꽤나 그럴듯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장패산이 화천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중에서 제일 멀쩡한 곳입니다· 지난 겨우내 보수했으니 그래도 쓸 만할 겁니다·”
“흠!”
심원의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다른 전각들이 얼마나 엉망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지 보았다· 거기에 비하면 화천각은 궁궐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원의가 목운평에게 말했다·
“하인들한테 일 층을 주고 전호대가 이 층을 쓰도록· 삼 층은 우리가 쓰지·”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심수아가 장패산을 빤히 바라봤다· 그에 장패산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듣기엔 이곳에 북천문의 후인이 아직 남아 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소저·”
“그는 지금 어디 있나요? 우리가 도착했는데 왜 나와 보지 않는 거죠? 이곳의 주인이라면 당연히 나와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장패산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지난겨울에 망신을 당한 이후 진무원의 얼굴을 통 보지 못했다· 진무원도 두문불출한데다가 그들 역시 화천각을 보수하느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과 달리 진무원에게는 심원의 일행을 마중 나와야 할 어떤 의무도 없었다· 진무원은 운중천 소속이 아닌 북천문의 주인이었으니까·
그때 서문혜령이 심수아 옆에 서며 말했다·
“이곳에서 손님은 우리야· 그러니 짐을 정리한 다음 우리가 찾아가는 게 옳아·”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일단 방이나 정리하도록 하자·”
“알았어요· 언니 말을 따를게요·”
“고마워 아매·”
서문혜령이 심수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짐을 든 하인들이 따랐다·
심원의가 그 뒤를 따라 화천각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장패산을 돌아봤다·
“그의 이름이 뭐랬지?”
“누구?”
“북천문의 주인이라는 자 말이야·”
“아 지 진무원이라고 합니다·”
“진무원? 곧 보겠군·”
심원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화천각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전호대가 따랐다·
대주 목운평을 필두로 전호대가 삼조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이 전신을 훑을 때마다 삼조원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능적으로 전호대 무인들이 자신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맨 마지막 전호대원의 모습이 소무상의 눈에 화인처럼 각인되었다· 전호대원이 소무상을 알아봤는지 미소를 지었다· 비릿한 내음이 물씬 풍기는 그런 미소를·
‘엽월 어떻게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