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5장 때로는 자존심이 전부일 수도 있다 (2)
남수련과 현공휘가 선착장 근처 갈대밭에서 대치하고 있다· 두 사람의 기세에 바람마저 숨을 죽인 것 같았다·
잠시 남수련을 바라보던 현공휘가 입을 열었다·
“칠소천 나는 항상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실력마저 같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한 단어로 뭉뚱그려 몰아넣는다는 사실이·”
“저는 이제까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기분이 나쁘군요· 현 공자와 같이 앞뒤 못 가리는 사람과 함께 칠소천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
“큭! 잘됐군·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다니·”
현공휘가 큭큭 웃음을 흘렸다· 그의 몸에서는 자연스럽게 정제되지 않은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칠면서도 광포한 살기가 남수련의 신경을 자극했다·
남수련의 눈에 처음으로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어찌 됐든 상대는 칠소천의 일원이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기재 일곱 명 중 한 명인 것이다· 그 수준이 범상할 리 없었다·
현공휘의 살기가 점점 덩치를 불려갔다·
남명신공(南明神功)·
지금의 현공휘를 있게 만든 무공이다· 천성적으로 살기가 강한 자만이 익힐 수 있고 살기를 증폭시켜 상대를 압박하는 공능을 가지고 있다·
숨 막힐 듯한 현공휘의 살기에 남수련이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본래의 안색을 되찾았다·
그녀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천수여래검(千手如來劍)·
신비지문인 무산파의 삼대절공 중 하나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운을 담고 있다· 무산파의 장문인이나 장문제자만이 익힐 수 있는 지고한 무공이었다·
남수련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이제까지는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분위기였다면 지금 그녀에게서는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잘 벼려진 명검처럼 청명하면서도 날카로운 그녀의 모습에 현공휘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큭! 그래도 아주 허명은 아니란 건가?’
흥분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떨림이다·
스릉!
남수련이 검을 뽑아 현공휘를 겨눴다· 그러자 칼날 같은 기세가 뻗어 나와 현공휘의 미간을 자극했다·
현공휘는 살기 어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낭아도를 뽑았다·
검과 도가 서로를 향했다·
그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시선을 교환했다·
단 한 번의 시선 교환이었지만 그 사이로 무수한 정보가 오갔다·
눈빛 몸짓 어깨 호흡을 통해 서로의 의도와 공격의 순간을 가늠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남수련은 처음부터 천수여래검의 절초인 천라섬망(天羅纖網)을 펼쳤다·
슈우우!
그녀의 검이 유성이 되어 현공휘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그녀의 검에 미간이 관통되기 직전 갑자기 현공휘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바로 남수련의 후방이었다·
지둔보(地遁步)라는 현공휘의 독문보법이었다· 소림사의 부동명왕보(不動明王步)에 비견될 정도로 순간적인 이동에 특화된 보법이었다·
남수련의 허리가 활처럼 휘면서 후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캉!
낭아도와 검이 격돌하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두 사람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단 한 수의 교환이었지만 서로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현공휘가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좋구나!”
그는 남수련을 향해 연신 낭아도를 휘둘렀다·
늑대의 이빨처럼 광포하며 거친 공격에 칼바람이 일어났다· 하지만 남수련은 침착하게 그의 공격을 하나하나 분쇄했다·
옷깃을 표표히 흩날리며 검을 움직이는 남수련의 모습은 선녀처럼 고고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보는 관산철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허! 저 계집이 저 정도였다니·”
솔직히 칠소천의 일원이라고 했을 때도 우습게 본 것이 사실이다· 아무것도 아닌 계집이 사문을 잘 만나서 칠소천의 반열에 올랐다고 폄하했다· 그러나 현공휘를 상대로 싸우는 남수련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공휘는 마치 야수 같았다· 가공할 본능과 고도의 무공이 결합된 그의 움직임엔 군더더기라곤 없었고 사소한 동작 하나까지도 엄청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관산철도 광오한 자였지만 저런 현공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남수련은 현공휘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그 무서운 현공휘와 호각지세라니 관산철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기랄!”
형 관산웅도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역시 동생과 똑같은 굴욕감을 느낀 것이다·
남수련과 현공휘의 대결은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검풍과 도풍이 몰아치고 잘린 갈대가 서설(瑞雪)처럼 흩날렸다·
현공휘는 낭아도뿐만 아니라 월곡도까지 꺼내 든 상태였다· 그만큼 남수련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남수련은 현공휘도 놀랄 만한 무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현란하면서도 집요했다· 현공휘가 조금의 허점이라도 보이면 마치 독사처럼 파고들었다· 그 때문에 현공휘도 남수련을 경시하던 마음을 버린 지 오래였다·
상대는 진짜배기였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자칫 그가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 흥분됐다·
오직 사선(死線)을 넘나들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짜릿함·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규칙과 명제는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죽이느냐 죽임을 당하느냐의 단순한 명제뿐·
현공휘는 그 단순함이 좋았다·
“크하하!”
그는 연신 광소를 터뜨리며 폭풍처럼 남수련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남수련도 만만치 않았다·
뚜다다당!
