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 8장 난세의 바람이 불어오다 (1)
칠성 진인은 혼절한 후 하루 만에 정신을 차렸다·
“사숙 괜찮으십니까?”
화산파 제자들의 물음에도 그는 답하지 않고 멍하니 선실의 벽만 바라보았다· 그에 화산파 제자들은 그가 심마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칠성 진인은 심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마치 모든 것이 꿈같았다· 창운의 죽음도 일원의 배신도· 아니 꿈이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바람일 뿐 현실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사숙?”
“창운과 일원의 시신은?”
“지금 당 대협이 선실에서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곳으로 가겠다·”
칠성 진인은 창궁의 대답도 듣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창궁과 창혜가 급히 따랐다·
칠성 진인은 당기문의 선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선실 안에서는 당기문과 진무원 하진월이 창운과 일원의 시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당기문이 칠성 진인에게 다가왔다·
“칠성 몸은 괜찮은가?”
“알아낸 것은?”
“그건····”
“말해주게·”
당기문을 바라보는 칠성 진인의 눈빛은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답을 구하는 그의 눈빛을 당기문은 외면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 오게·”
칠성 진인은 당기문을 따라 일원의 시신 앞으로 다가갔다· 문득 칠성 진인의 시선이 창운에게 닿았다· 그의 눈에 아픔의 빛이 떠올랐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일원의 시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원의 시신 옆에는 그의 품에서 발견한 자기병이 놓여 있었다· 당기문은 자기병 안에 든 액체가 백록산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갑자기 당기문이 일원의 가슴을 풀어헤쳤다· 칠성 진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일원의 가슴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당기문이 품에서 조그만 옥병을 꺼내 들며 말했다·
“그냥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네· 하나 이 육미산(六迷散)을 뿌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육미산은 당기문이 만든 비약 중 하나였다· 본래는 독에 중독된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만든 약이었다· 육미산을 뿌리면 신경이 마비되면서 고통을 덜 느끼게 되는 효능을 갖고 있다·
당기문이 일원의 가슴에 육미산을 뿌리자 피부 위에 숨겨져 있던 문양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건?”
“문신일세·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특수한 용액을 뿌리면 나타나지·”
일원의 가슴에는 두 얼굴을 가진 수라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쫙 찢어진 눈과 가슴까지 빼문 혀가 어찌나 생생한지 금방이라도 일원의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하루 온종일 살펴보다가 겨우 발견한 걸세·”
“일원의 가슴에 왜 이런 문신이····”
칠성 진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화산파에서 문신은 금기나 마찬가지다· 문신은 죄를 씻을 수 없는 범죄자들이나 하는 것이란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사숙!”
창궁과 창혜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로 일원이 외부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신을 할 시간도 따로 없었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화산파에 들어오기 전부터 저 문신을 비밀리에 했다는 뜻이다·
칠성 진인이 당기문을 똑바로 바라봤다·
“일원의 가슴에 문신이 있다는 사실을 또 누가 아는가?”
“여기에 있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모르네·”
“당분간 이 사실은 비밀로 해주게·”
“칠성·”
“부탁일세·”
“알겠네·”
당기문의 대답에 칠성 진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진무원은 그런 칠성 진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문신은 화산파에 들어가기 전에 한 것· 누군가 어떤 목적하에 일원이란 자를 화산파에 들여보낸 것이 분명하다·’
칠성 진인도 그 사실을 짐작하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 터였다·
‘쌍면(雙面)의 수라를 표식으로 사용하는 단체가 강호에 있던가?’
같은 수라의 얼굴이지만 느낌이 조금 달랐다· 왼쪽에 있는 수라의 얼굴이 평온한 느낌이라면 오른쪽에 있는 수라는 마치 당장이라 피를 흘리며 덤벼들 것처럼 무섭게 생겼다·
‘도대체 강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문득 십자혈마공이 떠올랐다· 당시 조천우도 십자혈마공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십자혈마공에 이어 쌍면의 수라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두 개의 단어가 왠지 이어져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문은 또 있었다·
‘일원이란 자는 왜 창운 도사를 죽인 것일까? 혹여 창운 도사가 알아서는 안 될 사실을 알게 된 것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고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진무원은 조용히 선실을 빠져나왔다· 갑판 난간에 기대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밀야의 재등장으로 이제껏 숨죽이고 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가? 아니면 강호에 따로 암류가 존재하고 있던 것인가?”
난세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난마처럼 복잡하게 얽힌 정국이 과연 어떻게 천하에 영향을 끼칠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진무원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돌리는 칠성 진인이 보였다·
“진인?”
