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 7장 앉아서 폭풍을 부른다 (1)
조운경의 동공에 은은한 홍광이 떠올랐다· 수면 위로 퍼져 나가는 파랑처럼 홍광은 쉴 새 없이 일렁거렸다· 보는 이의 넋을 빼앗는 사이한 붉은 눈빛에 진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알았느냐?”
조운경의 목소리마저 사이하게 바뀌었다· 그의 목소리에 뇌옥 안의 공기가 불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검산에 가봤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진무원의 대답에도 조운경은 놀라지 않았다· 사이하게 변한 그의 얼굴은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전혀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이거 곤란하구나·”
“뭐가 말입니까?”
“내가 십자혈마공을 익힌 것은 비밀이라서 말이야·”
“숙부님도 모르셨습니까?”
“짐작은 하셨겠지·”
“언제부터 익히셨습니까?”
“비밀이란 말이야 절대로 외부에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사실을 말하는 거야· 그런데 네가 그렇게 물어본다고 순순히 대답해 준다면 내가 뭐가 되겠느냐?”
“북천문에 있을 때부터였습니까?”
“쯧! 말했잖느냐? 비밀이라고·”
조운경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간 그 순간 갑자기 진무원과의 사이에서 퍽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운경과 진무원의 몸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사이에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연신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기류가 흔들렸다·
후웅!
뇌옥 안의 공기가 요동치자 철창과 각종 기물이 웅웅 소리를 내며 공명을 일으켰다·
굵은 철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과 같은 고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조운경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류가 마치 수만 마리의 뱀처럼 갈라져 진무원의 모공을 파고들려고 했다· 하지만 진무원의 몸에 닿기가 무섭게 붉은 기류는 픽픽 터져 나갔다·
“제법이구나·”
조운경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번 한 수로 진무원의 공부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단단하기가 성벽과 같고 굳건하기가 거대한 암산과 같다· 직접 확인하지 않았으면 느낄 수 없을 만큼 은밀하면서도 드러난 존재감은 태산과 같았다·
십 년 만에 만난 진무원은 거목이 되어 있었다·
“다행이구나· 네가 더 크기 전에 네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서· 하나 너는 너무 성급히 네 자신을 드러냈다· 그것이 너의 패착이 될 것이다·”
강호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것도 당금 강호를 이끌어나가는 무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는 것은 한겨울에 알몸으로 북방의 평원에 홀로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숨을 곳도 없고 가릴 것도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채 수많은 이에 의해 분석당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관찰당한다· 무공의 장단점이 분석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인간관계마저 속속들이 파악된다·
드러나지 않은 적은 무섭지만 모든 것이 분석된 적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앞으로 진무원을 상대할 적들은 그렇게 분석된 자료를 통해 투입할 전력을 결정할 것이다·
절정고수 백 명을 상대할 수 있다면 백열 명을 투입할 것이고 이백 명을 상대할 수 있다면 이백열 명을 투입할 것이다· 강호와 운중천은 충분히 그럴 능력과 저력이 있었다·
조운경이 십자혈마공이라는 마공을 익히고도 철저히 숨기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뭐가 말이냐?”
“형님이 십자혈마공을 익힌 것을 미리 알게 되어서 말입니다·”
“흥! 그게 뭐 어쨌단 말이냐? 십지혈마공 또한 강해지기 위한 한 방편· 강호인이 강해지는 꿈을 꾸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냐?”
조운경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그의 얼굴엔 일말의 죄책감이나 동요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란 말입니다· 형님을 상대하는 데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아도 되니까요·”
조운경을 만나기 전까지 진무원은 커다란 돌덩이를 가슴에 담고 있는 듯 가슴이 답답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그가 조운경의 아비인 조천우를 죽인 것은 사실이기에·
하지만 조운경이 십자혈마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보이지 않는 족쇄에서 해방됐다· 남은 것은 전력으로 부딪치는 일뿐·
그런 진무원의 마음을 읽었는지 설화가 격렬하게 검명을 토해냈다· 설화를 잡은 손이 저릿저릿해져 오며 격렬한 통증이 가슴을 자극했다·
설화가 요기를 흘려냈다· 그에 반응해 조운경의 기세 또한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주먹 한번 휘두르지 않고 발걸음 한번 옮기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비무보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눈과 귀로 상대의 무력을 가늠하고 기세로 약점을 파악했다· 상대의 허점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은 움직일 것이고 그때가 되면 그들 앞에 놓인 철창 따윈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때였다·
“아직 멀었느냐?”
밖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연천화이다·
그러자 조운경이 서서히 기세를 거둬들이며 웃었다·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구나·”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사기(邪氣)가 사라졌다· 그러자 원래의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 그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진무원도 설화를 진정시켰다·
‘아직은 아니다·’
철창을 베고 조운경과 자웅을 겨루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진월이 그리는 큰 그림이 망가지고 말 것이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 가슴에 인(忍)을 새겨야 할 때였다·
‘약속하마 설화야· 반드시 네 부족의 원한을 갚아주마· 조금만 참거라·’
진무원의 마음이 통했는지 설화의 검명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하지만 진무원의 마음에는 여전히 깊은 울림이 남아 있었다·
조운경이 몸을 돌렸다·
“다시 보자 동생아·”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진무원은 철창 안에서 멀어지는 조운경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도 암류(暗流)의 일부인가?’