마치 천 개의 검으로 벽을 만든 것처럼 그녀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현공휘의 공격은 그녀의 검벽에 막혀 모조리 튕겨 나가거나 빗겨 나갔다·
검과 도가 부딪치고 곤과 봉이 합세했다·
현공휘의 폭풍 같은 연환 공세는 언제까지고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남수련은 알고 있었다·
이 공격이 끝나는 순간 진짜가 들이닥친다는 것을·
그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이 갈릴 것이다·
승부도 삶과 죽음도·
슈우우!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현공휘를 향해 빨려들어 가며 기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남수련은 예상한 순간이 도래했음을 직감하고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우웅!
검이 검명과 함께 은은한 붉은빛 기류를 토해냈다· 검무(劍霧)였다· 천수여래검의 절초인 천검낙일(千劍落日)을 펼치기 전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순간 현공휘가 갑자기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가 소유하고 있던 무기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라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콰우우!
잠시 주위를 맴돌던 무기들이 현공휘의 손짓을 따라 남수련을 향해 쇄도해 왔다·
남명신공을 이용한 백병쟁투(百兵爭鬪)의 초식이다· 그가 알고 있는 가장 살기 어린 초식이기도 했다·
번쩍!
천검낙일과 백병쟁투의 초식이 허공에서 격돌하며 빛 무리가 터져 나왔다·
“크윽!”
강렬한 빛 무리에 좌문호와 흑백쌍웅 형제가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내공을 익힌 고수답게 바로 시력을 회복하고 전장을 바라보았다·
“양패구상(兩敗俱傷)인가?”
좌문호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현공휘와 남수련 모두 피를 흘리고 있다· 현공휘는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 있고 남수련은 어깨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누가 봐도 양패구상인 상황이다·
그런데도 남수련과 현공휘는 서로를 노려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중상을 입었지만 누구 한 사람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이다·
남수련을 바라보는 좌문호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저 계집을 그냥 놔두면 필히 척마대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창룡회는 척마대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최대한 많은 인원을 창룡회의 무인들이 차지를 해야 차후의 강호를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 중요한 자리를 남수련처럼 창룡회에 반하는 자에게 넘기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흑백쌍웅이 그런 좌문호의 속내를 눈치챘다· 그들 역시 좌문호와 같은 생각인 것이다·
좌문호처럼 창룡회 내의 기반이 든든한 자라면 모르겠지만 그들처럼 기반이 약한 자는 남수련 같은 존재 때문에 밀릴 공산이 컸다·
‘지금이라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 제거할 수 있다·’
악마의 유혹이다· 남수련에게 눈빛만으로 제압당한 치욕이 되살아났다· 일단 한번 살심이 발동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무산파가 걸리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다· 비무 중 죽는 일은 다반사였고 그게 무산파의 제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흑백쌍웅 형제가 살기를 머금고 남수련을 향해 다가갔다· 남수련은 온 신경을 현공휘에게 집중하고 있느라 두 사람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흑백쌍웅의 앞을 막아섰다· 적갈색 피풍의를 걸친 남자 진무원이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 흑백쌍웅의 인상이 험상궂게 변했다·
“네놈은 누구냐?”
“내가 누군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들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가 중요한 것 같군요·”
진무원의 담담한 대답에 두 사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부끄러운 빛이 떠올랐다· 진무원에게 속내를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끄러움은 이내 분노로 변했다·
관산웅이 버럭 소리를 쳤다·
“비키지 않겠다면 네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무원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들 뒤에 서 있는 좌문호를 바라보았다· 진무원의 담담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순간 좌문호는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다·
‘이자가 누구이기에?’
진무원이 남수련 곁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에 왠지 꺼림칙했다·
‘어떡한다?’
그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흑백쌍웅 형제가 살기를 발산하며 진무원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흑백쌍웅 형제에게 맡기고 지켜보자·’
상대가 누구든 간에 흑백쌍웅 형제가 쉽게 당할 리 없었다· 일단 그들이 대처하는 것을 지켜본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흑백쌍웅 형제가 진무원의 앞에 섰다· 보통 사람보다 족히 머리 하나가 더 큰 거구가 두 명이나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압박감이라도 느껴야 할 텐데 진무원의 표정에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이 흑백쌍웅의 화를 더욱 돋웠다· 마치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관산철이 공력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눈빛부터 고쳐주마!”
그의 전신이 순간적으로 검게 물들어갔다·
격포진체공(擊砲眞體功)·
천하에 존재하는 수많은 외공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괴공(怪功)이다· 격포진체공을 완성하면 피부가 철갑보다 단단하게 변하며 외부의 그 어떤 충격에도 상처를 입지 않게 된다·
단단하기로만 따지면 금강불괴 못지않았다· 무엇보다 격포진체공의 가장 큰 장점은 조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 외공은 피부와 근육을 단련할수록 어린아이 피부보다 여린 약점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조문이라고 부른다· 약간의 힘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곳이기에 외공을 익힌 자들은 아무리 가까운 친인에게도 조문을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흑백쌍웅이 익힌 격포진체공은 특이하게도 이 조문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외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궁극의 무공인 셈이다·
흑백쌍웅은 격포진체공을 믿었다· 천하의 그 누구라도 자신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꿇어라! 애송이!”
그들이 진무원을 향해 솥뚜껑 같은 주먹을 휘둘렀다· 그들은 이번 일격에 진무원이 피떡이 되어 쓰러질 거라고 자신했다·
그 순간 그들은 환상을 보았다·
진무원에게서 섬전이 번뜩이더니 그들의 팔뚝에서 피가 치솟아 오르고 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