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6장 소의 걸음으로 천리를 걷는다 (2)
거처로 돌아온 은한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겨우 본신 내공의 절반 정도가 회복되었다·’
본래라면 내력이 완전히 회복된 이후에나 몸 안에 남아 있는 독을 몰아내야 하지만 그녀에겐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잠식한 독은 생각보다 지독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진무원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당한 독은 천하에서 가장 악독하면서 위험한 인물인 만들어낸 것이었다·
혈혈화혼독(血血化混毒)·
한 모금만 들이켜도 내장 기관이 한 줌의 혈수로 변해 절명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이야 잊혔지만 수십 년 전 혈혈화혼독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본래대로라면 은한설은 분명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런데 진무원이 그녀에게 복용시킨 호심제독단이 묘하게 혈혈화혼독과 상성이 맞았다·
완전히 제거를 할 수는 없었지만 독기를 억제시키는 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이제까지 목숨을 유지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호심제독단의 효능도 이제 거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내력을 온전히 회복하기도 전에 목숨이 위험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운명을 건 도박을 하기로 결심했다· 현재까지 회복된 내공만으로 몸 안의 독력을 몰아내려는 것이다·
은한설은 정신을 집중하고 운공을 했다· 대주천을 두 번 한 후 몸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은한설이 내공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재 그녀는 몸 안의 독기를 비장 쪽에 몰아놓고 내공으로 감싼 상태였다· 비장에 있는 독기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왼손 약지로 보내야 했다· 내공의 운용이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평정심이 흔들리면 독기는 그녀는 칠공으로 피를 토하면 즉사할 것이다·
은한설은 내공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하자 그녀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혔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코와 뺨을 간질였지만 그녀는 미동도 없이 내공의 운용에만 집중했다·
비장 쪽에 가둬두었던 독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독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거세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큭!’
하마터면 평정심이 깨져 독기를 감싸고 있던 기의 막이 깨질 뻔했다· 그만큼 독기의 반항은 거셌다· 놈도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한동안 은한설의 내공과 독기의 기 싸움이 계속되었다· 단박에 제압할 수 없는 이상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은한설은 내공을 배분해 최대한 오래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은한설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아무래도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무리해서 내공을 운용하다 보니 몸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치 걸레처럼 전신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은한설이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비명을 지르면 기의 막이 깨지면서 극독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라신선이 와도 그녀를 살릴 수가 없었다·
‘집중해라 은한설· 여기에 너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은한설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런 그녀의 전신이 흥건히 젖어갔다·
꿀렁!
갑자기 그녀의 몸 안에서 독기가 크게 요동을 쳤다· 순간 그녀의 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크게 튕겨졌다· 용케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큰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주르륵!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검은 피가 흐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다급히 독기를 제압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단 반발한 독기를 제압하기엔 그녀의 내력이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끄 끝인가?’
그녀의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그녀는 자신이 혈혈화혼독의 독기를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문득 그녀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가장 존경하는 사부도 가족들도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이상한 사람·’
그때였다·
“소주 정신 차리십시오·”
등 뒤에서 낯선 음성과 함께 손길이 느껴졌다· 이어 그녀의 명문혈을 통해 가공할 내공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몸 안으로 들어온 낯선 내공은 그녀의 내공과 합쳐지더니 곧 혈혈화혼독의 독기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소주 정신을 집중하시고 내력을 운용하십시오·”
은한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력을 운용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은한설의 명문혈에 장심을 댄 사람 역시 그녀에게 보조를 맞추어 공력을 조절했다·
그녀가 강하게 운용하면 그도 강하게 운용하고 그녀가 지쳤다 싶으면 그도 여유를 두면서 휴식을 유도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은한설의 얼굴에 은은하게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은한설은 독기를 왼손 약지로 모조리 밀어 넣었다·
주르륵!
그녀의 약지를 타고 검은 액체가 방울져 맺히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씩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검은 액체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바로 은한설의 몸을 잠식하던 혈혈화혼독의 독기였다·
은한설은 정신을 집중해 몸 안에 잠복하고 있던 독기를 모조리 밖으로 밀어냈다· 혈혈화혼독의 독기가 끝까지 반항했지만 두 사람의 공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 한 방울의 독기까지 모조리 그녀의 몸 밖으로 배출되었다·
“휴!”
