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 8장 난세의 바람이 불어오다 (2)
그곳은 오래전에 버려진 곳이었다·
칼처럼 뻗은 높다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분지에는 폭포와 계곡이 존재했다· 하지만 계곡을 흐르는 물은 시커멓게 변해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고 나무들은 말라죽어 을씨년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한때 분지를 가득 채웠던 고루전각들은 오래전에 버려지고 방치되어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다· 버려진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했다·
오래전 버려진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반나절 전부터이다·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늙은 악공이었다· 커다란 거문고를 등에 짊어지고 온 늙은 악공은 분지 한가운데의 공터에 앉아 탄주를 하기 시작했다·
반개한 늙은 악공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 슬픔이 고스란히 음률에 담겼다· 그의 슬픔에 동조하듯 먹장구름이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었다· 바람은 그의 음률을 멀리 실어 날랐고 산천초목마저 흐느껴 우는 듯했다·
후두둑!
마침내 먹장구름이 비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늙은 악공의 머리에도 비가 떨어졌다· 머리를 따라 빗물이 흘러내리고 옷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그래도 늙은 악공의 연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런 늙은 악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마치 검은 날개처럼 펄럭이는 피풍의와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황금빛 안광·
천하에 수많은 무인이 존재하지만 이렇듯 극명한 특징을 가진 남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흑익신창 그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흑익신창의 시선은 늙은 악공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천공음마(天空音魔) 윤천학·
그는 하나뿐인 제자 금단엽을 추모하고 있었다·
제자를 위해 연주하는 진혼가였다· 그를 보내주는 윤천학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그 깊은 슬픔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기에 흑익신창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그때였다· 윤천학의 뒤쪽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일어났다· 마치 흑곰처럼 거대한 동체와 등 뒤에 교차로 멘 두 개의 커다란 도끼 산발한 머리를 어깨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거인의 등장에 공기가 급속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큭! 누가 이리 청승을 떠나 했더니 음마(音魔)였구만·”
윤천학을 보는 거인의 입매가 뒤틀렸다· 그런 그의 몸에서는 가공할 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추산·”
거한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황금빛 안광을 토해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거한이 씨익 웃었다·
“문천·”
그는 흑익신창이란 별호 대신 이름을 불렀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우문천이란 진명(眞名)을·
우문천의 눈빛이 깊이 침잠되었다·
거한의 이름은 만추산 별호는 파천마부(破天魔斧)· 우문천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사대마장의 일원이었다·
마치 활화산처럼 공격적인 성향과 압도적인 육체 능력 때문에 사대마장 중에서도 가장 강한 파괴력을 갖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삼십 년 만에 만나는 것인가?”
“흐흐! 그 정도는 된 것 같군· 그때나 지금이나 자네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자네도 마찬가질세·”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외모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이 오직 그들만 비껴 간 듯했다· 하지만 그들 중 그에 의문을 품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제일 먼저 온 줄 알았는데 세 분이나 먼저 오셨군요·”
차분하면서도 이지적인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삼십 대의 미부·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흑청색이고 눈빛은 신비로운 은빛을 발하고 있다· 독보적인 미모와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여인은 바로 백야선자(白夜仙子) 소금향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만추산이 씨익 웃었다·
“크큭! 오랜만이군 마녀·”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사람이 쉽게 변하면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지·”
사대마장 중 셋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가공할 존재감에 빗방울마저 침범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격하고 그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모두가 모인 것은 아니었다·
흑익신창 우문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진명은 보이지 않는군· 역시 오지 않는 것인가?”
“또 천하를 떠돌고 있겠지· 그 인간의 방랑벽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까·”
그들은 이 자리에 오지 않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청풍마영(靑風魔影) 유진명·
그들과 같은 사대마장의 일원이자 천하에서 가장 빠른 존재· 청풍마영이란 별호처럼 그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가 결정을 내리면 가장 먼저 달려올 거예요·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소금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올 사람이다· 지금 이 자리에 없다고 초조해할 필요도 없고 의심할 이유도 없었다·
그 후로도 다섯 명이 더 합류했다· 평범해 보이는 촌로도 있고 밭을 갈다 나온 것처럼 보이는 아낙도 있었다· 시골이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몸에서는 사대마장 못지않은 기도와 존재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우문천이 중얼거렸다·
“육마존(六魔尊)까지 모두 모인 것인가?”
