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 3장 조그만 원한도 잊지 않는 이가 있다 (3)
진무원과 하진월을 습격한 자객들은 모두 환환살문 소속이었다· 좌문호의 청부를 받은 고산월은 장원에서 진무원을 암살하려 했다· 하지만 진무원이 머무는 장원이 당문의 것임을 알아차린 순간 깨끗이 포기했다·
제아무리 무서울 것이 없는 고산월과 환환살문이라지만 당문은 그들도 감당하기 힘든 무서운 곳이었다· 대놓고 당문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은 외부에서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이곳 객잔이었다·
어떻게든 객잔 내부에서 진무원을 죽일 수 있다면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 고산월의 판단이었다· 고산월은 무한에 들어와 있는 환환살문의 자객들을 이번 암습에 모조리 동원했다·
그가 동원한 자객은 모두 극한의 수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죽음의 관문을 거쳐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살인귀가 되었다· 인성이 말살되었기에 자신은 물론 타인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객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스무 명에 가까운 동료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음은 늘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자객으로 키워지기 위해 선택된 그 순간부터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어야 했고 그만큼 많은 친구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망각의 늪으로 사라져 갔다·
자신들도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진무원을 보면서 그들의 생각은 바뀌었다·
쐐애액!
진무원의 검이 지나간 후에야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소리보다 검이 먼저였고 그의 검이 지나간 후에는 반드시 동료 자객의 주검이 생겨났다·
자객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무인을 상대해 봤다· 당연히 그만큼 많은 무공도 상대하고 견식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누구도 진무원만큼 검의 본질에 가깝게 무공을 펼치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종으로 베고 횡으로 휘두른다· 가볍게 찌르고 후리는 것뿐인데 동료 자객들이 눈을 까뒤집고 픽픽 쓰러졌다· 그리고 잠시 꿈틀거리다 숨통이 끊어져 축 늘어졌다·
진무원은 멸천마영검을 펼치지도 않았다· 그저 검이 가진 묘용을 최대한 살릴 뿐이었다· 그런데도 자객 중 누구도 그의 일검을 받아낸 자가 없었다·
배후에서의 암습도 소용없었다· 진무원은 마치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자객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진월을 공격해 진무원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하진월에게 접근한 자는 예외 없이 사지가 잘려 죽었다· 하진월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진무원의 경고였다·
‘거대한 벽 검으로 이뤄진 철혈의 벽 뚫을 수 없다·’
자객들의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진무원의 가공할 위용에 먼저 마음이 꺾이고 만 것이다· 그들의 동요는 전염병처럼 다른 동료들에게 번져 나갔다· 환환살문의 문주 고산월 또한 휘하 자객들의 동요를 느꼈다·
‘크윽! 이것은 소문보다 더하지 않은가?’
그는 처음으로 좌문호의 청부를 받아들인 것을 후회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환환살문의 명맥이 끊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휘하 자객들이 흘린 피가 객잔을 붉게 물들이고 그들의 잘린 팔다리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그 한가운데 진무원이 있었다·
고산월의 눈에는 그런 진무원의 모습이 악마처럼 보였다· 검을 휘두르는 악마·
‘차라리 좌문호를 죽일 것을·’
그가 이를 뿌득 갈았다·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진무원을 최대한 빨리 죽이고 자객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뿐이었다·
고산월이 검을 빼 들고 진무원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암흑비접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걸음은 마치 어둠을 유영하는 나비의 날갯짓과도 같아 기척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살아남은 자객들이 악착같이 진무원을 공격해 왔다· 고산월을 위해 어떻게든 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파상공세로 진무원의 시야를 가리고 비명을 질러 그의 감각을 흩뜨리려 했다·
‘지금!’
고산월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진무원이 휘하 자객들의 공세에 눈이 팔려 전혀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검이 진무원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슈악!
마치 유성처럼 떨어지는 고산월의 검·
그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번져갈 때였다· 갑자기 진무원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봤다·
순간 진무원과 고산월의 눈동자가 딱 마주쳤다· 고산월 딴에는 은밀하게 기습한다고 했지만 진무원의 전방위 감각에 걸리고 만 것이다·
‘젠장!’
그것이 고산월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갑자기 그의 미간이 화끈해지면서 사고가 뚝 끊겼다· 설화가 어느새 그의 머리를 관통한 것이다·
숨이 끊어진 그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쿵!
수장인 고산월이 죽자 아직 생존해 있는 자객들의 표정이 급속하게 흔들렸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자객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객들에게 정이나 의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유일하게 그들을 통제할 수 있던 고산월의 죽음은 환환살문을 와해시켰다· 자객들이 살길을 찾아 객잔을 뛰쳐나갔다·
그들은 그 흔한 복수를 외치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그들은 자취를 감췄고 진무원은 굳이 그들을 쫓으려 하지 않았다·
스릉!