그제야 은한설의 운공을 도와주던 이가 명문혈에서 장심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검은 피풍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가리고 있었다· 펑퍼짐한 피풍의 때문에 체형마저 구별할 수 없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풍기는 기운이 무척이나 사이하다는 것이다·
은한설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반가운 빛이 일렁였다·
“사령(邪令) 살아 있었구나·”
“소주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설마 이곳에 숨어 계신 줄 모르고 한참을 찾았습니다·”
사령이라 불린 존재가 은한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소주를 위험에 빠지게 한 죄는 차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됐어· 사령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저도 한동안 모처에 숨어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그럼 사부님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네·”
“예 상처를 치료하자마자 바로 소주를 찾아왔습니다·”
사령의 대답에 은한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심정을 읽었는지 사령이 눈을 빛냈다·
“주군께서는 분명 무사하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주· 지금은 소주의 몸이 회복되는 게 먼저입니다·”
“음!”
은한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북천문에 은신하신 것은 진정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들도 소주께서 이곳에 계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겁니다· 당분간 이곳에 더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십시오·”
“사령은?”
“저는 주군께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해·”
“그런 말씀 마십시오· 두 분을 위해 사는 것이 제가 태어난 이유입니다·”
사령의 음성에는 딱히 고저가 없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은한설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사령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사이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풍겨 나왔다·
“우선 소주께서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이곳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령의 붉은 입술 사이로 유난히도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그가 살심을 품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령은 은한설의 몸 상태로 그녀가 이곳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짐작했다· 비록 몰락했다고 하지만 이곳은 그가 있던 곳과는 상극의 문파·
사령에게 은한설은 천하에서 가장 지고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약간의 위해라도 가할 가능성이 있다면 차라리 싹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북천문 안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할 수 있었다· 사령은 그럴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아니야· 됐어·”
“소주!”
“그가 있는 것이 더 편해서 그래·”
“알겠습니다·”
사령은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어서 운공을 하셔서 내력을 회복하십시오 소주·”
“그래·”
은한설도 두말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을 시작했다· 사령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지켰다·
잠시 후 운공이 모두 끝나고 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은한설이 눈을 떴을 때 사령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은한설은 알고 있었다· 사령이 그녀의 사부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그리고 사부를 찾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사령·”
은한설이 사령이 사라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흐음!”
진무원은 폐부 깊숙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직 차갑긴 하지만 그래도 며칠 전에 비하면 공기가 확연히 따스해진 느낌이다· 진무원은 봄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지난겨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은한설이라는 군식구가 생겼고 만영결에 입문했다· 검을 익히고 또 검을 만들었다·
그런 일과가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며 그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그의 나이 이제 열일곱· 아직 성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나이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성인보다도 깊고 유현했다· 또한 키가 훌쩍 자라서 육 척의 장신을 자랑했다· 외적인 모습만 보자면 성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진무원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태양 볕이 따사롭게 느껴지고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저 태양이 사람의 키 높이만큼이나 쌓인 눈을 흔적도 없이 녹일 것이다·
그렇게 겨울은 가고 봄이 돌아온다· 마찬가지로 지금 그가 겪고 있는 고난의 시기도 언젠가 지나가고 평화로운 시기가 올 것이다·
진무원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평소처럼 북천문을 한 바퀴 돈 다음 만영탑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그가 박살 낸 목검이 시체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걱정하지 않았다· 박살 낸 만큼 새로 목검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미리 만들어둔 목검을 들고 암반 앞에 섰다· 지난겨울 동안 그렇게 목검을 휘둘렀건만 암벽에는 흔한 생채기 하나 나 있지 않았다·
힘이 빠질 만도 하건만 진무원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퍽퍽!
만영탑 지하에 목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전이었다면 몇 번 휘두르지 않아서 목검이 부러졌겠지만 지금은 수십 번을 휘둘렀는데도 멀쩡했다·
이젠 검을 휘두르는 것에도 요령이 생겼다· 예전처럼 무작정 세게 휘둘러서 목검이 부서지고 손바닥까지 터져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힘을 줄 때는 확실히 주고 거둘 때는 확실히 거둬서 몸에 전해지는 부담감을 줄이면서도 암반에는 확실한 타격을 준다· 누가 가르쳐 줘서가 아니라 진무원 스스로 고된 과정을 통해 검을 수발하는 요령을 터득해 가는 것이다·
‘허리를 좀 더 빠르게 어깨의 근육은 확실히 조여주고····’
진무원은 검을 휘두르면서도 숨을 쉬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며 최적의 자세와 힘 배분을 찾으려 했다·
진무원은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추구했다· 교감을 통해 자신이 완벽하게 검을 휘두르길 소망했다·
그렇게 얼마나 휘둘렀을까?
