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7장 죽음은 결코 공평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3)
“후우!”
유장환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큰 숨을 토해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은마상단 사람들 모두가 유장환처럼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무슨 바람이····”
호상단주 이등명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한 식경 전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 폭풍이 몰아쳤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몰아치던 눈 폭풍은 마치 거짓말처럼 멈췄다· 바닥에 쌓였던 눈도 따스한 햇살 아래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눈이 왔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휴! 이 지랄 같은 날씨는 정말 적응이 되지 않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신강성에서 청해성으로 넘어가는 접경 지역은 유난히 고산과 호수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날씨가 변화무쌍해서 예측하기 힘들었다· 하늘에는 해가 떠 있는데 눈 폭풍이 몰아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쌓인 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이곳 지형과 기후에 익숙지 못한 사람은 큰 곤욕을 치르곤 했다· 은마상단 역시 단단히 준비를 하고 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곤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문득 유장환의 시선이 상단의 행렬 끝에 있는 마차로 향했다· 마차 지붕 위에는 이제 겨우 열대엿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앉아 있다· 은한설이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눈 폭풍을 맞았는데도 은한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멀쩡한 모습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고 어깨나 머리 위에도 눈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녀에게만 눈 폭풍이 빗겨 나간 것 같았다·
은한설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장환은 자신도 모르게 은한설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까마득한 지평선 너머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산맥이 보였다·
“대곤륜(大崑崙)·”
유장환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청해성의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영산이다· 한여름에도 만년설이 쌓여 있는 정상의 모습은 사람들이 경외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 거대하면서 웅장한 산맥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곤륜산을 유명하게 한 것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 문파였다·
곤륜파(崑崙派)·
흔히들 말하는 구대문파에 속하면서도 세상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지문이다· 중원에 있는 다른 구대문파와 달리 곤륜은 제자를 거의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고 세속의 욕망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운중천이 출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면서도 정작 운영에는 관심이 없어 욕망에 초탈한 듯 보였다· 그렇게 세상일에 거의 관여를 하지 않았지만 마인들의 준동이나 난세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나섰다·
그 때문에 청해성 사람들의 곤륜파에 대한 존경은 여타 구대문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록 운중천의 아홉 하늘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마음만 먹었으면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유장환은 은한설이 곤륜파만큼 신비롭다고 생각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거의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마치 다른 세상에 홀로 사는 사람 같았다·
‘대체 저 소녀의 정체는 뭘까?’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았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가 입을 열지 않으니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때 이등명이 유장환에게 말했다·
“눈 폭풍을 헤치고 나오느라 모두가 지쳤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럽시다·”
유장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다른 이들처럼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마침 이 근처에 노숙을 하기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하룻밤 머물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이등명이 앞장서서 노숙지로 향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근처의 한 호숫가였다· 이름 모를 호수 근처에는 커다란 바위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분지가 있었다· 노숙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유장환이 감탄했다·
“이런 곳은 또 언제 알아두었습니까?”
“하하! 평생을 길 위에서 지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직 멀었군요· 이 단주님을 따라가려면 더 열심히 쫓아다녀야겠어요·”
“하하! 저야 언제든 환영입니다·”
이등명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노숙에 이골이 날 대로 난 무인들은 알아서 노숙을 준비했다· 은한설은 마차 지붕 위에 앉아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을 길러 오고 모닥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은한설은 왠지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고된 일정 속에서도 그들은 힘들다는 표정 한번 짓지 않고 웃으며 떠들어댔다· 별것 아닌 농담에도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그들을 보면서 은한설은 괴리감을 느꼈다·
은한설은 양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무원·’
이상하게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인데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욱 당혹스러웠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은한설에게 말을 걸었다·
“소저 음식이 다 됐으니 같이 식사합시다· 모두 소저를 기다리고 있소·”
고개를 드니 유장환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은한설이 물끄러미 유장환을 바라보자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은한설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마치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착지한 그녀는 유장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하! 어서 오시오 소저·”
“여기 앉으시오·”
상단의 보표들이 은한설을 위해 자리를 내줬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보표들이 이제는 스스럼없이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은한설이 앉을 자리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은한설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보표 하나가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죽이 담긴 그릇을 건넸다·
은한설은 망설이지 않고 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서 사람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은한설은 그저 열다섯 살 소녀에 불과했다· 그래서 더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 보표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자리를 정리했다· 식기 정리가 끝나고 모닥불 주위로 잠자리가 만들어졌다· 경계를 서는 몇 명의 보표만 빼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은한설에게는 가장 좋은 자리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잠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는 거의 자지 않아도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은한설은 자리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쏟아질 것 같은 별의 바다가 그녀의 망막 가득 들어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두가 수마에 잠식되고 번을 서던 보표들마저 꾸벅꾸벅 졸면서 노숙지는 깊은 정적에 빠졌다·
그 고요함을 즐기던 은한설이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살기· 백여 장 밖·’
은혼심결을 완성한 그녀의 감각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그런 그녀의 감각에 백여 장 밖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일단의 무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은마상단의 그 누구도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득 그녀는 고요한 숨소리만이 가득한 노숙지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은한설은 노숙지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의 모습은 매우 추레했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에는 누런 먼지가 쌓여 있고 오랫동안 감지 않은 머리는 떡이 져서 기름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씻지 않았는지 얼굴에는 때가 가득 끼어 있고 어둠 속에 드러난 이빨은 누렇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황포삼흉(黃袍三兇)·
최근 청해성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마두들이었다· 모두 한 핏줄을 타고난 형제로 성정이 포악하고 무공이 고강해서 청해성에 당할 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주로 청해성을 지나가는 상단을 약탈해서 먹고살았는데 이제껏 수많은 상단과 상인들이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물건을 빼앗겼다·
그들에게 죽은 이의 수가 무려 수백 명이 넘어가자 청해성에 있는 몇몇 문파에서 그들을 응징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워낙 신출귀몰한데다가 청해성이 워낙 넓어 아직까지 그들의 꼬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흐흐! 저 언덕 너머에 은마상단이 있단 말이지?”