사대마장이 밀야의 대외적인 상징이라면 육마존은 실질적으로 밀야를 이끌어가는 자들이다· 그들은 천하 각지에 흩어져서 제자를 키우고 세력을 늘렸다·
서열은 사대마장이 위였지만 그들조차도 육마존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탄주하고 있는 천공음마 윤천학 역시 육마존의 일원이다·
사대마장에 이어 육마존까지 모두 모이자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그제야 윤천학이 탄주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학 상심이 크겠군·”
“단엽의 일은 정말 안타깝게 됐네·”
육마존이 제자를 잃은 윤천학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금단엽은 그들에게도 자식 같은 존재였다· 처음 무공을 익힐 때의 상기된 표정이 아직도 그들의 기억엔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위로하고자 했지만 윤천학의 표정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난 자네들의 위로나 받자고 대회합령을 요청한 것이 아니네· 단엽은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길 원했네· 난 그 아이의 꿈을 이뤄주고 싶네·”
“천학!”
“야주가 오시는 대로 정식으로 세상에 나갈 것을 요청하겠네·”
“····”
윤천학의 말에 장내가 일순 침묵에 빠졌다·
몇몇은 흥분한 표정을 지었고 몇몇은 우려 섞인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육마존 중 가장 온화한 인상을 가진 촌로가 입을 열었다·
“천학 많은 아이들이 죽거나 다칠 걸세·”
“언제까지나 그들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은 자네가 더 잘 알 걸세· 그들은 항상 세상에 나가길 원했지· 단지 우리가 그들의 뜻을 억눌렀을 뿐· 단엽은 그들을 대신해 죽음을 택한 걸세· 난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을 걸세·”
“으음!”
“단엽은 항상 밀야가 깨어나길 원했지· 세상을 향해 포효하길 원했고 응징의 검을 빼어 들길 원했네· 자네들을 보게· 나를 보게· 현실에 안주해 젊은 아이들의 꿈을 억누르는 못난 늙은이들이 여기 서 있네·”
윤천학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깊은 울림을 담은 그의 목소리에 파천마부 만추산이 씨익 웃었다·
“흐흐!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맞아· 단엽은 당신들이 죽인 거야· 당신들의 멍청함을 단엽이 일깨워 준 것이지·”
만추산이 이제는 죽음의 대지가 된 분지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잘 봐라· 이곳이 우리의 터전이던 곳이다· 이곳이 어떻게 파괴되고 어떻게 우리가 쫓겨났는지 벌써 잊은 것인가? 그렇다면 너희는 정말 대책 없는 머저리가 분명하다·”
“파산마부 말이 너무 심하시오· 아무리 당신이 사대마장이 일원이라지만 우리 역시 육마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시오·”
만추산의 도발에 발끈해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도살장에서 금방이라도 소를 잡을 듯한 백정에 가까운 복장을 한 중년인의 몸에선 거친 살기가 여과 없이 발산되고 있었다· 그의 가공할 살기에 바람마저 숨을 죽이고 빗방울이 타닥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칠지마존(七指魔尊) 장황·
육마존의 일원이자 천하에서 가장 살기가 짙은 도법인 야수도(野獸刀)의 주인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사대마장이라 할지라도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하지만 우문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죽거렸다·
“왜 한번 해보려고?”
“정녕 이렇게 나올 것이오?”
장황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켜 올라가면서 살기가 몇 배나 더 증폭됐다· 그러자 만추산이 씨익 웃으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우웅!
살기와 살기가 부딪치며 공명을 일으켰다· 보통 사람이라면 숨도 쉬기 힘들 만한 압박감이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장내에 감돌았다·
그때 윤천학이 앞으로 나섰다·
“자네들끼리 싸울 필요 없네· 어차피 결정은 야주께서 하실 테니까·”
“으음!”
윤천학의 말에 두 사람이 서서히 내공을 거둬들였다·
야주(夜主)·
밀야를 이끄는 절대자·
제아무리 사대마장이나 육마존이라 할지라도 그의 결정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어둠의 주인이니까·
지난 수십 년 동안 밀야는 전력을 다해 야주를 탄생시켰다·
그들을 지배하고 이끌어줄 진정한 주인을·
지금쯤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윤천학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 샌가 비는 멈추고 맑은 하늘을 드러내고 있었다·
“야주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나는 따를 것이네· 개처럼 기라면 길 것이고 짖으라면 짖을 것이네· 내 제자 단엽을 죽인 북검을 죽이고 운중천을 응징할 수 있다면·”
자식과도 같은 제자를 잃은 스승의 원한 어린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 ☆ ☆
진무원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전방을 올려다봤다·
“엉? 왜 그래?”
명류산이 그런 진무원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진무원은 대답 없이 한참 동안이나 앞을 바라봤다·
도도히 흐르는 장강의 끝자락에 거대한 도시가 그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무한(武漢)인가?”
호북성의 성도 무한·
중원의 모든 문물이 교차하는 곳 그리고 그 배후에 운중천이 존재한다· 이제부턴 운중천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진무원의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북방의 거친 하늘 그 아래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아비와 거친 바람 아래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자신의 모습이 교차됐다·
“십··· 년 십 년이 걸린 것인가? 이곳에 오기까지·”
그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드디어 이 자리에 왔다·
운중천 그 절대자들의 대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