“진무원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언젠가 이 신세는 반드시 갚지·”
“····”
“화산파의 명예를 걸고 이 칠성이 약속하겠다·”
화산파의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이다· 칠성 진인의 약속은 억만금 이상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비록 심마에 빠진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경험을 했는지는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심마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은 미쳐 날뛰다가 주화입마에 들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공력이 상실되고 몸은 망가진다·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주화입마에 든 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칠성 진인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칠성 진인도 주화입마에 빠져야 했다· 심맥이 꼬이고 내력은 상실되어 폐인이 되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의 상태는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내력이 상승했다· 지금이라면 매화를 스무 송이도 더 피워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칠성 진인은 그 이유가 진무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수를 써서 자신을 안정시킨 것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비록 그가 성질이 급하고 편협할지는 모르지만 은혜를 잊어버릴 정도로 몰염치한 사람은 아니었다· 은혜를 받았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무엇보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진무원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본도를 상회하는 가공할 검공 무엇보다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마음· 강호에 신성이 출현했구나· 차후의 강호는 그가 이끌어 가리라·’
북검이란 별호를 처음 들었을 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소문이 오히려 그의 진면목을 반도 표현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칠성 진인은 강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선두에 진무원이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뽑으라면 사람들 십중팔구는 서문세가를 뽑을 것이다· 서문세가는 대대로 천하제일의 책사를 배출해 왔다· 그 때문에 강호에서는 서문세가 사람을 얻는 자가 곧 천하를 지배한다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서문세가의 당대 가주는 서문종천이었다· 하지만 서문세가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이는 서문종천의 아비이자 태상장로인 서문화였다·
서문화는 책사의 가문에 불과하던 서문세가를 오늘날의 부흥기로 이끈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책사는 무공이 약하다는 선입견을 깨고 아홉 하늘 중 한 명이 된 극강의 무인이기도 했다·
십 년 전 북천문을 봉문시킨 후 서문화는 칩거에 들어갔다· 그는 서문세가 사람들에게도 그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고 무주헌(無主軒)이라는 그만의 공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무주헌은 서문세가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조그만 모옥이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모옥에 불과했지만 허락 없이 발을 들여놓는 순간 죽음의 절진이 발동된다· 서문세가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절진에 빠져드는 순간 죽음을 면치 못한다· 파훼법을 아는 자는 오직 단 한 명 서문화뿐이었다·
무주헌이 위치한 심처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수한 인상의 문사였다·
그의 이름은 서문종천· 서문세가를 이끌어가는 당대 가주이다·
무주헌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긴장의 빛이 가득했다· 서문세가의 가주답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두뇌의 소유자였지만 아비인 서문화가 칩거하고 있는 무주헌에 들 때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절진 앞에 서서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소자 종천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소로가 갑자기 나타났다· 서문화가 서문종천을 위해 생로를 열어준 것이다·
서문종천은 소로를 따라 무주헌으로 다가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시시각각 변했다·
‘아버님은 그새 또 새로운 경지에 오르셨구나·’
서문종천의 눈으로도 몇 개의 진법이 중첩되어 있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주헌으로 향하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무주헌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안에서 창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예 아버님·”
서문종천은 몸가짐을 똑바로 하고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모옥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넓었다· 방 안에는 서책을 꽂을 수 있는 서가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상하게 서가에 꽂힌 책은 겨우 두 권이 전부였다·
서문종천의 눈에 경악의 빛이 일렁였다· 책을 채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비우는 일은 그보다 몇 배 몇 십 배는 더 어려운 일이다· 특히 서문세가 사람들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하물며 이곳의 주인은 아홉 하늘 중 한 명인 서문화이다· 서책을 버렸다는 것은 궁극의 지혜를 향한 탐욕을 거의 벗어던졌다는 뜻이다· 마지막 남은 두 권의 서책은 그의 마지막 미련일 터였다·
서가의 중앙에는 서책을 읽을 수 있는 조그만 좌탁이 있고 누군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일흔 초반으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노인의 눈은 천하의 모든 지혜를 담고 있는 듯 깊고 유현했다·
서문종천이 노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눈앞에 앉아 있는 노인이 서문세가의 실질적인 수장이며 아홉 하늘 중 한 명인 서문화였다·
“아버님 소자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가주 고개를 들게·”
“예 아버님·”
서문종천이 고개를 들어 서문화를 바라보았다·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아버님의 말씀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전을 기하시게·”
“물론입니다· 소자가 어찌 아버님이 지시하신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으음·”
고개를 끄덕이는 서문화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천재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자식이지만 그의 기대에는 많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수성(守成)할 수 있는 능력은 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할 능력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라면 흠· 안타깝구나· 혜령이 그 아이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서문세가의 자손 중 그의 눈높이를 충족시키는 아이는 오직 서문혜령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서문화는 그런 속내를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만전을 기하거라· 조만간 다른 아홉 하늘이 직접 움직일 것이다·”
“정말입니까?”
서문종천이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다· 이제까지 서로를 견제하느라 심력을 소모했지만 밀야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하면 아버님도?”
“이제 세상으로 나갈 때가 된 것 같구나· 천기가 혼탁해·”
지난밤 서문화는 보았다·
고요하던 별의 바다에서 천기가 요동치는 것을·
사멸했다고 생각하던 북천좌(北天座)가 미약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북천좌는 그와 상극의 별자리·
‘확인해야 한다· 북천좌의 주인을· 그리고 두 번 다시 빛을 발산할 수 없게 말살해야 한다·’
현묘한 신광을 발하는 서문화의 눈빛 속에 한줄기 살기가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