“맞소· 서역에서 제법 이득을 많이 남긴 것 같다 하니 털면 쏠쏠할 것이오·”
“그 돈이면 오랜만에 원 없이 계집질을 할 수 있겠군· 흐흐흐!”
황포삼흉이 음소를 흘렸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 주머니에 돈이 들어온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은마상단의 전력으로는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응?”
그때 그들의 앞으로 갑자기 신기루처럼 조그만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황포삼흉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들은 음흉한 음소를 흘렸다·
“흐흐! 이게 웬 떡이냐?”
교교한 달빛 속에서 몽환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소녀는 은한설이었다· 황포삼흉은 그런 은한설의 외모에 완전히 홀려 버렸다·
그들에겐 은한설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음욕을 풀어줄 대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계집 너도 은마상단 소속이더냐? 은마상단이 기특하구나· 이 어르신들을 위해 계집도 미리 준비하고· 그 대가로 특별히 고통 없이 죽여줘야겠구나·”
“이리 오너라· 이 어르신들이 특별히 너만은 살려줄 테니까·”
“고거 한입에 삼켜도 비린내 하나 나지 않겠구나·”
그들의 눈이 음욕으로 번들거렸다·
은한설은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하지만 황포삼흉의 눈에는 그 모습이 더 매혹적으로 보였다·
“계집 어서 이 어르신들의 품에 쏙 안기거라· 마음껏 귀여워해 줄 테니까·”
은한설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그걸로 결정됐군·”
“뭐가 말이냐?”
“당신들의 생사가·”
“응? 우하하하! 계집 말도 참 귀엽게 하는구나!”
황포삼흉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낄낄대던 황포삼흉 중 첫째가 은한설을 보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어린 계집아 이 어르신들이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옷을 벗고 이리 달려오너라·”
“우선 그 더러운 입부터·”
“뭐?”
스걱!
한참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첫째는 갑자기 입가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의식중에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는 첫째를 보며 둘째와 셋째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혀 형님?”
“형님의 혀가····”
첫째의 혀가 매끈하게 잘려나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첫째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째와 셋째를 바라보던 첫째가 갑자기 찾아온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우워억!”
하지만 혀가 잘려나간 탓에 그의 비명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둘째와 셋째가 은한설을 노려보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계집 감히 암습을 하다니!”
“함정을 파고 기다렸구나· 곤륜의 제자냐?”
은한설은 대답 대신 공력을 끌어올렸다·
휘류류!
순간 은빛 기류의 폭풍이 일어나 그녀를 에워쌌다·
“무슨?”
황포삼흉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어리는 순간 은빛 폭풍이 그들을 향해 덮쳐왔다·
쿠콰가각!
☆ ☆ ☆
은마상단은 간밤에 사신이 찾아왔단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다시 먼 길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일단의 무리가 노숙지에 모습을 나타냈다· 푸른색 도복을 입은 세 명의 도사였다·
그들은 잠시 노숙지를 둘러보더니 곧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곳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사람의 것으로 짐작되는 잔해였다·
“으음!”
도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의 무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신의 잔해를 바라보는 젊은 도사들의 표정 역시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황포삼흉의 시신이 분명합니다·”
“누군가 저희보다 한발 앞서 황포삼흉을 제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잔혹하군요·”
“마공의 흔적이다·”
중년무인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이 침중하게 변했다·
젊은 도사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공기 중에 옅게 남아 있는 사특한 기운의 잔향을 느낄 수 있었다·
“황포삼흉보다 더한 마인이 나타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이름은 백남회· 대곤륜이 황포삼흉을 처단하기 위해 세상으로 내보낸 희대의 무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