진무원은 설화를 검집에 넣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신 수십 구가 객잔 안을 나뒹굴고 있는 모습은 아수라지옥도나 다름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진무원 스스로 연출한 지옥이었다· 그 지옥 한가운데 진무원은 우두커니 서 있었고 하진월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무원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수십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비록 그들이 자신을 죽이러 온 자객들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무원은 후회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살고 있는 세계였다· 삶과 죽음이 단 한순간의 판단에 갈리고 방심하는 그 순간 적의 칼날이 숨통을 노리고 파고드는 곳·
강호란 비정한 세계 그 한가운데 진무원은 서 있었다·
단호해야 했다·
그 어떤 도발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그의 적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나를 죽이고 싶으면 직접 나서라·’
그의 의지가 공기를 타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에 하진월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쾅!
갑자기 일단의 무리가 객잔 문을 부수며 난입했다·
회색의 무복을 입은 십여 명의 무인이 검을 빼 들며 소리쳤다·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왔다! 검을 내려놓고 무장을 해제하라!”
그들의 검이 일제히 진무원을 향했다·
진무원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우린 운중천의 외당 소속 무인들이다· 이곳은 운중천의 관할 그 누구도 운중천의 허락 없이 이곳에서 살상을 할 수 없다·”
“운중천 외당?”
진무원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무한은 분명 운중천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누군가의 제보나 미리 함정을 파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올 수 없었다·
외당무인들은 객잔 내부에 나뒹굴고 있는 자객들의 시신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몇몇 이는 아예 토악질까지 했다·
진무원을 향한 검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목불인견의 참상을 연출한 당사자가 진무원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진무원이 그들을 향해 한 걸음 옮겼다· 그러자 외당의 무인들이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가 감히 운중천에 대항하려는 것이냐? 우리를 해치면 운중천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대답만 해주면 순순히 잡혀가죠·”
“그게 뭐냐?”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곳에 도착한 겁니까?”
“우리는 제보를 받았다· 이곳에서 한 미치광이 무인이 닥치는 대로 살상을 하고 있다고·”
“제보자가 누군지 알 수 있습니까?”
“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알려줄 수 없다·”
“그럼 당신들의 안전은 누가 책임집니까?”
“감히 우리를 위협하는 건가?”
외당의 무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떨림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빌어먹을! 이런 고수가 난동을 부린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척마대를 뽑는 큰 행사를 눈앞에 두고 있다· 당연히 치안에 각별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운중천의 입장이었다·
객잔에 출동한 이들은 운중천 외당 사조였다· 조장의 이름은 조춘광· 외당에서도 알아주는 고수였지만 눈앞의 참극을 보고 멀쩡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근래 들어 운중천의 외당무인들이 실전에 투입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내당의 무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었고 운중천이란 배후를 가지고 있단 사실만으로도 여타 무인들에게 항상 양보를 받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고수가 무한의 객잔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제보를 받은 것이 반 시진 전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춘광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외당 사조의 무인만으로도 충분히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을 거라 자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감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였다·
바닥에 나뒹구는 시신의 수만 사십여 구가 넘는다· 그 참혹한 도살극을 연출한 남자가 눈앞에 서 있다· 조춘광이나 사조의 무인 전부가 동원되어도 불가능한 일을 남자 혼자 해낸 것이다· 그 말은 곧 그와 수하 전부가 달려들어도 진무원을 당해낼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그는 운중천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건드리면 운중천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후환이 두렵지 않다면 반항해도 좋다·”
조춘광과 수하들이 진무원을 향해 기세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그들이 피워 올린 기세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무척이나 위태해 보였다·
‘결국 자객들의 암습은 눈속임에 불과했고 진짜는 운중천을 끌어들이는 것이었군·’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제법 복잡하게 머리를 썼다· 운중천의 외당무인들을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운중천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진무원으로서는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이 되었다· 진무원의 시선이 절로 한쪽에 앉아 있는 하진월을 향했다· 하진월은 여전히 처음 그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진월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외당무인들이 또 움찔했다·
‘이자는 또 누구지?’
수라도를 방불케 하는 객잔 한가운데 앉아서 한가로이 차를 마시는 인간이 보통 사람으로 보일 리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더해졌다·
하진월이 진무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잠시 저들과 함께 다녀오거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운중천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하긴 그렇군요·”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엔 하진월을 향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하진월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똥탕을 만들어 볼까나?”
“흐흐!”
객잔에서 차를 마시던 좌문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길 건너 객잔에서 운중천 외당무인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진무원이 있다·
어차피 환환살문의 힘만으로 진무원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운중천의 개입을 유도하기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다·
황학루에서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그는 독단적으로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 그는 사소한 원한도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때는 인생 최대의 수치심을 느꼈다·
그는 창룡회의 모든 힘을 동원해 운중천에 압력을 행사할 생각이다·
“감히 창룡회에 망신을 주고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네놈이 강호에 발붙일 곳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흐흐흐!”
그때였다·
외당무인들에게 포위된 채 걸음을 옮기던 진무원의 시선이 우연처럼 좌문호가 앉아 있는 객잔으로 향했다·
“저 저놈!”
진무원과 시선이 마주친 좌문호는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진무원의 시선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무원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마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