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 4장 달갑지 않은 만남도 있다 (3)
서문혜령은 한동안 말없이 진무원을 바라봤다· 그만큼 그와의 조우는 그녀에게 큰 충격을 줬다·
칠 년 전 혼마의 습격을 받고 치욕적인 도주를 해야 했던 담수천과 서문혜령이다· 담수천은 한동안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도주 결정을 한 서문혜령을 보지 않기도 했다·
담수천이 마음을 다잡는 데까지 거의 일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후 그는 폐관 수련에 들어가 미친 듯이 무공만 수련하고 있었다·
서문혜령과 심원의는 그날의 일을 묻기 위해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창룡회의 주축 인사들이 밀야의 적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도주했다고 하면 누가 믿고 따라오겠는가?
그렇게 그들은 철저하게 북천문에서 있었던 일을 어둠 속에 묻었다· 그런데 오늘 그 모든 일을 알고 있는 남자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북천문의 마지막 후계자 진무원·
그의 출현은 단순히 북천문의 망령이 되살아난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의 약점을 잡고 있는 자가 출현한 것이다· 그들의 약점은 곧 창룡회의 약점 자칫 잘못했다가는 창룡이 비상을 하기도 전에 추락하게 될지도 몰랐다·
서문혜령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진 소협 어떻게 살아남은 거죠?”
“운이 좋았습니다·”
진무원은 담담히 말했지만 서문혜령은 믿지 않았다·
‘운도 준비한 자에게나 찾아오는 법 그는 우리와 만나기 이전부터 생존을 준비해 온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녀가 함께하면서도 전혀 그런 점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머리가 좋고 총명하다고 자부하는 서문혜령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진무원은 용의주도했다·
서문혜령의 꽉 쥔 주먹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그 때문에 어깨에 잔경련이 일어났지만 정작 서문혜령은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 소협이 정말 북검이 맞나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더군요·”
“그럼 무공은? 우리와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건가요?”
“여러분이 떠나고 난 후 본격적으로 익혔습니다·”
진무원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 여러모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의 확실치 않은 대답에 서문혜령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녀는 냉정하게 판단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과거의 망령이 그녀의 눈앞에 서 있다· 진무원이라는 망령이·
“당신은··· 당신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었다·
진무원은 그런 서문혜령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칠 년 동안 서문혜령의 외모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다운데다 눈빛은 더욱 깊어져 현기를 머금고 있다·
지금 당장이야 갑작스러운 조우에 당황하고 있지만 금세 냉정을 되찾을 거란 사실을 진무원은 알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에 따라 자신의 행보 역시 달라질 것이다·
“후우!”
한참을 진무원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서문혜령이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냉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가문의 심법을 운용하자 잠시나마 머리가 맑아졌다· 그제야 그녀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사정이야 어떻든 진무원이 눈앞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의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당장 진무원이 존재함으로써 벌어질 일의 여파를 생각하고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가 북천문의 정통 후계자라는 것·’
순식간에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과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현실적인 방안 몇 가지를 추려냈다·
‘첫 번째는 그를 이곳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는 것 두 번째는 그를 포섭하는 것 마지막은 그를 이용하는 것·’
그 세 가지 방안이 가장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높았다·
결정을 하기 전에 먼저 진무원의 의중을 파악해야 했다·
“진 소협·”
“말씀하세요 서문 소저·”
“역천을 꿈꾸나요?”
잘 벼려진 칼날처럼 사정없이 파고드는 그녀의 화법에 진무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거창하군요· 역천이라니· 어떤 하늘을 뒤집는단 말입니까?”
“몰라서 묻나요? 그렇다면 대답해 드리죠· 운중천·”
서문혜령의 대답에 진무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부터 운중천이 하늘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현 강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운중천이에요· 하늘 대신이라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어요·”
“그렇군요·”
“아직 진 소협은 제 물음에 답하지 않았어요·”
“한 가지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진무원의 대답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의미를 못 읽을 서문혜령이 아니었다·
“운중천에서의 생존 강호에서의 생존인가요?”
“저를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생존입니다·”
“단순히 생존만 원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 이상을 꿈꾸나요?”
“꿈꾸는 것은 자유 아닌가요? 그 이상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 모르겠군요·”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서문혜령에게는 그의 미소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니 진무원이란 인간과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제야 서문혜령은 확실히 깨달았다· 이제까지의 말은 모두가 할 필요가 없었단 사실을· 애초에 진무원과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태생부터 달랐다·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고 날을 서게 만들었다·
오늘의 만남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밖에 되지 않았다·
“안타깝네요·”
“뭐가 말입니까?”
“그냥 여러 가지로요· 진 소협의 무운을 간절히 빌겠어요·”
“감사합니다 서문 소저·”
서문혜령은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의 등장은 분명 뜻밖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와 창룡회에게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책사라면 이런 상황마저도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서문혜령은 뒤돌아섰다· 진무원은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서문혜령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인가?’
서문혜령이 알았다면 운중천 수뇌부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쿵!
