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 3장 조그만 원한도 잊지 않는 이가 있다 (2)
은한설은 차분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재 그녀가 속한 은마상단이 지나는 곳은 감숙성의 천수(天水)라는 곳이다· 감숙성에서 섬서성으로 넘어가는 관도에 위치한 조그만 현으로 교통의 요지 중 한 곳이다·
이곳에서 은마상단은 잠시 머물면서 짐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은마상단이 보여준 행로는 은한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은마상단은 서역에서 들여온 귀한 물건들을 감숙성에 팔았다·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물건은 금세 동이 났고 수레는 텅텅 비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한설은 막연히 은마상단이 돈을 많이 벌었으려니 했다· 하지만 은마상단의 행보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감숙성에 머무는 그 잠깐 사이 휘하의 상인들이 곳곳으로 흩어졌다·
며칠 후 상인들은 감숙성의 특산물을 수레 한가득 싣고 나타났다· 그렇게 수십 대의 수레와 마차가 다시 가득 찼다·
굳이 그럴 것까지 있을까 하는 은한설에게 유장환이 설명했다·
“풍족한 곳에서 물건을 사서 부족한 곳에 물건을 파는 것이 상술의 기본이라오· 이곳에선 서역의 물건이 귀하니 비싸게 판 것이고 이곳의 물건을 중원 내륙에선 구하기 힘드니 다시 비싸게 팔 수 있다오· 이렇듯 물건은 풍족한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흐르고 돈은 그 역으로 흐르오· 이 이치만 알아두어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오·”
벌써 큰 이문을 남겼기에 유장환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너그러워 보였다· 휘하의 상인과 보표들 역시 얼굴 가득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런 은마상단 사람들의 모습은 은한설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배운 것은 오로지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법뿐이었다·
무공이란 결국 궁극의 살인술(殺人術)·
죽이고 없애는 데는 효율적이지만 무언가 생산하고 만들어내는 데는 전혀 쓸모가 없는 기술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자신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은한설은 자신이 세상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유장환과 은마상단 사람들이 은한설의 눈에는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들에겐 자신에게 없는 밝음이 있었다·
자신처럼 어둠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밝은 빛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이 더 눈부시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은한설은 밝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때 은한설의 귀에 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지금쯤이면 운중천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겠군·”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나도 시간과 여유만 있었으면 한번 가봤을 텐데 정말 아깝구먼·”
감숙성에 들어온 이후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운중천에서 척마대를 뽑는 행사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운중천과 요즘 떠오르는 신흥 무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중 단연 으뜸은 북검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신흥 무인이었다·
‘무원·’
그의 이름은 진무원이었다·
은한설은 직감했다· 북검이라는 불리는 젊은 무인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진무원이란 사실을·
돌이켜 보면 그와 함께한 기간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인간다운 시간이었다· 그녀를 설레게 한 유일한 사람·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감정이나 설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감정은 마모되었고 외부의 그 어떤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스승이 그토록 원하던 경지에 이르렀지만 정작 은한설 자신은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해야 했다· 자신의 얼어붙은 심장이 다시 뛸 수 있는지 다시 예전처럼 인간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지 말이다·
‘무원 곧 갈게·’
진무원이 하진월과 고서점을 다시 나온 것은 들어간 지 이틀 만이었다· 그동안 하진월은 고서점의 지하에 처박혀 있었고 진무원도 지상의 서가에서 마음에 드는 서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다시 밖으로 나온 하진월의 표정은 어딘가 단호하게 변해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똑같은 얼굴에 표정이겠지만 진무원은 그가 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검객이 검의 날을 벼려 뜻을 세우듯이 문사는 자신이 지닌 지식과 역량을 하나의 목적을 향해 합일시켜 큰 그림을 그려 나간다·
고서점의 지하에서 하진월은 큰 그림을 완성시켰다· 최소한 자신이 그려 나아가야 할 바를 확고히 정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하진월의 눈빛과 분위기는 변했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은 것인가?’
돌아가기엔 너무나 멀리 왔다· 결과가 어찌 나오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진무원도 알고 하진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중간에서 무언가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하진월이 입을 열었다·
“목마르구나· 객잔에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아직 낮입니다만·”
“언제는 그런 걸 따지고 술을 마셨느냐?”
하진월의 말에 진무원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동호 인근의 객잔으로 들어갔다·
아직 낮이라서 그런지 객잔 안은 한산했다· 두 사람은 동호가 환히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술을 주문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나눴다·
그사이 수많은 이가 객잔에 들어왔다 빠져나갔다· 그렇게 손님들이 몇 번을 바뀌는 사이 두 사람 앞에 놓인 술병도 점차 늘어갔다· 마침내 술병이 일곱 개로 늘어났을 때 하진월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하진월은 전혀 취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차갑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이다·”
“예?”
“내 뜻을 이루기 전에 마시는 마지막 술이란 말이다·”
“그러다가 후회하시는 것 아닙니까? 뜻이 언제 이뤄질지 어떻게 압니까?”
“흥! 내가 그렇게 마음먹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게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진무원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비웃는 게 아니었다· 하진월은 광오할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그의 장담이 오히려 기껍게 들렸다·
하진월이 진무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 흔들리지 말거라· 네놈 곁에는 내가 있다· 네놈은 무소처럼 앞으로 나가거라· 뒤처리는 내가 맡아서 할 테니까·”
“제게 원하는 것은 없습니까?”