진무원은 이제 자신이 목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그저 휘두르고 또 휘두를 뿐이었다·
무의식중에 육체와 정신이 조화를 이뤘다· 진무원이 그토록 원하던 심신일체(心身一體)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그 순간 아랫배에 고인 채 정체되어 있던 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영결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 내공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발산될 곳을 찾아 이동했다· 진무원은 순간 전신의 기력이 목검을 통해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쑥!
진무원의 검이 단단한 암반을 두부처럼 파고들었다· 순간 진무원의 평정심이 흔들리며 몰입에서 깨어났다·
진무원은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며 눈을 빛냈다· 비록 그 과정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몸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말이다·
진무원은 자신이 진일보했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검에 내공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진무원은 본능적으로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몰입감 이 평정심이 완전히 깨지기 전에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진무원은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굳이 목검에 내공을 담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아까와 같은 느낌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진무원의 목검이 지나간 암반이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잘려나갔다·
일반적으로 검을 익힌 무인들이 검기를 발출하는 경지에 오르면 어떤 형태로든 표가 날 수밖에 없다· 일단 검에서 아지랑이처럼 기가 피어오르며 흐릿한 형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을 바로 검기(劍氣)라고 부르며 상승지경으로 가는 과도기로 본다·
상승지경(上昇之境) 또 다른 말로는 초절정의 경지라고도 부른다· 내기와 외기의 구분이 없어 아무리 써도 내공이 마르지 않는다· 이 경지가 되어야 비로소 검강이나 도강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명문대파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이 경지에 오르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제자의 뛰어난 자질과 스승의 제대로 된 가르침 그리고 영약의 지원과 같은 문파의 후원이 합쳐져야만 이뤄낼 수 있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간혹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 나타나 그런 과정을 뛰어넘고 홀로 상승지경으로 가는 길을 열곤 하지만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검기는 그들이 상승지경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하지만 진무원의 목검에서는 검기가 발출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단단한 암반을 두부처럼 파고들었다·
진무원은 내공이 바닥날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소의 걸음으로 더디 가면 어떠한가?
쉬지 않고 걸으면 언젠가 천릿길의 끝에 도달할 것을·
진무원이 탑으로 돌아온 것은 다음 날 해가 질 무렵이다· 무아지경에서 검을 휘두르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 그지없었지만 거처로 향하는 그의 마음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응?”
만영탑 상층에 있는 거처로 들어오던 진무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은한설이 뚱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몰라서 물어?”
“응?”
“어제 아침부터 지금까지 안 보였잖아·”
“그럼 하루가 지났단 말이야?”
진무원이 오히려 반문을 하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한나절이 지난 게 아니라 하루하고 또 한나절이 지났단 사실을·
그제야 진무원은 은한설이 왜 화가 났는지 알아차렸다·
“그럼 이틀 동안 꼬박 굶었겠네?”
“흥!”
은한설의 코웃음에 진무원이 한쪽에 있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평소와 다름없는 진무원의 모습에 은한설이 잠시 안도의 눈빛을 했다·
사령이 다녀간 직후 진무원이 보이지 않았다· 사령이 자신의 명령을 거역할 리는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은한설은 그런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사부 외의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는 감정 자체가 그녀에겐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밥을 짓는 진무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진무원은 만영탑 정상에 앉아 만영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볕의 조화에 감춰져 있던 구결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직 이 시간에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조화였다·
매일처럼 보는 광경이지만 오늘은 더 특별했다·
간밤에 내공을 점검해 보던 진무원은 자신의 몸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그의 앞을 막아서던 벽을 한 단계 넘어선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만영벽에는 만영결과 더불어 역대 문주들이 공통적으로 심득을 남긴 무공이 하나 더 있었다·
오직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불가해(不可解)의 검공(劍功)·
이제까지 그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른 것은 만영벽 안에 남겨진 검공을 익히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해가 떠오름에 따라 만영벽의 글자가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떠오르는 이름 하나·
멸천마영검(滅天魔影劍)·