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 6장 옛 인연이 항상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3)
쩌엉!
뇌옥을 울리는 날카로운 기파에 진무원이 눈을 떴다·
마치 수십 개의 날카로운 검 사이에 갇힌 듯한 아찔한 느낌이 진무원의 신경을 자극했다·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절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과 위압감·
천지간에 오롯이 그 혼자만 서 있는 듯한 강렬한 자신감이 공기를 타고 생생하게 전해왔다·
어둠 속에서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마침내 어둠을 헤치고 누군가 그 윤곽을 드러냈다·
마치 쇠꼬챙이처럼 삐쩍 마른데다 체구도 작아 볼품없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남자의 눈은 강렬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잘 정련된 검처럼 날카로운 눈빛은 진무원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의 등 뒤에는 그보다 훨씬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매우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진무원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중년 남자의 강렬한 존재감에 가려 크게 돋보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희미한 횃불 아래 겨우 윤곽만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이다· 하지만 진무원은 단숨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모습은 진무원의 기억 안에 존재하는 모습과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연··· 숙부·”
“역시 너였구나·”
중년의 남자가 진무원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냈다·
소수귀검(素手鬼劍) 연천화·
한때는 북천문의 검이라 불리던 자 그리고 지금은 북천사주라 불리는 남자· 진무원은 그를 숙부라 불렀고 그는 진무원을 조카라 부르며 아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흘러간 추억의 편린일 뿐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차라리 생판 모르는 타인보다 더 냉정하고 차가웠다·
잠시 연천화를 바라보던 진무원의 시선이 그의 뒤에 있는 젊은 무인을 향했다·
“운경··· 형님·”
“오랜만이구나·”
젊은 무인이 다가왔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횃불 아래 선명히 드러났다· 평범해 보이는 얼굴에 약간은 유순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남자는 진무원이 익히 알고 있는 자였다·
조운경· 진무원과 함께 어린 시절을 북천문에서 보낸 권마 조천우의 장남이다· 이제는 원수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 진무원은 무던히도 그를 따랐다·
이제는 아득한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그래서 정말 그런 적이 있었나 싶기까지 한 희미한 기억이 진무원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연천화의 눈에는 불쾌감과 노기 증오 같은 음울한 감정이 범벅되어 있었다·
“잘도 살아 있었구나·”
“숙부도 좋아 보입니다·”
“그간 어찌 살았던 것이냐? 그렇게 살아 있었으면서 왜 중검보에는 오지 않았더냐?”
“제가 좀 바빠서 그랬습니다·”
“그랬구나· 그래도 십 년을 알아온 정이 있는데 찾아왔으면 따뜻한 밥 한 끼 정도는 대접해 줬을 텐데·”
“겨우 밥 한 끼에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숙부·”
“그 정도 용기도 없느냐?”
“항상 눈치만 보면서 살아와서 말입니다·”
두 사람의 날 선 대화는 고수들 간의 비무를 연상시켰다· 그들의 대화에 뇌옥 안의 공기마저 숨을 죽였다·
연천화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의 눈에는 은은한 살기마저 맴돌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철창이 없다면 단번에 검이라도 휘두를 기세이다·
그의 눈빛이 비수가 되어 진무원의 전신을 후벼 팠다· 뜻만으로도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의기상인(意氣傷人)의 경지이다·
진무원이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그의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피를 토하고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연천화에게 진무원은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북천사주는 북천문의 지류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에게 북천문의 정통 후계자인 진무원은 그 존재만으로도 큰 걸림돌이었다·
연천화는 이제까지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 철옹성을 구축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진무원을 다시 만나게 된 순간부터 급격히 흔들리고 있었다·
진무원은 그의 칼날 같은 기세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고 있다· 그 말은 곧 진무원의 무공이 그에게 육박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뜻한다·
‘북천문에 이 녀석이 익힐 만한 무공이 남아 있었던가?’
연천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진무원이 검을 익혔다고 했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북천문에 있던 검보는 그가 모조리 긁어왔다· 진무원이 익힐 만한 검공 따윈 하나도 남겨두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진 문주가 따로 무공을 남겨놨단 뜻이군·’
연천화의 눈에 질투의 빛이 순간적으로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는 북천문의 문주이던 진관호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연천화 역시 천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진관호를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진관호는 연천화를 사심 없이 대했지만 그를 보는 연천화의 심정은 단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진관호의 품을 벗어나 홀로 비상하는 것을 꿈꿨다·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잡았다·
북천문의 멸문 이후에도 진무원의 거취에 늘 촉각을 곤두세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진무원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는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연천화가 물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겠다면 내가 너를 뇌옥에서 풀어줄 수도 있다·”
“북방으로 다시 돌아가란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그곳이 네 고향이 아니더냐?”