“흐흐! 거 시원하게 타오르는구나·”
하진월이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들고 있던 장작 두 개를 모닥불 위로 더 던져 놓았다· 그러자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당기문이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아니 날도 따뜻한데 웬 불놀인가?”
“흐흐! 그냥 이것저것 태울 게 많아서 말입니다·”
“응?”
당기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모닥불을 바라봤다· 모닥불 안에 종이가 뒤섞여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게 뭔가?”
“그냥 잡동사닙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그래?”
당기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가 하진월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무원을 언제까지 차가운 뇌옥에 놔둘 것인가? 슬슬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는가?”
“흐흐! 왜 무원이 꺼내달라고 합니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냥····”
“마음이 복잡하시죠?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돌아가는 꼴을 보면 모두가 개판인데·”
“그래 맞네· 개판이야· 여기저기서 사나운 개들이 목청껏 짖고 있어·”
당기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진월의 말처럼 돌아가는 판국이 난리도 아니었다· 무조건 진무원을 처벌해야 한다는 자들 옹호하는 자들 각자의 이해관계를 놓고 저울질하는 자들까지· 이제껏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모든 문제가 일제히 부상했다·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흐흐! 그럼 쓸 만한 몽둥이 하나만 있으면 되겠군요·”
“몽둥이?”
“미친개들을 때려잡으려면 몽둥이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진월이 불이 붙은 장작 하나를 들고 장난스럽게 휘둘렀다· 그 모습에 당기문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운중천은 진무원으로 인해 요동 치고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들인 진무원과 하진월은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태평한 그 모습에 어쩐지 화가 나려 했다·
그때 하진월의 눈에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껄렁껄렁한 발걸음과 건들거리는 몸짓이 유독 인상적인 남자는 명류산이었다·
그의 등장에 하진월이 눈썹을 찌푸렸다·
“요새 들어 외출이 잦은 걸 보니 살 만한 모양이구나· 왜 밖에 꿀이라도 숨겨두었느냐?”
“꾸 꿀은 무슨··· 그냥 바람이나 쐬려고 나가는 거요·”
“거 말을 더듬는 것을 보니 더 수상한데?”
“에이! 진짜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나?”
명류산의 투덜거림에 하진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명류산이 급히 당기문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독 복용할 시간 되지 않았습니까?”
“거의 된 것 같구나·”
“그럼 어서 먹읍시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습니다·”
명류산이 당기문의 손을 잡아끌었다· 당기문이 명류산에게 끌려가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진월이 그런 당기문을 향해 어서 가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흐흐! 아주 개판이야· 여기서도 으르렁 저기서도 으르렁!”
내친김에 그는 모닥불에 나무를 더 집어넣었다·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면서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갑자기 그의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응?”
하진월이 고개를 들어보니 낯선 얼굴의 중년인이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하진월이 눈을 끔뻑거렸다· 당문의 장원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년인이 재밌다는 듯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순간 하진월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왔구나·”
그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자 중년인이 코웃음을 쳤다·
“흥! 무슨 소리요?”
“네놈 청인이 아니더냐?”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당문의 장원 아닌가?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 그런 곳에 낯선 얼굴이 있다면 당연히 네놈이 아니겠느냐?”
“큭!”
중년인이 재미없다는 듯 코끝을 찡그리며 하진월의 곁에 앉았다·
“생각보다 늦었구나·”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중년인은 하진월의 추측대로 청인이었다· 성도에서 헤어진 그가 다시 무한에 나타난 것이다·
“그나저나 아주 거하게 일을 저질렀더군요·”
“거하게? 아 무원이 뇌옥에 갇힌 일을 말하는구나· 흐흐!”
“그 일 때문에 흑월 내에서도 많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라고 한 일인데·”
“그럴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만 이 이상 과열되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래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천하를 뒤흔들려면·”
하진월의 대답에 청인이 질렸다는 눈빛을 했다·
‘도대체 이 남자는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
진무원이 뇌옥에 갇힌 것을 두고 흑월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진무원과 하진월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이가 달라붙어 분석했다·
그렇게 나온 결론 중 하나가 진무원이 운중천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인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는 이야기지· 그들 중 누구라도 이들을 직접 봤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직접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직접 경험해야만 느낄 수 있는 일이 있다· 진무원이나 하진월 역시 마찬가지의 부류였다· 그들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과소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동안 그들과 함께한 청인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경험한 두 사람은 결코 얕은 지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진월이 청인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잘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손발이 되어 움직여 줄 놈이 필요했는데·”
“흥! 내가 왜 그쪽의 손발이 되어준단 말입니까?”
“흐흐! 이제껏 네놈이 경험한 그 어떤 일보다 재밌는 일이 펼쳐질 거야·”
하진월이 들고 있던 나무로 모닥불을 마구 헤집었다· 그러자 뜨거운 불씨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 한가운데 하진월과 청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