“없다·”
하진월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까? 제가 천하를 상대로 미친 짓을 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럼 그 미친 짓도 수습해야지·”
“좋군요·”
하진월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나고 있었다· 은은한 광채마저 흘러나오는 그의 눈빛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책사란 결코 자신의 뜻을 내세워서도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도 안 된다· 주군의 뜻을 미리 파악하고 그에 맞춰 착실하게 미래를 그리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하는 것이야말로 책사의 본분이다·”
“주군?”
“그래 이 하진월이 네놈을 주군으로 정했다· 이제부터 나는 너와 뜻을 함께하고 운명을 같이하고자 한다·”
하진월의 말에 진무원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하진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진월은 진무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굳건한 의지가 담긴 눈빛은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저도 제가 어떤 가시밭길을 걸을지 모릅니다·”
“알고 있다·”
“어쩌면 천하 그 자체가 제 적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저와 함께하겠단 말입니까?”
“그 정도 부담감은 있어야 나도 천하를 상대할 맛이 있지 않겠느냐·”
광오하기 짝이 없는 하진월의 말에도 진무원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진월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무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하진월의 입가에도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주군이라면서 네놈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주군은 주군이고 네놈은 네놈이야· 나에게 네놈은 주군이면서 또 네놈이야·”
“어렵군요·”
“어려울 것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 공동 운명체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광으로 알거라·”
“영광입니다·”
진무원이 피식 웃었다· 하진월도 피식 웃었다·
어쩌면 첫 만남부터 이리될 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어제 북천문의 인명록은 왜 찾으신 겁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조가 나타난다고· 결국 그 어떤 일이든 인간이 주체가 되어 벌어지게 마련이다· 북천문의 멸문 역시 마찬가지야·”
“그래서요?”
“내가 알고 있는 사건의 흐름을 인물에 맞춰 확인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
“그래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습니까?”
“흐흐!”
하진월이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하진월을 바라보던 진무원의 눈빛이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그런 진무원의 변화에 하진월이 의혹 어린 표정을 지을 때다·
푸욱!
갑자기 바닥을 뚫고 검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검신은 하진월을 노리고 있었다·
진무원이 발을 뻗어 하진월이 앉아 있는 의자를 부드럽게 걷어찼다· 그러자 하진월의 몸이 의자와 함께 뒤로 밀려나갔다·
하진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암습?’
그 순간 창문을 뚫고 검은 무복을 입은 자객들이 일제히 난입했다· 그들이 진무원과 하진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자객들의 습격에 하진월이 이를 악물었다·
머리의 지식은 천하를 논할 만큼 방대하지만 그의 육체는 보통 사람만도 못했다· 당연히 암습에 반응할 만큼 기민하지 못했다·
쐐액!
한 자루 검이 그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온다· 그 광경을 뻔히 바라보면서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대로 죽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푸화학!
그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눈앞에서 피분수가 치솟아 오르는가 싶더니 그를 향해 검을 날리던 자객의 몸이 두 동강이가 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느새 그의 앞에 진무원이 서 있다· 설화의 묵빛 검신을 타고 선혈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진무원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새로 산 옷에 피가 묻은 것만 빼면 말이야· 쯧!”
하진월이 가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투덜거렸다· 그런 그의 목소리엔 일말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무원이 피식 웃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간담이 서늘해질 만한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하진월을 긴장하게 만들긴 역부족인 것 같았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장내에는 수십 명의 자객이 난입해 있었다· 그들은 진무원과 하진월을 향해 살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누굽니까 당신들을 사주한 자가?”
“····”
역시 대답이 없었다·
진무원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에게서 대답을 들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내에 난입한 자가 서른 명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가 마흔다섯 명· 모두 여든 명 정도인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전방위 감각이 발동했다· 무섭도록 확장된 그의 전방위 감각은 객잔 전체를 뒤엎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객잔의 구조와 은신해 있는 자객들의 위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다른 곳도 아닌 운중천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대규모 자객이 동원됐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운중천의 묵인이 있었거나 그들의 이목을 가려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어느 쪽이라도 진무원에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문득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떤 미친 짓을 해도 뒷수습을 해준다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랬지· 왜 그 미친 짓 지금 해보려고?”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 마음껏 날뛰어보려무나·”
하진월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무릎에 깍지를 꼈다·
자객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고 있었다· 검광이 번뜩이고 시리도록 차가운 검날이 독아를 드러낸 채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진무원보다 하진월을 노리고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하진월이 진무원의 약점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진월을 공격해 진무원의 심기를 흩뜨리고 공략한다·
자객다운 효율적인 공격이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당황해서 손발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보통의 무인이 아닌 진무원이었다·
진무원의 동체가 왼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빙그르르 돌아가며 설화가 허공에 선을 그었다·
피잉!
불길한 파공음이 허공에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하진월을 공격하던 자객들의 몸이 두 동강이가 나며 후두두 떨어졌다· 의자에 앉아 있는 하진월의 몸에도 피가 떨어졌다·
“쯧! 또 피가 튀는구먼·”
하진월이 혀를 찼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진무원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수많은 자객이 달려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진무원이라는 거대한 벽을 통과하지 못했다· 잘려 나간 팔다리가 허공으로 날리고 자객들의 억눌린 신음성이 울려 퍼졌다·
죽음이 난무(亂舞)하고 있다·
진무원만 싸우는 게 아니었다· 하진월도 싸우고 있었다·
진무원이 검을 휘두를 때 하진월의 머리는 최적의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 수많은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우선 네 족쇄부터 풀어주마 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