“그럼 숙부님의 고향은 다른 곳인가 보군요?”
“너?”
예상 밖의 대답에 연천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래 봤자 너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텐데·”
“그건 숙부님이 걱정해 주실 일이 아닌 듯하군요·”
“역시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 모양이구나· 너도 이젠 어엿한 어른일진대· 하지만 어른이 되면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겠지? 나는 항상 네가 그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고마운 충고 가슴에 새겨두겠습니다·”
“흥!”
연천화가 코웃음을 쳤다· 그의 눈엔 어느새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지금 살심을 품고 있었다·
그에게 북천문은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었고 북천문의 정통 후계자는 베어 넘겨야 할 거목이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허리에 찬 패검이 조금씩 검명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숙부님 잠시 제가 무원과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만·”
이제까지 말없이 지켜보던 조운경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개입은 매우 절묘한 시점에 이뤄져서 연천화는 더 이상 살기를 발산하지 못하고 기세를 거둬들여야 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흥! 난 나가 있겠다·”
연천화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십대장로를 만나야겠구나·’
질겅질겅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연천화는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연천화가 나가자 뇌옥 안에는 진무원과 조운경만이 남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진무원을 바라보던 조운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 보이니 다행이구나·”
“형님도 좋아 보입니다·”
“설마 했다· 그런데 정말 북검이 너였다니 솔직히 뜻밖이었다·”
“그렇습니까?”
“고생 많이 했겠구나·”
“한 번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진무원의 대답에 조운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십 년 전 모든 이가 떠나간 북천문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홀로 버려져 이때까지 살아온 진무원이다·
그 어린 나이에 지옥을 헤쳐 나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진무원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지 그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인 것이냐?”
“뭐가 말입니까?”
“무슨 생각으로 뇌옥에 들어왔느냔 말이다· 강호에 알려진 네 실력이라면 굳이 무한에서 피를 보지 않아도 충분했을 터· 그런데도 너는 살상을 했다·”
“그들이 공격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이냐?”
“그게 사실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렇더냐?”
“그러는 형님은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역시 척마대 때문입니까?”
“그렇다· 아버님의 뜻이 그랬고 당시 돌아가는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척마대가 되시려고요?”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미 이곳까지 왔으니·”
조운경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빌겠습니다·”
“고맙구나· 너 역시 네가 원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길 빌마·”
“진심이십니까?”
“····”
진무원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조운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무원은 그런 조운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조운경은 이내 표정을 회복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슨 뜻이냐? 당연히 진심이지 않고·”
“그런데 왜 묻지 않으십니까?”
“뭘 말이냐?”
“숙부님의 행방·”
순간 조운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너?”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되었을 겁니다· 어쩌면 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런데 왜 묻지 않으십니까?”
“물으면 대답해 줄 테냐?”
조운경의 담담한 대답에 진무원이 철창 앞으로 다가섰다·
“제 기억 속에 있는 형님은 항상 예의바른 분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그 어떤 이에게도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형님이 생각이 깊으셔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형님이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진무원은 조운경이 당연히 조천우에 대해 물어올 줄 알았다· 진무원이 운남으로 간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운남성을 떠남과 동시에 조천우는 행방불명되었다·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진무원과 조천우의 행방을 연관시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도 조운경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진무원에게 조천우에 관해 묻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실 자체가 대단하구나· 그간 무공만 늘은 게 아니라 입담도 늘었구나· 그리고 너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 어떻게 되었느냐?”
“제 손에 귀천하셨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혹시나 하는 의심은 했었다·”
“역시 전혀 슬퍼하지 않으시는군요·”
“지금 충분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다· 이 이상 어떻게 해야 슬퍼하는 것이냐?”
“형님····”
“말하거라·”
“십자혈마공을 익히셨습니까?”
“····”
순간 조운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어갔다· 마치 하얀 종이가 먹물에 물들어가듯 그렇게 인상 분위기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의 입가를 따라 한줄기 호선이 그어졌다·
“어떻게 안 것이냐?”
치잉! 치이잉!
진무원의 대답 대신 설화가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