뇌옥의 철문이 둔중한 소리와 함께 닫혔다·
“휴!”
서문혜령이 철문에 기대 억눌렀던 한숨을 토해낼 때 채화영이 다가왔다·
“언니 괜찮아요?”
“난 괜찮아·”
“무슨 일인가요? 그가 언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요?”
“아니야·”
서문혜령은 고개를 저었다· 채화영이 의뭉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단 당주님·”
“예 아가씨·”
한쪽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외당주 단운강이 급히 뛰어왔다·
“그를 풀어주세요·”
“예?”
“못 들었나요? 풀어주라구요·”
“아 그게····”
단운강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서문혜령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금 제 말을 무시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말하세요·”
“방금 전 알아봤는데 이미 집법당까지 보고가 올라가서 제 임의대로 그를 풀어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벌써 집법당에 보고가 올라갔단 말인가요?”
“예·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보고를 한 모양입니다·”
“누가?”
“그게 의문입니다· 수하들은 단속을 단단히 시켰는데·”
단운강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방금 전에 집법당에 보고가 올라간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든 그의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 했을 일이 생각보다 커졌다·
‘도대체 어느 놈이 나를 건너뛰고 집법당에 보고를 올렸단 말인가?’
서문혜령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집법당까지 보고가 올라간 이상 진무원에 관한 사안은 공적인 일이 됐다· 제아무리 서문혜령이라 할지라도 공적인 기록이 남는 사안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집법당주(執法黨主) 금주상은 그녀의 입김이 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추상같은 성격을 가진 원리원칙주의자· 그 때문에 운중천 내에서도 그를 불편해하는 인물이 상당히 많았고 서문혜령 역시 그런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좌문호가 미리 말만 했어도 쉽게 풀렸을 일이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수를 찾아봐야겠구나·’
그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릴 때 누군가 외당의 뇌옥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날씨 더럽게 좋구나· 괜히 술 끊는다고 했나? 지랄같이 당기네· 흐흐!”
남자가 뇌옥 가까이 다가올수록 서문혜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삼··· 뇌수사 하진월·”
서문혜령은 단숨에 남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하진월은 오히려 진무원보다도 더 큰 존재감으로 그녀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남자 하진월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오 이게 누구야? 서문 소저가 아니오? 정말 오랜만에 뵙소이다·”
하진월이 너스레를 떨며 아는 척을 했다·
“삼뇌수사께서 어떻게 여기에···? 운남에 계신 것 아니었나요?”
“얼마 전에 무한에 들어왔소이다· 그런데 동행이 사고치는 바람에 뇌옥에 갇혔다고 하더구려·”
“동행?”
“흐흐! 진무원이라고 아주 멍청한 놈이 있소·”
애써 냉정을 유지하던 서문혜령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지금 진무원 소협을 찾아오셨다고 했나요?”
“어? 서문 소저도 그놈을 알고 있소?”
하진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문혜령을 바라보았다·
부르르!
그는 서문혜령의 어깨에 잔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와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그냥 운남에서 뱃놀이하다 알게 됐소·”
“뱃놀이?”
서문혜령은 하진월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진월은 그녀가 가장 경계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삼뇌수사라는 별호처럼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 쉽게 짐작하기 힘들었다·
이전까지는 그 어떤 책사나 천재도 그녀를 긴장시키지 못했다· 하진월은 머리로 그녀를 긴장시킨 최초의 사람이었다·
단지 하진월만 만났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진월이 제아무리 머리가 똑똑하더라도 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강호였으니까·
하지만 진무원과의 조합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진무원은 북검이란 별호로 불릴 만큼 강대한 무력을 소유한 신흥 강자이다· 거기다 강호인이라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와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운중천에 의해 멸문한 북천문의 마지막 후예라는 사실만으로도 강호인의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진무원과 하진월의 만남은 서문혜령의 신경을 불길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진월이 서문혜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문혜령에겐 그의 미소가 꼭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손으로 심마에 빠지게 한 자가 턱밑까지 다가왔는데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진무원과 함께이다·
‘저들이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 소협이 뇌옥에 갇힌 것 역시도····’
강렬한 위기감이 서문혜령을 엄습했다· 하진월이 그런 그녀를 보며 넉살좋게 말했다·
“그나저나 외당의 뇌옥에 갇힌 자는 쉽게 면회하기 힘들다던데 서문 소저가 힘 좀 써주지 않겠소?”
“제가요?”
“하하! 사정 좀 봐주시오· 이렇게 부탁할 테니·”
서문혜령이 잠시 인상을 썼다·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나오는데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단운강에게 말했다·
“들으셨죠?”
“예 아가씨·”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치를 보던 단운강이 급히 대답했다·
“그럼 두 분의 해후가 즐겁길 빌겠어요·”
“고맙소 서문 소저· 그럼 잘 가시오·”
하진월이 서문혜령을 지나쳐 뇌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서문혜령이 채화영에게 말했다·
“당장 창룡회를 소집해· 지금 운중천에 들어와 있는 자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참석하라고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